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은 동사로 진술된다. 그런데 예수는 제 3의 길을 제시한다. 필자의 논법은 이렇다. 여당이 옳다 혹은 야당이 옳다가 아니라 국민이 변했다는 것이다. 국민의 변화를 어느 당이 잘 쫓아가고 있을까? 굴뚝산업에서 IT산업으로 생산력의 변화, 고졸세력으로 대졸세력으로 인적구조의 변화, 여성의 정치세력화 등으로 국민이 변했다.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사람들은 말한다. 왼쪽이 좋더라고. 아냐 오른쪽이 더 낫던데. 이러쿵저러쿵 논쟁이 분주하지만, 필자는 말한다. 그것은 운전기사의 실력에 달려 있다고. 운전사 마음이다. 예수는 말한다. 돌아온 탕자를 위해 잔치를 베풀어야 할지 혹은 처벌해야 할지는 주인아저씨 마음이라고. 하느님의 마음에 달려 있다. 하느님의 계획에 달려 있다. 언제나 상부구조가 있다. 윗선이 있다. 사건을 유발하는 에너지의 출처가 있다. 진술의 전제가 있다. 그 동전은 카이사르의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것인가? 동전의 출처를 묻는 것이다. 그런데 그거 동전 맞아? 그 동전은 어디서 났어? 전제를 치는 것이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야 하나, 용서해야 하나? 예수는 전제를 친다. 죄라는게 뭐지? 죄를 심판하려고 하는데 그 이전에 죄가 뭐냐고? 기독교의 원죄설은 유치한 언설이다. 그런게 있을 리 없잖아? 바보냐? 예수는 똑똑한 사람이다. 똑똑한 사람의 언어는 다르다. 예수는 그대에게 죄가 뭔지 물었다. 죄는 노예가 주인에게 대드는 것이다. 당신도 하느님의 노예 혹은 운명의 노예다. 운명에 예속된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다. 죄의 어원을 찾아보니 죄는 그냥 진다는 뜻이다. 책임을 진다. 부담을 진다. 빚을 진다. 의무를 진다. 이것이 죄다. 즉 어떤 권력에 의해 속박된 것이 죄다. 죄는 전쟁포로의 잡힌 상태다. 우리는 책임에 잡히고, 의무에 잡히고, 상대의 권리에 잡힌다. 특허권을 침해했다면 로열티 지불의무를 진다. 부담을 짊어진 것이 죄다. 죄는 노예나 전쟁포로나 채무자나 의무를 진 것이며 누구나 운명을 짊어진 점에서 죄인이다. 사건의 기승전결 구조에 잡혀 있는 인간은 누구나 그러하다. 환경에 에너지를 의존하는 자는 누구나 그러하다. 형법상의 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인은, 권리자는, 특허권자는, 저작권자는 심판할 권리가 있다. 사건의 다음 단계에 오는 자에게 즉 내게 에너지를 의존하는 자에게, 나로부터 이득을 얻은 자를 추궁할 권리가 있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이어지며 승은 기에, 전은 승에, 결은 전에 죄가 있다. 부담이 있다. 반대로 기는 승에, 승은 전에, 전은 결에 권리가 있다. 권력은 자연법칙이다. 후건이 전건을 치면 시스템은 유지되지 않는다. 자식이 부모를 잡아먹는다면 부모는 자식을 낳지 않는다. 점장이 고객을 살해한다면 가게에 손님이 오지 않는다. 시스템은 죽는다. 사건의 앞단계인 원인이 뒷단계인 결과를 제한한다. 죄라는 것은 그 에너지의 연쇄구조를 침범한 것이다. 비가역적 구조 안에서 가역하여 시스템을 공격한 것이다. 다음 단계가 앞단계를 친 것이다. 예수의 모든 언행은 같은 패턴이 있다. 대립되는 둘 위의 상부구조를 들추는 것이다. 전제를 치는 방법으로 교착을 타개하는 것이다. 새로운 지평을 열어 높은 단계로 도약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원죄가 있다? 그럴 리가 없다. 죄는 없다. 먹이사슬처럼 연결된 사건의 연쇄구조에 올라타고 에너지를 이전단계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담을 지고 있다. 그것을 비유로 말하면 원죄다. 그래서 예수의 언행은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예수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덫을 놓고 예수를 공략하지만 예수는 새처럼 날아올라 빠져나간다. 예수가 얻은 것은? 자유다. 당신에게는 없는 그 무엇이 예수에게는 있다. 예수는 언제나 자유롭다. 어떤 정교한 논리의 감옥에서도 예수는 쉽게 탈출한다. 로마의 법과 유태인의 율법을 동시에 동원하여 양쪽에서 족쇄를 채웠지만 예수는 유유히 빠져나간다. 그 자유가 부럽지 않은가? 구조론은 메커니즘으로 본다. 메커니즘으로 보면 모든 것은 핸들링에 달려 있다. 그래서 자유롭다. 좌파든 우파든 구조론에는 탈탈 털리고 만다. 왼쪽이 옳다 혹은 오른쪽이 옳다가 아니라 왼쪽이면 왼쪽대로 핸들을 돌리고 오른쪽이면 오른쪽대로 핸들을 꺾어 균형을 잡는다. 질에서 막히면 입자로, 입자에서 막히면 힘, 힘에서 막히면 운동, 운동에서 막히면 량으로 빠져나간다. 바리새인은 예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붙이지만 예수는 구속되지도 않고 결박되지도 않는다. 무개념 좌파들이 논리공격을 하지만 구조론은 쉽게 파해한다. 왜? 더 높은 단계의 언어를 가졌기 때문이다. 예수는 견해가 다른게 아니고 언어가 다르다.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혹은 저렇게 생각한다. 부질없는 자기소개다. 누가 물어봤냐고? 그건 니 사정이고. 네 생각 따위 필요 없다. 당신의 언어는 무엇인가? 문제는 원자론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다. 그런 자와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예컨대 선의 원소가 있다거나 악의 원소가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사유하는 사람들 말이다. 흥부의 마음에는 선의 원소가 700그램 들어있어. 놀부의 마음에는 악의 물질이 800그램 농축되어 있다니깐. 이런 경우는 메커니즘이 없어서 핸들링이 되지 않는다. 악에 물들거나 선에 물들면 당연히 방법이 없다. 이런 식의 사고에 물들어 있는 자와는 대화하지 말아야 한다. 구조론은 어떤 경우에도 그 상황에 맞는 답을 찾아낸다. 정치적인 견해라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며 선악논리로 접근하는 자들 있다. 자본주의를 일종의 물질로 보고 마치 걸레로 오염을 닦아내듯 한다. 자본주의라는 오염물질을 청소해야 한다고 믿는 자들과 대화가 되는가? 자본주의라는 자동차를 세련되게 운전하는 솜씨를 보여주겠다는 야심을 발표하지 못한다. 그런 식의 사고에 사로잡히면 바리새인의 공격에 대응할 수 없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무조건 당한다. 이쪽을 선택하여 여인에게 돌을 던지면 로마법에 빌미를 잡힌다. 저쪽을 선택하여 용서해도 유태인의 율법을 어긴 셈이 된다. 보통은 이런 식의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언어가 문제다. 메커니즘을 부정하고 원자론적 사고에 결박되어 대화가 되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언어를 공격하는 자들이다. 인터넷에도 많다. 처음에는 그럴듯한 과학적 지식을 써놓았다. 밑으로 내려가면 어? 창조과학회네. 어? 환빠잖아. 신천지도 같은 수법을 쓴다. 설문조사를 한다며 혹은 심리테스트를 한다며 유인해놓고 마지막에 정체를 드러낸다. 이런 식의 속임수를 쓰는 자들을 대화에 끼워주면 안 된다. 언어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모두에 먼저 환빠라고 밝혔어야지. 이들은 축구시합을 하기 전에 심판을 쏘는 자들이다. 언어는 인간의 약속이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를 감추는 방법으로 그 약속을 어겼다. 공자의 정명사상과 맞지 않다. 떳떳하지 않은 모략이다. 언어는 천하의 공물인데 공공재를 사유화하고 파괴하는 자와 대화를 할 이유가 있겠는가? 좌파들도 마찬가지다. 언어가 틀려먹었다. 그들은 궁지로 몰아넣고 선택을 강요하는 바리새인의 논법을 쓴다. 진중권 수법이다. 진중권의 모든 논리는 양쪽에 덫을 놓고 선택을 강요하는 바리새인의 사냥기술이다. 목에도 올무를 놓고 몰이를 한다. 새는 간단히 날아오른다. 예수에게는 자유가 있다. 결박되지 않는다. 구조론은 자유가 있다. 메커니즘은 원래 결박되지 않는다. 에너지를 통제하기 때문이다. 음모론이나 괴력난신이나 초능력, 내세타령도 같다. 기니, 내세니, 천국이니, 천사니, 심판이니, 주술이니, 초능력이니, 사차원이니, 유기농이니, 천연이니, 신토불이니 하는 것들은 잘못된 언어사용이다. 언어가 정당하지 않다. 언어에 속임수가 숨어 있다. 너절한 짓이다. 자본주의를 증오하거나 원천부정하는 자와는 대화할 수 없다. 예수가 쉽게 얻은 것이 그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동성애를 반대한다? 이런 말은 언어적으로 불성립이다. 이게 이해가 안 되는 사람과 대화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설명해줘도 알아먹지 못한다. 에너지의 핸들링을 부정하고 낙인을 찍고 선택을 강요하는 자는 대화의지가 없으므로 재껴야 한다. 세상을 메커니즘으로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고착된 물질로 보는 시선이 문제가 된다. 노예는 원래 노예고 노예의 엑기스가 있으며 귀족은 특별한 귀족원소로 고급진 영혼이 만들어져 있다? 그런거 없다. 예수는 선택하지 않았다. 사건의 이전단계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사건은 기승전결이다. 선택은 결 단계다. 기로 가서 새로운 사건을 일으킨다. 남이 뿌린 것을 수확하므로 예속되고 종속되고 결박되고 죄인이 된다. 저작권료를 지불할 부담을 진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그런 부담을 지고 태어나는 것이 원죄다. 내 것을 파종하면 된다. |
있는 것(존재)을 그냥 있는대로 볼 수 있다면
사실을 사실로 볼 수 있다면
그 이면에 숨어있는 전제를 더 잘 알 수 있을텐데...
예수 이후에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어용신학자(이런게 있는지도 모르지만)가 황제를 위해 만든 것이 원죄론인데, 기독교는 수천년 동안 원죄론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원죄론 그런 거 없다고 말하면 말하는 사람을 이단취급한다.
사람과 대화할 때 예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이분법적 질문에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제3의 길을 제시했지만, 실제로는 자기 스스로가 제3의 길임을 드러낸 것이다.
신의 이름 중에 야훼는 이름지울 수 없는 자라는 뜻이다.
역설이지만, 이는 네가 짓는대로 내 이름이 된다는 뜻이자,
결국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I am Who I am은 나는 나라는 뜻이지만,
거꾸로 말하면 너도 진짜 너가 되어 살아라.
그러면 그게 야훼의 길이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자기 규정이 중요하다.
동렬님의 이번 글 마지막 문장, 네것을 파종하라는 말과 상통한다.
언어도단의 갑종인 종교는 걷어치우고, 네가 직접 신이 되거나 신처럼 행동하라는 말이다.
"내것을 파종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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