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철학에 흥미가 있었지만 정작 철학서적을 많이 읽지 못했는데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번역이 잘못되었는지 뭔가 문법에 맞지 않아서 맥락을 따라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둘은 너무 개똥 같은 소리를 써놔서 읽어줄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준 이하의 멍청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다니. 바보냐? 결론은 바보가 맞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모국어가 안 되는 자들이었다. 바보가 아닌 사람을 한 명 발견했는데 그가 공자다. 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지능이 떨어진다. 어휘력이 나쁘다. 어떤 철학자의 주장이든 철학서적의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모든 구절을 낱낱이 밑줄 그어 반박할 수 있다. 책을 읽을 수가 없다. 한 페이지를 읽기도 전에 반박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기 때문이다. 책장을 덮고 생각에 잠기게 된다. 구조론은 그 결실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상대가 반박할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는 애초에 입에 담지도 말아야 한다. 컵에 든 물을 앞에 두고, 반이나 있잖아. 아냐! 반밖에 없잖아. 이런 식으로 논쟁하면 안 된다. 그것은 초딩들의 유치한 반사놀이다. 상대가 반박할 수 없는 말을 해야 한다. 간단하다. 동사를 쓰면 반박되고 명사를 쓰면 반박할 수 없다. 명사로 말해야 지식인이다. 문장이 동사 위주로 가면 책을 던져버려야 한다. 유치해서 읽어줄 수가 없다. 예컨대 흄의 멍청한 이야기를 보자. 사과가 땅에 떨어졌다면 중력과 인과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음에도 반드시 사과가 땅에 떨어진다고 볼 수 있을까? 인과관계를 긍정할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를 흄은 진지하게 하고 있다. 문제는 윌리엄 제임스다. 이 멍청한 이야기를 두고 반박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바보 인증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과냐다. 떨어지든 날아가든 상관없다. 누가 실로 동여매 놓는다면 사과는 계속 붙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동시성이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시간차는 없다. 사과가 붙어 있을 때도 중력은 작용한다. 사과는 중력에 포함된다. 이런 거다. 사과는 사과나무의 일부인가? 그렇다. 포함된다. 그런데 사과는 어디에 있지? 유전자 속에 있다. 지금은 봄이고 아직 사과는 열리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사과를 먹으려면 가을까지 기다려야 한다. 여기서 봄의 사과꽃과 가을의 사과열매 사이에 성립하는 인과관계는 시간적 선후가 있지만, 그 시간은 사람이 과수원에 방문하는 시간이고 본질은 사과의 유전자다. 사과는 유전자 속에 숨어 있는 것이며 사람의 눈에 띄는 게 가을이다. 즉 사과는 결과를 확인하기 전에 원인 속에 이미 잠재해 있다. 그러므로 사과가 떨어지지 않아도 즉 본드로 사과를 붙여놓았어도 인과관계는 성립한다. 데이비드 흄은 아주 머리가 나쁜 것이다. 이런 밥통들과 진지한 대화를 한다는 말인가? 이런 자들의 글은 문장의 첫 구절부터 하나하나 다 반박해줄 수 있다. 시험을 치기 전에 당신이 빵점을 맞을 것은 이미 정해져 있다. 공부를 안 했으니까. 컨닝을 하면 되잖아. 이건 논외다. 규칙위반이므로 배제한다. 실력이 평가된다고 가정하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원인 다음에 결과가 온다는 망상을 버려라. 원인과 결과는 동시에 발생하지만 인간이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사건 안에서 결과는 원인에 포함된다. 철학자들의 99퍼센트는 이런 개소리를 하고 있다. 옳고 그르고 간에 논의가치가 없다. 귀신은 없다. 천국은 없다. 내세는 없다. 영혼은 없다. 그것은 논의할 가치가 없다. 그런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그 어휘가 가리키는 구체적 대상이 없다. 언어가 가짜인데 무엇을 논한다는 말인가? 한의사의 괴상한 용어와 같다. 어디를 보하고, 습열이 있고, 음허가 있고, 양기가 어떻고, 사열이 있고, 조열이 있고, 기가 상역하고 어쩌고 하는데 아무런 뜻도 없는 단어다. 그런 말을 쓰면 안 된다. 가짜는 대개 동사로 쓰인다. 동사는 변화를 의미하고 관측자가 움직이면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동사를 명사로 쓰는 사람들이다. 빛이 움직이면 그림자인데 명사로 표현하므로 헷갈리는 것이다. 그림자가 있는 게 아니고 빛의 변화가 있다. 가짜 언어들은 모두 동사를 명사로 틀어서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모두 같은 수법을 쓴다. 철학의 역사 2천5백 년간 허다한 견해가 있었지만 대개 이쪽의 헛소리로 상대의 헛소리를 반박하는 것이다. 둘 다 헛소리다. 읽어줄 가치가 없다. 대부분 국어가 안 되는 사람들이 언어에 대한 이해부족을 드러낸다. 어떤 사실에 대한 견해를 밝힌 게 아니라 그냥 모국어를 잘못 사용한 것이다. 말을 떼지 못했다. 100명의 철학자가 있다면 그중에 말을 배워서 능히 쓰는 사람은 없다. 말을 배우지 못했는데 무슨 철학을 하겠는가? 하긴 말을 누가 가르쳐 주겠는가? 대개 언어의 모순을 사실의 모순으로 착각한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색깔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뇌가 없는 사람이 지식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바보는 말한다. 진리는 없고, 있어도 알 수 없고, 알아도 전달할 수 없다고. 머리가 나쁜 사람은 당연히 그러하다. 언어를 익히지 못했는데 어찌 진리를 알고 전달한다는 말인가? 숫자가 없는 부족민이 수학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부족민에게 수학은 없고, 있어도 알 수 없고, 알아도 전달할 수 없다. 당연하다. 그게 자기소개다. 자신의 한계를 진리의 문제로 치환한다. 우주 안에 진리는 하나뿐이며 나머지는 그것을 다양한 분야에 적용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언어다. 구조론은 새로운 언어다.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는 장벽은 언어다. 인간이 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게 문제다. 말도 못 하면서 견해를 내세운다면 황당하다. |
구조론이라는 수학위에 철학이라는 물리학이 성립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의 철학은 구조론과 같은 '언어수학'이라고 할까 '언어논리학'이랄까 하는 그런 기초적 도구 없이 응용에만 치중한 물리학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