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체 각 선 점 우주는 궁극적으로 에너지의 방향전환 하나로 집약될 수 있다. 그 외에 아무것도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집단의 의사결정이다. 에너지는 개체가 아니라 집단이다. 집단이므로 시공간의 수학적 성질에 지배된다. 이 점은 개체의 고유한 속성에서 답을 찾는 원자론과 배치된다. 바둑알 하나는 성질이 없지만 여럿이 모이면 성질을 획득한다. 숫자도 같다. 1은 특별한 성질이 없지만 여럿이 모이면 소수와 같은 특별한 성질을 획득한다. 모든 것의 근원은 사건의 원인이고 원인은 성질이고 성질은 개체의 고유한 속성이 아닌 집합의 내적 관계에 있다. 사건의 원인과 결과 사이에 의사결정이 있다. 모든 결정은 일정한 조건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모든 변화가 거기서 일어나고 모든 성질이 거기서 비롯된다. 소금이 짜고, 설탕이 달고, 다이아몬드가 굳고, 금이 녹슬지 않는 성질이 모두 방향전환 조건의 차이로 해명된다. 물질의 고유한 속성이나, 인간사회의 민족성이나, 개인의 성격이나, 패션의 유행이나, 예술가의 스타일이나, 모두 집단적 방향전환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한 사람 뇌 안에서도 여러 부위가 간여하므로 집합적이다. 하나의 마음속에도 여러 가지 요소가 뒤섞여 있는 것이다. 계系는 외부 자극에 대해 반응하여 에너지의 진행방향을 바꾼다. 방향전환은 체體와 각角을 거쳐 선線으로 나타나며 점點에서 멈춘다. 계는 는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고 체는 반작용의 시작점을 결정하며 각은 반작용의 방향을 결정하고 선은 반작용을 실행하고 점은 멈춘다. 우주에는 오직 연결과 단절만 있다. 컴퓨터는 0과 1만 존재한다. 반도체가 회로를 연결하면 1이고 끊으면 0이며 그 외에 아무것도 없다. 우주에는 궁극적으로 점과 선만 존재한다. 에너지는 선이 꼬인 것이다. 선은 진행하면서 방향을 이루며 그 방향을 바꿀 수 있는가다.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 각은 끊어져서 선이 될 수 있지만 유턴을 못한다. 선이 점으로 멈출 수는 있지만 원점으로 되돌아가지는 못 한다.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가 멈출 수는 있지만 방향전환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전차는 기차와 마찬가지로 궤도를 쓰지만 유턴이 된다. 두 무한궤도를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면 전차가 오던 길을 되돌아갈 수 있다. 방향전환을 하려면 전차처럼 두 궤도가 나란해야 하는데 각은 나란하지 않아 방향전환이 안 된다. 자동차가 유턴을 하려면 한쪽 바퀴가 잠겨야 하는데 그 나란히 가는 한쪽 바퀴가 없기 때문이다. 두 체가 반대로 돌면서 꼬인 상태가 계다. 그 상태에서만 방향전환을 할 수 있다. 유턴이 가능하다. 구조는 꼬인 것이다. 꼬인다는 것은 어떤 하나를 둘이 공유한다는 말이다. 꼬인 상태가 해제되면 나란해지고 나란해지면 대칭된다. 대칭되면 방향전환이 가능하다. 방향전환은 대칭의 50대 50 상태에서 한쪽이 움직이지 않고 그 에너지가 다른 쪽으로 옮겨간 것이다. 계 내부에 코어가 형성되고 그 코어가 이동할 때 방향전환이 일어난다. 계를 이루고 다음 코어를 이루고 다음 코어가 이동해서 변화가 선으로 일어나고 점으로 멈춘다. 우주에는 궁극적으로 점과 선밖에 없다. 단절과 연결밖에 없다. 둘 이상이 동시에 연결되면 꼬이고, 꼬이면 중심이 얻어지고, 중심이 있으면 주변이 있으며, 중심과 주변을 얻으면 내부와 외부가 생긴다. 사건은 여기서 시작된다. 내부와 외부가 분리되면 그것이 계다. 우리가 보는 입체나 면이나 선은 관측자가 외부에 있다. 관측자가 있으면 안 된다. 순수하게 대상 자체의 논리로 전개해야 한다. 외부개입을 배제하는 것이 계의 의미다. 계를 이루면 자체의 질서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
우주에는 분할만 있고 연결은 없습니다.
분할과 연결은 동전의 양면이므로 이쪽에서 분할되면 저쪽에서 연결됩니다.
이쪽의 분할은 내가 액션을 한 것이고 저쪽의 연결은 저절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분할하면 연결되는데 이 과정을 생략하고 연결을 먼저 하면?
이게 인공적으로는 가능한데 자연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연결한 수 있는 것은 미리 프로그램을 깔아놔서입니다.
전화번호를 안다면 전화로 연결하면 되지요.
그것은 전화가 있고 번호가 있기 때문이며 자연에서는 그게 없습니다.
만남이 중요하지만 자연에서는 만나는 방법이 없습니다.
어떤 A가 B를 만나려면 둘 사이에 있는 것을 모두 제거해야 합니다.
연예인을 만나려면 자기도 연예인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연예인 가방들이로 취직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건 야매이므로 논외.
하나의 사건 안에서 통제가능한 방법으로는 분할만 있습니다.
연결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이미 하나의 사건이 아니며
남의 도움을 구했으므로 통제가능하지 않은 거지요.
구조론은 하나의 사건 안에서 자력으로, 내부적으로 가능한 것을 따집니다.
그것은 분할 밖에 없습니다.
왜 이게 중요한가 하면 어떤 일을 처음 할 때는 이 부분이 부각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프로그램이 깔려 있고 정보가 공개되어 있을 때는
연결하면 되지만 백지상태에서 코로나와 같은 것을 처음 상대할 때는
실험조건을 엄격하게 세팅해야 합니다.
당장 클로로퀸도 실패해서 트럼프가 망신을 당했는데
연결만 추구하다가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거지요.
아닌 것을 제거하고 남는게 치료제이지요.
우리는 남의 도움을 받는데 익숙하므로 뭐든 연결하면 된다고 착각하지만
이건 어린이가 백화점에서 뒹굴면 아빠가 지갑을 연다는 식이라서
진실한 답이 아닌 거지요.
어린이는 이런거 몰라도 되지만 과학자라거나 정치인이라거나
보스라거나 가장이 되거나 진지한 이야기를 한다면
처음 도전한다면 이게 중요해집니다.
재벌 2세라면 그냥 만나면 됩니다.
내가 재벌 2세가 아닌게 문제지요.
무엇을 잃어야먄 무엇을 얻는 것이며 잃는게 먼저고
잃는 과정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박근혜 어린이와 안철수 어린이는 그냥 울고 떼쓰면 얻습니다.
이런건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는 거지요.
구조론을 공부할 때 가장 헷갈렸던 지점이,
우주는 분할만 반복하는게 아닌가?
특히 책 구조를 보면 죄다 분할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듯하여
개인적으로 이런 지점에서 상당히 혼란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책과 달리 사이트의 글을 보면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기 때문.
구조론과 기성이론의 분명한 차이점은
단위의 형성에 대한 분명한 정의인데,
서양학문이 대개 연결만 반복하거나
분할만 반복하다가 차원이 1000차원 10000차원 막 올라가는데,
구조론은 연결과 분할 사이에 존재 성립을 말하므로
단위가 매조지 된다는 것이 핵심 차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여전히 헷갈릴 수 있는 것은
질입힘운량으로 달려가는 과정은 분명 분할인데
질과 양만큼은 연결이거든요.
즉 연결과 연결의 사이에 포지션 분할이 있다.
뭐 이렇게 이해를 해야 하는 건지.
헷갈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