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은 장애인 딸을 이용하여 자신의 장애를 감추는 비열한 기술을 구사하고 있다. 나경원은 근본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비뚤어져 있다. 세상을 적대하는 시선을 들키고 있다. 세상의 자연스러운 진보를 거슬러 역주행을 시도하고 있다. 사회가 진보할수록 룰이 바뀌기 마련인데 룰의 변화를 거부하고 옛날 룰로 평가해 달라며 고집을 부리고 있다. 역동적인 세상과의 호흡 맞추기를 거부하고 있다. 탱고를 춘다며 옆사람의 발을 밟고 있다. 흐르는 물결을 막아서고 있다. 바람을 거슬러 항해하려고 한다. 이는 인성이 비뚤어졌기 때문이다. 어릴때부터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해서 사회성의 발달이 지연된 것이다. 나경원의 장애인 방패막이 이용은 나경원 본인의 장애를 지적할 수 없게 만든다. 뻔뻔한 짓이다. 세상은 도전과 응전이다. 하나씩 스테이지를 깨나가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새로운 게임에 새로운 빌런이 등장해 준다. 나경원 빌런은 오세훈 빌런을 찜쪄먹고 안철수 빌런을 튀겨먹는 강적이다. 전사는 강적 앞에서 흥분한다. 설레인다. 즐겁게 타격할 일이다. 또 이렇게 하나의 게임을 클리어 하고 우리는 역사가 요구하는 다음 게임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나씨오계
인상주의 혁명
서민충의 서민행동
구조론에 대해서 질문하려면
질문과 답변
셈이 먼저냐 숫자가 먼저냐?
구조론은 세상을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라는 다섯
가지 의사결정구조로 설명한다. 반도체와 비슷하다. 반도체는
전기가 통하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한다. 조건에 따라 도체가 되기도 하고 부도체가 되기도 한다. 구조는 어떤 둘의 대칭과 축으로 이루어진다.
축이 대칭된 둘
중에서 왼쪽을 선택하기도 하고 오른쪽을 선택하기도 한다. 세상은 원자가 아니라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숫자가 아니라 셈으로 이루어져 있다. 숫자가 먼저 있고 그것을 셈하는
것이 아니라 셈이 먼저 있고 그 셈의 결과를 숫자로 표현하는 것이다.
숫자가 먼저냐
셈이 먼저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다 바꾸어야 한다. 구조론적 세계관이 요구된다. 원자론이
세상을 숫자로 본다면 구조론은 세상을 셈으로 본다.
그것은 어떤 것을
이해할 때 그 대상 내부의 고유한 성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과의 관계로 보는 관점이다. 설탕이
달고 소금이 짠 것은 고유한 것이다. 설탕은 원래 달고 소금은 원래 짜다. 더 이상은 캐묻지 않는다.
이것이 원자론적
태도다. 일본인은 원래 근면하고 중국인은 원래 지저분하다. 틀렸다. 주변환경과의 관계에 따라 근면해지기도 하고 게을러지기도 한다. 산이
뾰족한 것은 물이 산을 깎아먹었기 때문이다. 산의 형태는 물이 결정한다. 원인이 바깥에 있다.
고유한 것은 없고
주변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서 성질이 결정된다. 같은 것을 밝은 곳에 두면 어두워 보이고 어두운
곳에 두면 밝아보인다. 약한 곳에 두면 강해보이고 강한 곳에 두면 약해보인다. 소금이 짜고 설탕이 단 것도 주변과의 관계 때문이다.
관계는 외부와의
관계다. 내부에 집어넣고 보면 구조다. 관계는 상대적이고
구조는 절대적이다. 다양한 관계가 다섯 가지 구조로 정리된다. 대칭과
축을 만드는 방법이 다섯 가지 있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 다섯 가지 종류의 반도체를 순서대로 사용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