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과 인식론
밀도, 입체, 각, 선, 점은 이 안에 다 있다. 구조론은 눈에 보이는 대로 보지 말고 자연의 있는 그대로를 보자는 제안이다.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인식 사이에서 결 어긋남의 문제다. 세상이 복잡해진 것은 자연이 가는 방향과 인간이 보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연은 언제나 탑에서 바텀으로, 원인에서 결과로, 작용에서 수용으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머리에서 꼬리로 간다. 자연을 움직이는 에너지가 탑포지션에 있고, 전체에 있고, 원인에 있고, 작용에 있고, 머리에 있기 때문이다. 2는 1을 움직일 수 있지만 1은 2를 움직일 수 없다. 이것이 자연의 대전제다. 의사결정은 대칭을 쓰는데 2는 내부에 대칭을 만들 수 있지만 1은 대칭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결 따라가야 한다. 2에서 출발하여 1로 나아가면 자연을 손바닥 보듯 알 수 있다. 세상은 언제나 2에서 1로 가는 마이너스 방향으로 진행한다. 마술사가 보자기나 상자를 사용하는 것은 관객을 속이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마술사의 보자기를 벗기고 상자를 열어 내부를 보자는 것이 구조론의 제안이다. 야바위의 덮어놓은 바가지나 쥐고 있는 주먹 속에 무엇을 감추었는지 그 내막을 알아보자는 거다. 자연에도 그러한 내막이 있다. 자연은 에너지의 방향을 바꾸는 방법으로 의사결정하며 방향은 계의 확산과 수렴의 둘이며 둘을 대칭시키고 둘이 공유하는 축을 이동시켜 에너지 방향을 통일하는 방법을 쓴다. 이때 의사결정에 들어가는 비용만큼 구조손실이 일어난다. 의사결정비용을 조달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하므로 에너지는 방향성이 있다. 그것이 엔트로피의 비가역성이다. 날아가는 공이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 공중에서 방향을 바꿀 수 없다. 만약 바꾼다면 공을 둘로 쪼개야 한다. 공이 벽에 튀기거나 바람의 힘을 빌려서 방향을 바꿀 수 있지만 그 경우는 비용이 청구된다.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내부의 자원을 동원하여 방향을 바꾸려면 폭발 등으로 쪼개서 대칭을 일으켜야 하며 그 과정에서 손실이 일어난다. 전체에서 부분으로 진행하면 전체가 부분보다 크므로 비용조달이 가능하지만 역방향 진행은 비용조달문제로 불가능하다. 곧 엔트로피다. 엔트로피의 법칙에 의해 자연은 언제나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는 일방향으로 진행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이를 거꾸로 되짚는다. 자연은 2에서 1로 가지만 인간은 1에서 출발하여 2를 추론한다. 부분을 보고 전체를 파악하려고 한다. 우리가 파악해야 하는 것은 사건이고, 사건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우리는 언제나 사건의 원인측이 아닌 결과측에 서기 때문이다. 원인은 언제나 결과보다 크다. 원인은 전체에 미치고 결과는 부분에 나타난다. 사람이 죽은 이유는 총을 맞았기 때문이다. 총을 살펴보면 답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총을 쏜 자는 이미 도망쳤고 우리는 죽은 자만 살펴본다. 정확히 판단하려면 총을 쏘는 범인의 어깨 뒤에서 봐야 하지만 CC카메라를 설치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등 뒤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범인이 도망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유체계는 당연하다는 듯이 부분에서 전체의 방향으로 거꾸로 되짚는 형태로 굳어버렸다. 70억 인류가 모두 덫에 걸려버렸다. 아주 뇌가 굳어버렸다. 일단 인간의 언어가 여기에 맞춰져 있다. 주고받기 대화로 탐구하면 이미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이 필요하다. 사유의 방향이 틀렸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라. 결과가 아닌 원인을 보라. 관측하지 말고 재현하라. 귀납하지 말고 연역하라. 수용측이 아닌 작용측을 보라.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보라. 약자가 아닌 강자를 보라. 이익이 아닌 권력을 보라. 개인이 아닌 집단을 보라. 정보가 아닌 메커니즘을 보라. 사물이 아닌 사건을 보고, 물질이 아닌 에너지를 보라. 량이 아닌 질을 보고 대상이 아닌 관계를 보라. 1이 아닌 2를 보라. 봐야 하는 관계는 둘 사이의 관계다. 어떤 대상을 바라보면 이미 틀렸다. 당신이 무엇을 보든 그것은 틀린 것이다. 당신이 흔들리는 깃발을 보든, 그 깃발을 흔드는 바람을 보든, 깃발이냐 바람이냐 하고 생각하는 자기 마음을 보든 당신이 무엇을 봤다면 이미 잘못 본 것이다. 당신은 생각의 습관을 완전히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겉으로 노출된 관계를 메커니즘에 가두어 패턴이 반복하게 하면 그것이 구조다. 갑순이와 을돌이의 사이를 보면 관계이고 남녀커플로 일반화하면 구조다.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면 잘못된 습관을 유지해도 상관없다. 잘못된 것은 마찰을 일으키고 밀고 당기는 상호작용 과정에 용해되기 때문이다. 단, 당신은 헷갈리게 된다. 단편적인 사실에 낱낱이 대응할 수 있어도 돌아가는 판도 전체를 운영하지는 못한다. 그렇다. 당신은 일대일 대응법을 쓸 수 있다. 한 명 한 명을 낱낱이 상대한다면 어디에 서든 상관없다. 그러나 일이관지 하려면, 하나를 보고 열을 알려면, 패턴을 복제하려면 단 하나의 명령어로 돌아가는 판도 전체를 바꾸려고 한다면 당신은 깨달아야 한다. 맥을 짚어야 한다. 그물의 기둥줄을 장악해야 한다. 핵심을 틀어쥐어야 한다. 에너지가 들어가는 동력원을 장악해야 한다. 줄을 세운 다음 꼬리를 버리고 머리를 공략해야 한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공략해야 한다. 존재는 사건이다. 사건은 에너지의 작용이다. 작용이 있으면 수용이 있다. 때리는 사람이 있으면 맞는 사람이 있다. 수용은 작용을 복제한다. 그러나 완전하지 않다. 에너지가 빠져 있다. 돌아가는 팽이와 죽은 팽이의 차이다. 우리는 수용측을 보고 추론하여 작용측을 판단한다. 그 판단은 틀린다. 그런데 어느 정도 들어맞는다. 완전하지 않을 뿐이다. 이에 혼선이 빚어진다. 작용측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작용이 순식간에 끝나기 때문이다. 때린 사람의 주먹은 너무 빨라서 볼 수 없다. 맞은 사람은 10분 동안 그라운드에 누워 있다. 살펴볼 시간이 넉넉하다. 우리는 쓰러진 사람의 상태를 보고 때린 사람의 주먹 강도를 추론해야 한다. 이런 식이다. 그것은 불완전하다.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속 카메라로 찍으면 된다. 느린 화면으로 돌려보면 때린 사람이 찰나의 순간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작용측을 봐야 한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사물은 그 작용이 지나간 흔적들이다. 나무막대가 직선인 이유는 대패로 밀어서 깎았기 때문이다. 선이 작업하기 쉽다. 국수가 선의 형태로 뽑혀 나오는 이유는 선으로 뽑는 것이 수제비 만들기보다 쉽기 때문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사물의 입체, 면, 선은 인간의 작업과정에 왜곡된 것이고 실제로 자연의 의사결정은 다르다. 자연에서 선은 두 점의 연결이다. 선은 길이가 없다. 점은 선의 단절이다. 점은 크기가 없다. 각은 변화각이다. 실제로 자연의 변화는 언제나 각을 트는 것이며 각을 틀면 연결이 끊어진다. 연결이 끊기면 점이고 끊어지려고 하면 선이며 끊어지도록 틀면 각이다. 각을 틀 수 있는 방향의 중심은 입체다. 각을 틀려면 두 방향이 겹쳐야 하는 것이 밀도다. 그런데 인간이 눈으로 보는 크기는 작용측이 아니라 수용측에 반영된다. 대패는 나무에 작용한다. 점, 선, 면, 입체의 형태는 대패가 지나간 나무에 자취로 남는다. 즉 우리는 정확히 사건의 반대편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귀납이다. 우리가 보는 점, 선, 면, 입체는 에너지가 지나간 자취이지 에너지 그 자체의 작동방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밀도를 볼 수 없다. 입체는 에너지가 떠나간 자취고 에너지 그 자체를 볼 수 없다. 보려면 연역해야 한다.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이다. 우리는 길다란 국수가락에서 선을 보지만 엄밀히 말하면 선은 국수뽑는 기계 속에 있다. 국수가 뽑혀 나오는 구멍이 점이다. 그 점을 통과하는 국수가 선이다. 밀가루반죽 덩어리가 그 구멍으로 꺾이는 것이 각이다. 반죽덩어리가 입체다. 반죽을 누르는 피스톤이 밀도다. 우리는 성냥갑이나 나무토막에서 입체나 면이나 선을 찾으려 하지만 틀렸다. 그 면을 깎는 대팻날에서 각을 판단해야 한다. 에너지의 작용측에 진짜 차원이 있다. 우리는 긴 선을 선이라고 하지만 에너지는 원래 방향이 있을 뿐 크기가 없다. 밀가루 반죽이 구멍을 통과하는데 입력과 출력 두 점이 연결된다. 두 점의 연결선이다. 진짜 선은 길게 뽑혀 나온 국수가락이 아니라 국수 뽑는 기계의 구멍 안팎의 만남선이다. 입력점과 출력점의 연결선이다. 종이 위에 볼펜으로 선을 길게 긋지만 진짜 선은 종이점과 볼펜촉점의 연결선이다. 마찬가지로 각은 두 선의 연결각이며 입체는 두 각의 연결체이고 밀도는 두 입체의 연결밀도다. 연결은 곧 대칭이다. 에너지의 대칭도, 대칭체, 대칭각, 대칭선, 대칭점이다. 에너지의 방향만으로 판단해야 바르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선은 그 볼펜이 지나간 자취다. 그것은 가짜다. 에너지는 홀로 성립하지 않으며 반드시 어떤 둘의 만남 형태로만 성립한다. 닫힌 계가 두 방향을 가져야 에너지가 된다. 중력은 한 방향이므로 사용할 수 없다. 반중력이 있다면 중력을 빼먹을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은 없다. 수력발전은 두 방향의 힘이 성립한다. 중력과 그 중력을 버티는 댐의 항력이다. 추력과 항력이라는 두 힘의 팽팽한 대결 중에서 하나가 다른 한쪽을 이겨서 방향을 하나로 통일하면 그것이 입체다. 우리는 에너지가 가는 결을 따라가며 관측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뽑혀 나온 국수가락을 보지 말고 국수 뽑는 기계 안에서 밀도, 입체, 각, 선, 점을 포착해야 한다. 나무판자에서 면을 찾지 말고 판자를 깎는 대팻날의 각을 판단해야 한다. 그것은 관측대상을 개별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닫힌계 내부의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연역의 존재론이다. 그냥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은 귀납의 인식론이다. 인간의 뇌구조는 연역으로 되어 있다. 메커니즘에 반응하게 되어 있다. 우리가 문법을 배우지 않고도 한국어를 말할 줄 아는 것이 그러하다. 무릎을 탁 치며 알았다고 하는 말은 메커니즘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메커니즘에 정보를 채워 넣어 출력하는 식으로 패턴을 복제하여 지식을 이룬다. |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라. 결과가 아닌 원인을 보라. 관측하지 말고 재현하라. 귀납하지 말고 연역하라. 수용측이 아닌 작용측을 보라.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보라. 약자가 아닌 강자를 보라. 이익이 아닌 권력을 보라. 개인이 아닌 집단을 보라. 정보가 아닌 메커니즘을 보라. 사물이 아닌 사건을 보고, 물질이 아닌 에너지를 보라. 량이 아닌 질을 보고 대상이 아닌 관계를 보라."
- http://gujoron.com/xe/11844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