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은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할 줄 모른다. 수동적인 반응과 능동적인 사유는 다르다. 능동적인 사유에는 도구가 필요하다. 언어는 문법이 있다. 구조론은 존재의 문법이다. 자연의 변화에서 패턴을 찾고 규칙성을 발견한 것이 구조다. 존재의 문법에 맞게 배열하고 빈 칸을 메우면 된다. 생각한다는 것은 반대편을 보는 것이다. 세상은 변화다. 변화를 결정하는 것은 대칭이다. 대칭은 축이 있다. 축은 마주보는 둘이 접점을 공유한다. 축을 중심으로 주체와 객체가 대칭된다. 축이 지렛대의 받침점을 이루면 작용점과 저항점이 대칭을 이룬다. 비로소 도구를 사용할 수 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게 지식이다. 하나가 원본이면 열은 복제본이다. 축과 대칭의 구조에 태워 지식을 무한히 복제할 수 있다. 지렛대와 천칭은 구조가 같다. 지지대를 중심으로 저울접시 두 개가 대칭을 이루면 무엇이든 계량할 수 있다. 지식의 무한복제나 천칭의 무한계량은 같다. 뇌에 이러한 복제구조가 갖추어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단어만 겨우 알던 아기가 문법을 터득하는 순간 열배로 말이 많아진다.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말문이 터진 것이다. 생각문이 터져야 한다. 끊임없이 질문하여 귀찮게 하는 아기처럼 끝없는 아이디어로 귀찮게 해야 진짜다. 천칭의 접시는 둘이다. 항상 반대편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편을 보지 못한다. 원자 반대편 구조를 보지 못한다. 복잡성 반대편에 단순화를 보지 못한다. 살 반대편의 뼈, 부분 반대편의 전체, 내용 반대편의 형식을 보지 못한다. 전달자 반대편에 있는 결정자를 보는 눈을 떠야 한다. 단어는 아는데 문법을 모른다면 곤란하다. 원자는 아는데 구조를 모른다면 곤란하다. 입자는 아는데 닫힌계를 모른다면 피곤하다. 패턴을 보고도 규칙성을 찾지 못한다. 대칭을 보면서 축을 모른다. 축은 대칭과 달리 방향성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바퀴는 봤는데 핸들은 잡지 못한다. 멈추어 있는 사물은 알아보면서 움직이는 것의 방향성을 알아보지 못하므로 사건의 다음 단계를 예견하지 못한다. 멈춘 것을 알면 움직이는 것도 알아야 한다. 사람은 그냥 있지만 모이면 집단이 되고 집단은 방향성이 있다. 그것이 권력이다. 권력의 핸들을 장악해야 집단이 통제된다. 사물을 아는데 사건을 모른다. 죽은 것은 아는데 산 것을 모른다. 집단을 이루고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사건의 흐름을 통제하지 못한다. 자동차는 아는데 운전은 못한다. 자원들을 닫힌계에 가두고 압박하여 방향성을 부여하는 방법으로 내부의 관성을 만들어 통제하는 방법을 모른다. 칼은 있는데 도마가 없고, 망치는 있는데 모루가 없다. 집단을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어 한 방향으로 몰아가야 받침점과 작용점과 저항점의 구조가 갖추어진다. 생선을 도마에 가두고, 물체를 관성에 가두고, 사물을 사건에 가두고, 물질을 에너지에 가둬서 압박하면 구조가 발생한다. 닫힌계에 가두면 통제된다. 물체가 그냥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력에 갇혀 있다. 모든 존재는 어딘가에 붙잡혀 있다. 떼놓아야 객체가 통제된다. 목줄로 가두고, 재갈을 물리고, 코뚜레로 가둔다. 관성에 가두고 속도에 가둔다. 늑대에게 쫓기는 사슴처럼 의사결정의 어려움에 갇힌다. 움직이는 유체를 한 방향으로 몰아서 닫힌계에 가두고 내부에 대칭을 만들어 축을 장악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시동을 걸고 핸들을 잡으면 통제할 수 있다. 지식의 복제가 가능하다. 시스템과, 메커니즘과, 구조와, 대칭과, 축의 구조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