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생각의 다름을 강조한다. 내 생각은 이래! 개소리다. 들어볼 필요도 없다. 어떤 생각이든 부질없다. 예수는 언어가 다르다. 관점이 다르다. 차원이 다르다. 층위가 다르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간다. 이 전개과정의 어느 부분을 공략하느냐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결에 선다. 결은 량이고 량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결의 량에 앞서 운동, 운동에 앞선 힘, 힘에 앞선 입자, 입자에 앞선 질을 논하면 이긴다. 기승전결의 기에 서면 이긴다. 사람들은 생각의 차이를 말하지만 생각은 결이다. 생각은 하루에 백 개도 만들어낸다. 동사를 살짝 틀어주면 된다. 상대방이 뜨겁다고 말하면 아냐. 이건 매우매우 울트라 슈퍼 하이퍼 뜨거운 거야. 이러고 수식어를 보태주면 된다. 쉽잖아. 어릴 때는 혼자 노느라 어떤 주장을 하고 내가 다른 편이 되어 그 주장을 반박하고 다시 제 3의 인물이 되어 그 둘을 동시에 타박하는 생각놀이를 즐겨했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독립군이든 친일파든, 합리주의든 실용주의든 모두 비판하면서 동시에 옹호할 수도 있었다. 황당한게 하버드 철학수업이라는 책이 있는데 온갖 주의를 소개해 놓았다. 일원론, 이원론부터 무슨론에 무슨론까지 수십 가지를 잔뜩 열거해 놓았는데 페이지마다 ‘이 주장은 반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실용주의는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말고 좋은 결과만 챙기면 된다’고 써놓은 것이다. 얼빠진 짓이 아닌가? 나는 모두 반박할 수 있다. 아주 요절을 낼 수 있다. 초딩 때 했던 놀이다. 반박할 수 없는 주장은 결단코 없다. 흰 것은 검은 것이라거나 검은 것은 흰 것이라는 주장도 할 수 있다. 선은 악이라거나 악은 선이라고 주장하기가 어렵지 않다. 언어라는 것은 원래 그렇다. 고무풍선과 같아서 바람을 집어넣으면 늘어난다. 이것은 언어의 상대성이다. 어떤 대상이 있다면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다. 층위를 높여야 한다. 관점을 높여야 한다. 사건의 이전단계를 공략해야 한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가며 모든 곁가지는 그 진행과정에 용해된다. 생각이 달라도 의견이 달라도 주장이 달라도 죄다 용해된다. 작은 흐름은 큰 흐름에 휩쓸린다. 중요한건 언어다. 좋은 언어를 가져야 한다. 과학자와 종교인은 언어가 다르다. 생산력이 다르다. 한의사와 양의사는 언어가 다르다. 한의사는 양의사가 쓰는 기계를 쓸 수 있도록 허용해주기를 원한다. 을이 되어 있다. 양의사는 당연히 허용해주지 않는다. 자기들이 의료기계를 독점한다. 왜 혼자 다 먹으려고 할까? 그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언어가 다르므로 대화하지 않는 것이다. 양의사는 한의사와 말하지 않는다. 한의학이 양의학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게 도움이 안 되는데 왜 내가 양보해야 하지? 그렇다. 사건의 기승전결에서 양의사가 기에 서 있고 한의사는 승이나 전이나 결에 서 있다. 포지션이 다르다. 양의사는 한의사와 협력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국가는 공산주의 국가와 협력하지 않는다. 좋은 것은 내가 다 만들었는데 왜 쟤들이 가져가지? 미국은 중국에 기술을 주지 않는다. 절대 평등하지 않다.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룰이 다르다는 것이다. 중국의 기술이 미국보다 앞서 있다면 그 반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왜 미국은 중국의 기술독점을 걱정하지 않고 오만한 행보를 할까? 그럴 일이 없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로는 자본주의를 이길 수 없다. 공산주의는 원래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방법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물론 중국은 말이 공산주의지 실제로는 자본주의다. 조만간 중국이 미국을 이길 수 있다. 어쨌든 룰이 다르면 언어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면 대화하지 않으며 우수한 룰을 가진 자가 다 먹게 되어 있다. 예수의 논법은 일관된다. 신의 계획대로 간다는 것이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인간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계획이 있느냐가 중요하다. 계획에 따라 룰이 정해지고 룰에 따라 언어가 정해진다. 언어가 일치해야 대화가 시작된다. |
"계획이 있느냐가 중요하다. 계획에 따라 룰이 정해지고 룰에 따라 언어가 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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