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어떤 생각은 틀렸다. 접근하는 방법이 틀렸으므로 틀렸다. 사용하는 도구가 틀렸으므로 틀렸다. 인간의 눈은 밖을 향해 있다. 이미 잘못된 지점을 보고 있다. 우리는 사건의 시작점을 잘못 찍는다. 사유의 첫 단추를 잘못 꿰므로 이후 줄줄이 사탕으로 무조건 틀리게 된다. 인간은 외부 환경의 자극에 반응하는 수동적 존재다. 이미 틀렸다. 올바른 시선은 특별히 훈련되어야 한다. 그것은 능동적으로 움직여 환경 내부로 쳐들어가는 것이다. 외동설을 버리고 내동설로 갈아타야 한다. 객체 내부를 보는 시선을 얻어야 한다. 그러려면 엔진이 필요하다. 인간은 적과 대립각을 세워야만 흥분하는 존재다. 구조론의 약점은 적이 없어서 사람을 격동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구조론은 내려진 어떤 결론이 아니라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도구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구조론의 적은 외동설이라 하겠다. 구조론의 내동설 - 내부지향, 원인지향, 전체지향, 연결지향, 변화지향.. 구조론은 매커니즘의 절대성을 본다. 일반인의 외동설 - 외부지향, 결과지향, 부분지향, 단절지향, 안정지향.. 일반인은 개체의 상대성을 본다. 천동설은 외부를 보고 지동설은 내부를 본다. 천동설이 무너졌으나 인간의 사유는 여전히 사물의 외부를 보고 사건의 결과 측을 보는 천동설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인간이 올바른 판단을 할 때는 적과 싸워서 이기고자 할 때다. 경쟁이 없으면 인류는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한다. 인간은 위기에 빠져서 탈출하는 형태로만 수동적으로 사유한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하다. 능동적으로 쳐들어가려면 연결하는 도구가 필요하다. 사유는 둘이 공유하는 연결고리를 도구로 삼아야 한다. 계 내부의 밸런스가 주체와 객체를 연결하는 사유의 도구가 된다. ### 세상은 존재다. 존재는 변화다. 우리는 변화중심적 사유로 갈아타야 한다. 그것이 구조론의 내동설이다. 우리는 제자리에 가만있는 것을 존재로 여긴다. 그것은 변화를 부정하는 안정중심적 사유다. 막연히 변화를 외부에서 침입하는 나쁜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가 외동설이다. 내동설 - 존재는 변화다. 변화 메커니즘 내부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외동설 - 존재는 안정이다. 변화는 외부에서 침입하는 나쁜 것이다. 변화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원인이 입구라면 결과는 출구다. 입구와 출구는 외부에서 관측된다. 의사결정은 객체 내부에서 일어나는데 우리는 외부만 본다. 존재 내부로 쳐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내부에 에너지 밸런스가 있고 축이 이동하여 방향전환의 형태로 의사결정한다. 우리가 아는 안정된 존재는 내부의 변화가 나란하여 이루어진 밸런스다. 우리는 안정된 존재가 외부의 어떤 원인에 의해 변화를 일으킨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내부에 숨은 고유한 변화의 나란함이 깨져서 변화를 외부에 들키는 것이다. 존재 내부에는 변화를 조절하는 엔진이 있다. 존재는 변화다. 변화는 방향전환이다. 변화를 붙잡는 계, 방향을 조직하는 엔진, 방향을 바꾸는 의사결정, 외부로 전달하는 전개, 인간의 관측이 있다. 변화는 사건 안에서 내부적으로 다섯 번 방향을 바꾼다. 우주에 겉으로 드러난 방향전환과 내부에 숨은 방향전환이 있을 뿐이다. 존재, 물질, 공간, 시간, 원자는 모두 불변을 전제로 만들어진 개념이다. 아인슈타인에 의해 깨졌다. 변화를 전제로 하여 새로 개념을 만들어야 한다. 에너지는 변화다. 불변으로 변화를 설명하려고 하므로 잘못되고 만다. 변화는 크고 불변은 작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