화려한 유물은 대부분 신라가 가장 약했을 때
경주 일대만 지배하고 있을 때 출토된다는게 수수께끼.
신라가 경주 일대의 부족연맹체라는 가설이 오류.
본피부는 경주 인왕동 일대라는건 오류,
다른 지역에도 관련된 6부와 유물이 다수 확인됨.
이러한 착오는 봉건사회의 연맹체 개념을 이해를 못하고
지도에 선을 긋고 색을 칠하는 습관 때문.. 지도에 줄 긋는 것은 현대인의 관점.
예컨대 가야라는 것은 존재한 바가 없어.
최치원은 기록하기를 변진은 백제이고, 마한은 고구려이며
진한은 신라라고 분명히 써놨는데도 당대인의 기록을 믿지 않고
마한은 백제., 변진은 가야, 진한은 신라라고 엉뚱하게 주장하는게 영토 때문인데
백제는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왔으므로
백제와 영토가 겹치는 마한은 당연히 고구려계 이주민들이 접수.
고구려계가 마한을 접수하자 밀려난 세력이 가야로 이동했는데 이들은 백제와 동맹했으므로 변진은 백제
즉 여기서 가야는 우리가 아는 낙동강 하류 가야가 아니라 호남과 경남일대를 합쳐서 말하는 것.
그러므로 최치원의 기록은 영토중심이 아니라 이주민 중심으로 쓴 것.
고조선이 망하고 이주민이 3한의 많은 도시국가 소국을 건국했는데
3한이라고도 하고 진국이라고도 했는데 진은 주역에 의하면 동쪽
진한은 동쪽 한이라는 뜻.
몽고 북쪽에 있던 부여계가 대거 남하하여 고구려를 이루자
고구려 땅에 살던 사람이 황해도 충청도로 이동한게 마한.
그때 호남과 경남에서 해상활동을 하던 사람이 변진
낙동강 상류지역이 진한. 여기서 변진은 진한과 진짜를 같이 쓰는 데서 보듯이
변진과 진한은 영역이 다를 뿐 언어나 문화적으로 동일한 집단.
즉 마한은 고구려에서 내려왔으므로 문화적 차이가 있고
변진과 진한은 호남과 영남으로 그냥 같은 집단인데 영토가 다를 뿐.
변진은 호탐과 경남인데 가야로 축소된 것은 백제가 영토를 확장한 이후의 일
이러한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려면 중원 고구려비를 읽어보면 됨.
중원 고구려비에 의하면 백제왕 개로가 신라로 이동하여
신라토내 젊은이들을 규합하여 병사를 모았기로 고려대왕이 군대를 내어
개로왕을 죽여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은 것이고 신라는 나제동맹은 꿈도 꾸지 말 것이며
신라가 다시 나제동맹을 복원하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임.
현재 학계는 장수왕이 왜 고구려비를 세웠는지 밝힌 내용이 없음
왜냐하면 당시는 나제동맹이 견고해서 고구려가 신라를 건드리지 못할 때였음.
고구려비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형제의 예를 맺었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 당시는 나제동맹이 견고하여 신라가 고구려에 대항하던 시기임.
자비왕과 소지왕이 고구려와의 국경에 성을 잔뜩 쌓아서
경북 일대의 고구려군을 소백산맥 너머로 몰아내고 고구려와 항창 신경전을 벌일 때
중원 고구려비가 세워진건 장수왕이 개로왕을 죽이고 신라에게
나제동맹을 깨라고 협박하던 시기.
비석 건립 다음 해에 장수왕은 말갈군을 보내 포항까지 쳐들어갔고
백제와 가야가 구원하여 신라가 강릉까지 반격했음
그러므로 중원 고구려비는 실제 역사와 하나도 맞지 않음.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광개토대왕이 고구려비를 세웠다고 말하면 됨
현재의 장수왕 설은 실제 역사와 안 맞는게 너무 많음
위든, 아래든 다 긴장해야 한다.
빈자이든 기득권이든 대한민국 영토안에 있는 사람은 긴장해 있어야 한다.
내가 가장 무서울 때는 나 자신이 긴장하고 있지 않을 때,
특히 중요한 일 앞두고 긴장하지 않으면 그 일은 성사되지 않았기에
긴장하지 않는 것이 가장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