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균형론 게임이 벌어진다. 에너지를 통제하는 게임이다. 에너지는 언제나 대칭을 이룬다. 대칭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거기에 방향성이 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이후 바로잡을 수 없게 된다. 그 길로 쭉 미끄러진다.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대칭은 51 대 49다. 의사결정은 50 대 50의 대칭을 이룬 다음 축을 이동시켜 51 대 49의 비대칭을 만드는 형태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너지는 언제나 간당간당한 상태가 된다. 공간의 궁벽함에 쫓기고 시간의 다급함에 쫓긴다. 상대가 있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바둑은 세력과 실리의 대결이다. 정치는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다. 전쟁은 전략과 전술의 대결이다. 인생은 권력과 현찰의 대결이다. 우리는 부단히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리고 의사결정을 요구받는다. 에너지를 통제하는 스위치는 관계다. 관계는 연결 아니면 단절이다. 정답은 정해져 있다. 그것은 관계의 연결이다. 우리는 언제나 연결을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연결만이 진정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단절은 선택이 아니라 강요다. 에너지가 고갈되면 단절할 수밖에 없다. 식량이 없으면 식구를 줄이고 용돈이 궁하면 여친과 헤어진다. 관계의 단절은 물리력에 의해 강요되는 것이지 주체적인 선택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세력을 선택하고, 진보를 선택하고, 전략을 선택하고, 권력을 선택해야 한다. 연결을 선택해야 한다.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환경에 쫓겨 어쩔 수 없이 강요당하는 거다. 이론은 이론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다른 거다. 이론은 배워야 한다. 여러분은 배우려고 이 글을 읽는 것이다. 현실은? 각자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현장의 환경은 언제나 변화무상한 것이며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 맞게 대처하면 된다. 이론은 불변이므로 배우는 것이다. 정치는 진보와 보수의 대칭에서 진보가 약간 우세하다. 국지적으로는 보수가 우세할 수도 있다. 51의 진보는 학교에서 배우고 49의 보수는 각자 알아서 눈치껏 하는 것이다. 진보는 외부 환경과의 연결이고 둘 사이의 연결은 미리 손발을 맞춰야 하므로 연습을 해야 한다. 연결은 서로 간에 타이밍이 맞고, 포지션이 맞고, 프로토콜이 맞아야 한다. 상대방이 받지 못하는 패스는 날리지 말아야 하는 거다. 보수는 단절이므로 배우지 않아도 된다. 그냥 단절하면 된다. 포로포즈는 미리 준비해야 한다. 일생에 한 번 받을까말까 한 프로포즈다. 궂은 날씨에 컨디션도 좋지 않은데 갑자기 고백받으면 낭패다. 당연히 거절된다. 인간이 눈치도 없이 말이야. 그러려면 미리 신호를 줬어야지. 반면 거절은 분위기 파악이 필요 없다. 그냥 거절하면 된다. 의사결정 비용이 적게 드는 것이다. 진보는 학습이고 보수는 눈치다. 진보는 집단의 일이므로 배워서 손발을 맞춰놔야 하는 것이고 보수는 개인의 사정이므로 배우지 않아도 된다. 교과서는 진보만 가르치고 보수는 가르치지 않는다. 독립운동가는 교과서에 실어주고 친일파는 배제한다.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무엇을 하면 그게 곧 진보다. 태극기가 몰려다니면 결국 국가의 진보로 귀결된다. 상대의 맞대응을 불러 역효과가 나기 때문이다. 보수는 하더라도 샤이 트럼프처럼 몰래 해야한다. 보수는 샤이하게 뒷구멍으로 하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가 균형이지만 궁극적으로 진보가 앞선다. 대칭의 비대칭이다. 의사결정은 대칭 50 대 50을 비대칭 51 대 49로 전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분야든 최종보스는 진보다. 그래서 알파고는 좌파다. 굳히기 한 수를 더 두어야 하는 상황에도 손을 빼고 다른 곳을 연결해 새로운 전단을 열어간다. 보스 밑에서 일하는 실무자는 보수다. 대통령의 외교는 다른 나라와 연결하므로 진보다. 총리의 내치는 예산을 아끼므로 보수다. 불요불급한 예산을 자른다. 단절하는 것이다. 51 대 49로 대통령이 우세해야 시스템이 돌아간다. 50 대 50으로 교착되면 의사결정이 불가능해진다. 홀수가 되어야 결정할 수 있다. 에너지의 컨트롤 문제다. 에너지는 연결 아니면 단절이고 그 외에 선택지가 없다. 에너지는 언제나 간당간당한 상태가 된다. 가계부는 언제나 빡빡하다. 이윤은 언제나 박하다. 여유는 언제나 없다. 인간은 늘 쫓긴다. 왜? 쫓기니까 움직이지, 여유만만인데 움직이겠냐? 그러므로 자연의 어떤 상태는 곤궁한 상태다. 게임이 주어진다. 의사결정해야 한다. 구조론은 게임이론이고, 권력이론이며, 전략이론이고, 의사결정이론이고, 진보이론이며, 진화이론이고, 관계이론이다. 관계를 연결할 것인가, 단절할 것인가? 답은 에너지 방향성이다. 사건 안에서 에너지를 통제하여 의도를 관철하는 문제에서 선택지는?
에너지의 연결과 단절 연결하면 계속 연결해야 하고 단절하면 계속 단절해야 한다. 연결은 길이고 길은 다른 길과 연결되므로 계속 연결된다. 단절하면 연결할 수 없다. 길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방향전환 안 된다.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연결한 사람이 끊는 결정은 되고 그 역의 결정은 없다. 사람들은 온갖 주장을 늘어놓는다. 혹자는 사랑이라거니, 혹자는 자유라거니, 혹자는 자비라거니, 혹자는 원자라거니, 혹자는 이데아라거니, 혹자는 정의라거나, 혹자는 평등이라거니 말들이 많다. 그게 다 연결하라는 말이다. 사랑은 사람이 살며 서로 연결하는 것이다. 자유는 연결의 자유다. 노예는 연결하지 못한다. 자유를 달라는 말은 외부와 연결할 기회를 달라는 말이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는 연결의 기본단위를 찾자는 거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원자가 딱딱해서 연결이 안 되므로 부드럽게 기름을 쳐서 연결해 보자는 아이디어다. 평등은 연결하려면 서로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는 원칙이다. 차별하면 당연히 연결이 끊어진다. 정의는 잘 연결되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어떤 주장이든 그것은 결국 연결에 대한 것이다. 혼자 있으면 연결되지 않는다. 밖으로 나가서 크게 세력을 이루어야 연결이 된다. 연결보다 단절이 쉽다. 의사결정이 쉽다. 연결은 일일이 전화선을 가설해야 하지만 단절은 그냥 스위치를 누르면 된다. 가만 놔두면 모두가 단절을 결정해서 망한다. 쉬운 선택을 계속하면 다들 히키코모리가 된다. 점차 개인주의로 간다. 집단과의 연결이 끊어진 것이다. 반대로 인터넷과 미디어에 의해 사회의 연결정도가 높아졌으므로 끊어도 된다는 것이 개인주의다. 연결될수록 인간은 끊는다. 면전에서 끊을수록 뒤로 연결성이 높아진다. 얼굴은 안 보고 문자만 날린다. 상호작용은 계속된다. 인간은 거기서 부단히 선택을 요구받는다. 답은 곧 죽어도 연결이다. 끊어도 먼저 연결한 다음 끊어야 한다. 끊으면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끊어진 관계를 또 끊을 수는 없다. 인간은 선택하여 이득을 취한다. 그 선택은 끊는 것이다. 그럴 때 선택권을 뺏긴다. 이득을 취하다가 권력을 잃고 기회를 뺏기게 된다. 연결 - 현찰손실 권력이익 단절 - 현찰이익 권력손실 연결은 비용이 들지만 한 번 연결하면 또 다른 연결기회를 얻는다. 외판원이 고객을 한 명 얻으면 그 고객을 통해 다른 고객을 소개받는다. 친구와 연결되면 또 다른 친구를 소개받는다. 연결은 구조가 복제된다. 연결하면 회비 지출로 손해지만 다음에 만회할 기회가 있다. 단절하면 회비를 내지 않으므로 당장 이득이지만 계속 끊겨서 고립되고 만다. 연결의 비용손실과 권력이익이 있는가 하면 단절의 현찰이익과 권력손실이 있다. 둘의 균형원리에 의해 세상은 작동한다. 내시균형처럼 전략균형이 있다. 어느 쪽이든 다음 단계가 예측된다. 서로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건이 또 다른 사건으로 복제될 때 예측이 가능하므로 전략이 주어진다. 게임의 정답은 사건의 주최측이 되는 것이다. 선택에 내몰리지 말고 선택을 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대칭을 비대칭으로 바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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