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금재 님의 예전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생각에 도움받은 바가 있어서 적어봅니다.
흔히 우리가 접하는 정보는 진술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술은 어떠한 전제로부터의 진술인가요? 흔히 지목되는 전제는 사건의 온전한 원인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정보라는 외력과 (나라는 균일한)관점의 만남이 우리가 의식하는 진술부의 바로 위 상부구조입니다. 어떠한 량적인 정보는 우리의 뇌 안에서 관점이라는 필터를 거쳐 정제됩니다.
그리고 뇌는 뇌내 사건을 통하여 다시금 의식으로 량을 내뱉습니다. 보통 우리의 의식은 이 녀석을 보고서 사건의 결과라고 부릅니다. 뇌외 사건으로부터 이어진 뇌내 사건의 량을 보고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정보를 습득하더라도 진술부터가 달라집니다. 누구는 사과가 떨어졌다고 하고 누구는 사과가 떨어진 걸로 보였다고 진술합니다.
심지어 누구는 사과와 지면이 자리바꿈을 한 것으로 보였다고 진술합니다. 제 1사건이 객관적인 원인이라면 이어지는 제2사건(관측)의 원인은 관점에 따라 달라지고 최종적으로 제2사건의 결과는 우리가 의식하는 진술입니다.
혹은 제1사건을 퉁쳐서 상부구조, 제2사건인 관측을 퉁쳐서 하부구조, 관측의 결과를 전체 사건의 결과(량)으로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전제는 전제의 전제에 의하여 바뀔 수 있습니다.
예전 이금재님 글 중 한 예시인 감기 및 미세먼지와 기침의 관계를 인용해보겠습니다. 감기로 인한 기침과 미세먼지로 인한 기침은 엄밀히는 그 내용이 다를 겁니다.
다만 관측자인 우리는 그걸 구분하지 못하고 그냥 기침으로만 '인식'할 수 있죠. 이 때 우리는 우리의 관점 내에서 기침의 원인일 후보들을 지목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건 우리 관점(인식)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하필이면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기침이 진술부가 된 것이죠. 우리가 보지 않고 대신 침방울에 대한 검사를 진행했다면 진술부는 달라질 겁니다.
한번 정도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전제 내에서 진술이 낳아지는 건 맞습니다. 다만 우리 관점 혹은 인식의 한계 상 진술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기침의 원인을 감기랑 미세먼지 둘로 지목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본 기침의 상세한 종류를 우리가 감별하지 못한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전제와 진술은 1대1 대응이 맞습니다. 다만 우리가 서로 다른 진술을 감별하지 못하는 만큼 그에 비례하여 전제 역시 다양하게 이루어집니다.
이번엔 예시를 바꿔서 만약 우리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지 않고 다른 관측을 했다면요? 예컨대 우리가 슬라임이고 우리 머리 위에 떨어진 사과가 우리를 통과하여 지면에 가라앉았다면요?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도 사과와 우리가 자리를 바꿨다고 진술했을 겁니다. 우리가 슬라임이 아니라서 만유인력이 늦게 발견된 것입니다.
관점과 진술은 일대일 대응합니다. 진술을 바꿀 수 있다면 그만큼 관점을 바꿀 수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동렬님도 예전에 진술부를 '~인 것으로 치자'라고 바꾸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 겁니다.
우리가 사건의 원인에 온전히 다가서는 방법은 최대로 다양한 슬라임이 되는 것입니다. 진술을 바꾸면 관점이 바뀌며 관점이 바뀌면 관점이 맞이하는 원본 사건과의 만남이 바뀝니다.
그러면 결국 연결되는 원본 사건 역시 재정의 되는 셈입니다. 관점은 그래봤자 우리가 상정할 수 있는 관점과 상정할 수 없는(혹은 은연중에 사용하고도 간과하는) 관점만 있으므로 그 총합은 모집단 1입니다.
흔히 우리가 접하는 정보는 진술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술은 어떠한 전제로부터의 진술인가요? 흔히 지목되는 전제는 사건의 온전한 원인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정보라는 외력과 (나라는 균일한)관점의 만남이 우리가 의식하는 진술부의 바로 위 상부구조입니다. 어떠한 량적인 정보는 우리의 뇌 안에서 관점이라는 필터를 거쳐 정제됩니다.
그리고 뇌는 뇌내 사건을 통하여 다시금 의식으로 량을 내뱉습니다. 보통 우리의 의식은 이 녀석을 보고서 사건의 결과라고 부릅니다. 뇌외 사건으로부터 이어진 뇌내 사건의 량을 보고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정보를 습득하더라도 진술부터가 달라집니다. 누구는 사과가 떨어졌다고 하고 누구는 사과가 떨어진 걸로 보였다고 진술합니다.
심지어 누구는 사과와 지면이 자리바꿈을 한 것으로 보였다고 진술합니다. 제 1사건이 객관적인 원인이라면 이어지는 제2사건(관측)의 원인은 관점에 따라 달라지고 최종적으로 제2사건의 결과는 우리가 의식하는 진술입니다.
혹은 제1사건을 퉁쳐서 상부구조, 제2사건인 관측을 퉁쳐서 하부구조, 관측의 결과를 전체 사건의 결과(량)으로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전제는 전제의 전제에 의하여 바뀔 수 있습니다.
예전 이금재님 글 중 한 예시인 감기 및 미세먼지와 기침의 관계를 인용해보겠습니다. 감기로 인한 기침과 미세먼지로 인한 기침은 엄밀히는 그 내용이 다를 겁니다.
다만 관측자인 우리는 그걸 구분하지 못하고 그냥 기침으로만 '인식'할 수 있죠. 이 때 우리는 우리의 관점 내에서 기침의 원인일 후보들을 지목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건 우리 관점(인식)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하필이면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기침이 진술부가 된 것이죠. 우리가 보지 않고 대신 침방울에 대한 검사를 진행했다면 진술부는 달라질 겁니다.
한번 정도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전제 내에서 진술이 낳아지는 건 맞습니다. 다만 우리 관점 혹은 인식의 한계 상 진술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기침의 원인을 감기랑 미세먼지 둘로 지목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본 기침의 상세한 종류를 우리가 감별하지 못한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전제와 진술은 1대1 대응이 맞습니다. 다만 우리가 서로 다른 진술을 감별하지 못하는 만큼 그에 비례하여 전제 역시 다양하게 이루어집니다.
이번엔 예시를 바꿔서 만약 우리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지 않고 다른 관측을 했다면요? 예컨대 우리가 슬라임이고 우리 머리 위에 떨어진 사과가 우리를 통과하여 지면에 가라앉았다면요?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도 사과와 우리가 자리를 바꿨다고 진술했을 겁니다. 우리가 슬라임이 아니라서 만유인력이 늦게 발견된 것입니다.
관점과 진술은 일대일 대응합니다. 진술을 바꿀 수 있다면 그만큼 관점을 바꿀 수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동렬님도 예전에 진술부를 '~인 것으로 치자'라고 바꾸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 겁니다.
우리가 사건의 원인에 온전히 다가서는 방법은 최대로 다양한 슬라임이 되는 것입니다. 진술을 바꾸면 관점이 바뀌며 관점이 바뀌면 관점이 맞이하는 원본 사건과의 만남이 바뀝니다.
그러면 결국 연결되는 원본 사건 역시 재정의 되는 셈입니다. 관점은 그래봤자 우리가 상정할 수 있는 관점과 상정할 수 없는(혹은 은연중에 사용하고도 간과하는) 관점만 있으므로 그 총합은 모집단 1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