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게임론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사회계약론이나 천부인권설 같은 것이 있지만 솔직히 인간은 계약한 적도 없고 하느님이 도장을 찍어준 일도 없다. 사회계약이니 천부인권이니 하는 관념들은 레토릭이 딸리는 자들의 어설픈 수사에 불과하다. 그런 표현을 쓴 의도를 짐작할 수는 있다. 존재는 사건이며 인간이 사건에 뛰어들면 게임이 시작된다. 게임은 다수가 룰을 공유한 상태에서 상대의 행동에 적절히 맞대응을 하되 그에 따른 결과를 예측하고 상황에 맞게 의사결정하여 보상을 획득하는 것이다. 다수가 룰을 공유하면서 그에 따른 효율성을 가져가는 것이 게임이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말이 있지만 희망사항일 뿐 인간은 그다지 자유롭지 않고 평등하지 않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을 뿐이다. 누구든 운명적으로 게임의 출발선에 서게 된다. 자유의사로 서는 것은 아니다. 태어나보니 피부색과 성별과 국적과 가족이 결정되어 있다. 받아들일 수밖에. 신체적인 조건도 저마다 다르고 지능도 다르다. 게임을 거부하면 가출, 노숙, 범죄, 은행털이, 산적, 해적, 마적 따위를 선택할 수 있다. 그들은 맞아 죽거나 혹은 교도소에서 생활하게 된다. 호주에서 애보리진의 수감율이 백인의 15배인 것을 보면 게임의 탈락자도 적은 숫자는 아니다. 게임의 참여는 당연한 의무가 아니라 사회가 발달하면서 이루어놓은 고도의 성취다. 사회계약이든 천부인권이든 자유와 평등과 박애든 그것은 문명의 성취이지 무조건적으로 주어진 미션은 아니다. 당연히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며 서로 사랑한다는 관념은 허상에 불과하다.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다. 가출하면 불행해질 확률이 높다. 노숙하면 골병든다. 범죄를 저지르면 역시 좋지 않다. 게임을 받아들이면 결과는 알 수 없다. 게임을 거부하면 그게 부족민 사회다. 부족민은 많아야 100명이다. 노약자와 어린이를 제하면 50명이다. 성별을 구분하면 25명이다. 그들은 서로 만만한 사촌 간이다. 그 25명 중에 특정한 상황에서 주도적으로 의사결정에 가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아야 다섯 정도다. 보통은 나이로 밀리고, 힘으로 밀리고, 지혜로 밀리거나 혹은 뿔뿔이 흩어져 다른 장소에 나가 있으므로 그 상황의 집단의 의사결정에서는 제외된다. 특정 상황에서 5명 정도가 경합하면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입장을 지킬 수 있다. 흥정할 수도 있고 순번을 정할 수도 있고 나중을 약속할 수도 있다. 긴밀하게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한계를 넘으면서 인류의 문명은 촉발된 것이다. 그리고 개인이 대응할 수 없는 딴세계로 가버렸다. 법 나오고 제도 나오고 조직 나오면서 피곤해졌다. 개인은 시스템이라는 수레바퀴에 이리저리 치인다. 사회계약이든 천부인권이든 자유와 평등과 박애든 100명 정도의 소집단에서 주도적으로 나서는 5명의 경합에서 먹힐 뿐이다. 집단의 숫자가 70억을 찍어버리면 모든게 희미하다. 여전한 것은 게임뿐이다. 사회는 토대의 공유에 의해 성립된다. 공유에는 효율이 따른다. 공유에 따른 효율을 편취하려고 하면 상대의 맞대응에 의해 게임이 촉발된다. 게임을 거부하면 맞아 죽거나 혹은 산적이나 해적, 마적을 하다 교도소에 수감된다. 어느 경우든 그다지 좋지 않다. 게임 참가자는 상대의 행동을 예측하고 맞대응할 수 있다. 능동적인 의사결정을 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기대할 수 있으며 결과에 책임을 지게 된다. 장기전이든 단기전이든 전면전이든 국지전이든 선택할 수 있다. 장기전 전면전을 선택하면 진보가 되고 단기전 국지전은 보수가 된다. 게임의 참여, 룰의 공유에 따른 효율성, 상대의 예측과 나의 맞대응 그리고 의사결정과 보상에 의해 사회는 작동하는 것이다. 레토릭이 안 될 때 사회계약이니 천부인권이니 자유 평등 박애니 하며 대충 둘러댄다. 인간은 게임에 참여하며 기대이익에 따라 합리적으로 의사결정한다. 그러한 합리성들이 쌓여서 결과적으로 사회는 진보 일방향으로 작동한다. 합리성의 근거는 룰의 공유다. 룰은 공유하지만 결정은 사유다. 룰에서 몫을 빼먹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에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잘못된 결정이면 손해를 입는다. 손해가 뻔하면 게임에 불참하게 된다. 노숙자가 되거나 교도소에 수감된다. 다수가 노숙하거나 교도소에 수감되었다면 그 사회는 실패다. 공유하는 룰이 잘못 세팅된 것이다. 애보리진이 백인의 15배나 수감되어 있다면 호주는 어느 면에서 실패한 사회다. 미국의 흑인이나 중국의 위구르족도 대거 게임에서 배제되고 있다. 실패한 사회는 석유대박과 같은 행운이 따르지 않으면 다른 나라와의 경쟁에 지는게 보통이다. 혹은 그만큼 리스크가 잠복해 있다. 게임에 참가하여 합리적인 선택으로 이득을 얻는 원리는 국가 간에도 적용된다. 중국처럼 반칙을 일삼으면 왕따된다.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아야만 한다.
사회는 구성원 간에 상호작용을 높여 최고의 효율을 끌어내는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그 경우 이기는 사회가 된다. 이기는 사회는 국가 간 경쟁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 국제사회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룰을 정할 수 있다. 미국처럼 그냥 운이 대빵 좋아서 이기는 사회가 될 수도 있다. 혁신을 하거나, 인구로 밀거나, 자원빨로 먹거나, 전쟁하거나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룰을 만들려고 쟁투한 결과가 인류의 역사다. 세상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도 아니고, 사회계약도 아니고, 천부인권도 아니고, 자유 평등 박애도 아니고, 윤리도덕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다. 다자간 게임에서 합리적인 결정들이 살아남은 것뿐이다. 혹은 운이 좋아서 살아남기도 한다. 나쁜 짓으로 살아남은 자들도 있다. 세상에 사이코패스가 많지 않은 것을 보면 나쁜 짓으로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건 아니다. 우리는 상대의 대응을 예측하여 합리적인 게임을 설계할 수 있다. 공유하는 룰을 만들고 자유롭게 게임에 참여하기다. 분야마다 룰은 조금씩 다르다. 정치는 쪽수로 이기고, 경제는 효율로 이기고, 문화는 상호작용 증대로 이긴다. 이기는 쪽으로 기동하다 보면 보다 좋은 룰이 만들어지며 인류는 그 룰을 공유하는 방법으로 이득을 얻어 여기까지 왔다. 인류는 게임의 결과로 주어지는 보상을 바라며 행동하지만 보상은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유전자의 명령에 따른 호르몬의 작용에 불과하다. 주도적으로 창의하여 새로운 게임을 설계하고 나란히 출발선에 서야 한다. 나만 혼자 출발선에 서면 돌아오는 결과가 없다. 그 경우 게임 실패다. 최대한 다수를 출발선에 세울 수 있는 게임을 제안해야 한다. 류호정이 어떤 옷을 입었다면 대중은 그게 내게 주어지는 어떤 보상인가를 묻는게 보통이다. 류호정이 내게 무슨 보상을 했지? 그 복장과 머리모양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해주었지? 멍청한 질문이다. 왜 보상을 찾고 있지? 바보냐? 그가 제안한 게임이 얼마나 많은 선수를 출발선에 나란히 세울 수 있을까를 판단해야 한다. 다수가 게임에 가담하면 권력이 발생한다. 다들 출발선에서의 줄세우기 권력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결승선에서의 트로피가 아니라. 정의당이 집권에 관심 없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흥 그 게임 재미없어. 나는 불참일세.' 이러다가 다른 선수들이 모두 류호정 게임에 가담해서 출발선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뜨악한 표정으로 '이게 뭐야? 낭패네.' 이렇게 되기 십상이다. 영리해져야 한다. 과연 이 게임이 먹히는 게임일까? 나의 제안이 다수를 출발선에 세울 수는 있을까? 사람들이 솔깃해할까? 이 게임 얼마나 지속될까? 판단이 섰다면 달려들어야 한다. 어리석게 윤석열 찬양게임에 줄 섰다가 피 본 사람도 많다. 며칠 안 가는 게임이었다. '그걸로 내게 어떤 보상이 주어지지?' 이러면 초딩이다. 인간은 결과의 보상이 아니라 원인에서의 권력을 탐한다. 왜 당신은 멋진 게임을 제안하여 다수를 평등한 출발선에 줄세우는 권력을 누리려고 하지 않는가? 작가는 작품을 내고 독자는 작품 앞에 평등하게 줄을 선다. 다수를 평등하게 만들면 권력이 발생한다. 포드시스템처럼 누구나 평등하게 포드 모델 T를 사게 만들면 권력을 얻을 수 있다. |
"왜 당신은 멋진 게임을 제안하여 다수를 평등한 출발선에 줄 세우는 권력을 누리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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