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축짐벌 구조론 거리를 확인할 때는 삼각측량을 쓴다. GPS는 위성 세 개의 신호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다. 흔들리는 카메라를 안정시킬 때는 3축짐벌을 쓴다. 그런데 왜 3축일까? 공간은 3차원이다. 왜 3차원일까? 좌표의 X축, Y축, Z축과 같다. 어떤 둘의 관계를 판단할 때는 항상 3이 쓰인다. 대포를 쏴도 세 번째에 명중탄을 낸다. 적군이 어림짐작으로 700미터 거리에 있다면 첫번째 탄은 눈대중으로 대략 500미터를 날린다. 두번째는 장약을 추가해서 600미터를 날려준다. 장약의 추가에 100미터가 늘었으므로 장약을 얼마나 추가해야 명중탄이 나는지 판단이 선다. 장약을 조절하여 세 번째에 명중탄을 낸다. 삼각측량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표적에 대한 변화율을 판단하는 것이다. 대포와 적군의 거리는 눈금이 없는 막대자와 같다. 눈금이 두 개가 되어야 자로 기능한다. 눈금과 자의 비율에 따라 거리가 측정된다. 눈금이 1센티고 자가 30센티다. 30 대 1의 비율이 나온 것이다. 그렇다. 비율을 획득하는 절차다. 자가 그 자체로 하나의 눈금이라면 눈금 둘은 자 속의 자다. 눈금 속의 눈금이다. 구조의 복제다. 10센티 눈금 속에 1센티 눈금을 찾는다. 이야기는 거기에서 시작된다. 하나의 눈금을 정하는 데는 값 셋이 필요하다. 소총은 가늠자와 가늠쇠와 표적이 있다. 1탄이 가늠자 역할을 맡고 2탄이 가늠쇠 역할을 맡으면 3탄의 정조준이 명중탄을 낸다. 사수와 가늠자, 가늠쇠, 정조준, 표적으로 다섯 가지 변수가 연동되어 한꺼번에 움직인다. 사수는 다섯 가지 값을 하나의 라인에 태워 연동시켜야 한다. 사수가 움직이면 당연히 망한다. 사수는 호흡을 멈추고 손가락도 멈추어야 한다. 서서히 힘을 가해서 자신이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야 한다. 가늠자든 가늠쇠든 움직이면 망한다. 모든 것을 1렬로 연동시키는 정조준이 흔들려도 망한다. 표적이 움직여도 망한다. 그런데 이 다섯 중에서 표적과 사수는 당연히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치고 나머지 셋만 논하는게 보통이다. 물론 특수부대의 이동사격은 다르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움직이는 사슴을 쏜다면 다섯 가지 변수를 동시에 통제해야 한다. 이는 특수한 경우이고 보통은 3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왜 3일까? 1은 변화, 2는 대칭, 3은 대칭의 축이기 때문이다. 대칭의 축을 움직여서 대상을 통제하므로 3각측량, 3차원 공간, 3축짐벌을 쓴다. 사건은 원인과 결과가 있다. 원인이 결과를 입맛대로 통제하려면 그 사이에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이에 대칭 2와 축 1이 쓰인다. 원인과 결과는 고정되어 있다고 치고 그 중간에 들어가는 대칭 2에 둘이 공유하는 축을 더하여 셋을 통제하는게 보통이다. 국민과 대통령은 고정된 상수로 치고 여당과 야당에 중도파까지 세 변수에 대응한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대칭의 축이 두 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칭구조 속에 또 다른 대칭이 숨어 있다. 짐벌이 대칭과 축을 이루듯이 거기에 카메라와 사람을 더하면 카메라는 변화, 짐벌은 대칭, 사람은 대칭축이다. 카메라와 짐벌을 연동시키면 사람이 둘을 아우르는 축이다. 짐벌 속에도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대칭에 대칭을 씌우면 5다. 사수와 표적 사이에 가늠자, 가늠쇠, 정조준이 있듯이 사수, 짐벌, 표적도 덧씌워진 3을 이룬다. 사수와 짐벌과 표적이 또다른 짐벌이다. 짐벌 속에 짐벌이 있다. 구조 속에 구조가 있어 구조의 복제다. 축 속에 축을 만들고 대칭 속에 또 대칭을 만든다. 구조가 복제되면 완전성이다. 사람들은 그 완전성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깨지지 않는다는 원자론의 개념을 떠올린 것이다. 가짜다. 깨진다. 세상 모든 것은 변화한다. 깨지지 않는 것은 없다. 변화가 자신을 복제할 때 나란해지고 그것이 찾아야 할 완전성이며 그 완전성을 깨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단 변화 속의 변화다. 구조 속의 구조다. 대칭 속의 대칭이다. 의사결정 속의 의사결정이다. 그것은 나란하다. 그 나란함이 변하지 않으므로 만유의 척도가 된다. 눈금이 나란하면 자다. 천칭이 나란하면 밸런스다. 그것을 깨고 싶지 않았다. 깨지지 않는 원자 따위는 없고 대신에 깨지면 곤란한 밸런스가 있는 것이다. 밸런스가 깨질 수도 있지만 합당한 조건에서 밸런스가 깨지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떤 대상을 추적할 수 있다. 진실을 알아낼 수 있다. 해안에서 바다 위에 떠 있는 배까지 거리를 알아내 포탄을 날릴 수 있다. 세상은 언제나 변하지만 변화 속에는 변화를 나란히 따라가는 밸런스가 있고 사람들은 그 밸런스를 깨고 싶지 않아서 원자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그것은 인간의 막연한 희망사항이었을 뿐이다. 변화 속의 변화는 나란하다. 구조 속의 구조는 나란하다. 대칭 속의 대칭은 나란하다. 답은 그곳에 있다. 그 밸런스는 유용하다. 세상은 5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밸런스 속의 밸런스, 대칭 속의 대칭이 5다. 원인에서 결과까지 진행하여 가는 하나의 사건 속에서 다섯 개의 변수를 모두 통제할 때 대상은 완벽하게 추적된다. 이것이 원자처럼 기능하는 것이다. 원자는 세상이라는 구조물의 건축재다. 우주를 건축하는 벽돌이다. 그 벽돌은 상상속의 존재이고 실제로는 사건의 완전성이 있을 뿐이다. 원인에서 결과까지 1 사이클을 진행하며 계 내부에서 에너지 모순을 처리하는 절차가 있다. 균형 속의 균형, 의사결정 속의 의사결정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