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혁명 박정희 죽은 날 언덕에 올라 혼자 만세를 부른 데는 이유가 있다. 815 해방의 날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큰 마을로 몰려가서 함께 만세를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었기로 박정희 죽은 날에도 만세 부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경주 시내를 자전거로 한 바퀴 돌았지만 그런 낌새는 없었다. 사람들은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나 혼자 희희낙락 하는 것도 어색하다.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음악수업을 할 수 없다며 울먹이던 선생님은 종이를 나눠주고 박정희 죽음을 슬퍼하는 감상문을 제출하라고 했다. 독재자 말로가 꼬시다는 말을 슬쩍 끼워 넣어 썼다. 혹시 교무실로 불려갈까 걱정했지만 하긴 학생들이 쓴 것을 읽어보기나 하겠는가? 사방 백 리 안에 대화가 되는 사람은 없다. 백 대 빵, 아니 천 대 빵, 아니 만 대 빵으로 내가 패배한 게임이다. 우주 안에 홀로 고립되었다. 인간과는 대화가 통하지를 않으니 신과의 대화를 모색할밖에. 육사의 광야를 떠올렸다. 육사의 청포도가 청포도라고 믿는 사람은 도무지 대화가 안 되는 사람이다. 애도 아니고 참.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청포 입고 오는 손님이다. 알아보는 사람은 생각이 있는 사람이다. 다시 천고의 뒤를 바라보고 언덕에서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는 이유다. 한 호흡 더 살아도 좋다는 허락을 맡는 절차. 엉길 근거가 있어야지. 독재자를 독재자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언젠가는 올 거라는 믿음. 만세를 불러서 특별히 기억해둔다. 지금은 눈이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지만 먼 훗날에 청포를 입은 손님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 모시수건은 준비되어야 한다. 정치에 관심 없는 필자가 정치 이야기를 하는 이유. 예견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축구장은 10년 전에 이미 뒤집어졌다는 것이 필자의 예견이다. 적들은 개인을 씹는다. 시스템을 건드리지 않는다. 왜? 우리가 시스템의 개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논하더라도 그렇다. 적들은 사람을 친다. 이게 다 흥선대원군 때문이다. 이게 다 명성황후 때문이다. 생산력은 논하지 않는다. 아일랜드가 망한 이유는 영국이 씹어서고 조선이 망가진 이유는 청나라가 씹어서다. 그런 근본은 절대 말하지 않는다. 왜? 엄두가 나지 않으니까. 사람이 가장 만만하다. 그래서 사람을 조진다. 노무현 개인을 씹을 뿐 노무현 세력에 대해서는 모르쇠하며 딴전을 피우거나 혹은 노빠라고 비하하며 그 안쪽의 내막을 들여다볼 궁리를 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의 반이 노빠이고 문빠라면 생각이란 것을 좀 해봐야 할 텐데 말이다. 문빠들이 김경수를 민다는 식의 초딩 음모론이나 퍼뜨리고 있다. 등신 삽질이다. 나쁘지 않다. 그들이 오판할수록 우리는 즐겁다. 삽질하는 자는 계속 삽질하도록 두라. 노무현 세력의 본질은 사회의 권력서열이다. 한 번 정해진 서열이 바뀌랴? 수평권력이 정착되면 잘 변하지 않는다. 이게 본질은 권력게임이고 권력서열의 변동은 축구장을 기울인다. 기울어진 축구장은 원위치 되지 않는다. 축구장이 반대쪽으로 뒤집어질 조짐은 이명박 시절부터 있었다. 지방선거에서 다 드러났다. 추물 이명박근혜 개인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이미 수명을 다한 축구장이 버텼다. 지방선거에서 이명박은 허벌나게 깨졌다. 노무현은 죽지 않았다. 김한길 박지원 안철수 이종걸 정동영의 난동에 노무현세력의 구심점이 없었을 뿐이다. 판이 뒤집힐 때는 까딱까딱하다가 때가 되면 확 뒤집어져서 철통같이 굳는다. 이명박근혜 시절 까딱까딱하며 조짐이 있었다. 문재인 축구장도 기레기들이 언플만 하면 까딱까딱하다가 확 넘어갈 줄로 알고 코로나19 핑계 대며 문재인이 지갑을 주웠지 하고 딴전 피우지만 이게 철판으로 용접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개도 서열이 있는데 사회에 서열이 없겠나? 좁은 바닥에서 권력서열이 쉽게 바뀌나? 경상도 > 전라도 지역 간 권력서열에서 대졸세력 > 고졸세력 학력 간 권력서열로 판도가 바뀐 것이다. 악재라도 문재인 지지율이 떨어지지 않고 진중권이 밀어줘도 국힘당 지지율이 올라가지 않는 이유는 한국인 특유의 권력서열 때문이다. 형과 동생이 한 번 정해지면 바뀌지 않는다. 한국인은 무덤까지 형은 형이고, 아우는 아우다. 50대가 문재인을 미는 이유는 유리하게 조성된 권력서열을 바꾸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보수에서 진보로 바뀌지 않는다. 진보에서 보수로 바뀌는 수는 있어도 그 반대는 없다. 50대가 갑자기 진보로 돌아선 것은 전혀 아니다. 노무현은 내게 백마 타고 온 초인이다. 나는 사람을 섬기지 않는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청포도가 있으면 은쟁반이 있고, 광야가 있으면 초인이 있고, 내가 태어났으면 이유가 있다. 그 수미쌍관을 받아들일 뿐이다. 부름이 있으면 응답이 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언덕에서 홀로 노래하며 응답을 기다렸다. 노무현이 와 주었다. 노무현이 목 놓아 불렀고 노빠가 응답했다. 나는 또 누군가를 부른다. 광야에서 노래하는 자가 있으니 청포를 입은 손님은 온다. 비빌 언덕, 살아있을 근거, 호흡을 연결해 가는 방식이다. 삶은 부름과 응답의 연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