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012 vote 1 2020.03.11 (22:10:33)

      
    애드거 앨런 포


   애드거 앨런 포는 자타가 인정하는 천재다. 그냥 천재는 많다. 구조론적인 천재는 드물다. 그의 일생은 불우했다. 죽고 난 다음에 떴다는 점에서 고흐와 비슷하다. 포가 죽자 신문에 난 부고기사의 첫머리는 이러했다. "에드거 앨런 포 사망. 이틀 전 볼티모어에서 죽었다. 이 소식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겠지만 슬퍼할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악랄한 부고를 쓴 사람은 평론가 그리즈월드다. 그는 포의 유고집을 내면서 그를 모함하여 온갖 악담을 퍼붓고 증거로 조작된 포의 편지를 실었다. 포와 그리즈월드는 동종업계에 종사하면서 문단권력과 사교계의 암투로 무수히 부딪혔는데 포가 그리즈월드를 깠기 때문이다. 그리즈월드는 포를 소아성애자, 주정뱅이, 마약범으로 몰아갔다.


    포가 주정뱅이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13세 소녀와 결혼한 것도 사실이다. 마약범은 아니다. 그리즈월드의 악마 마케팅에 힘입어 많은 독자들이 도대체 포라는 인간이 얼마나 사악하길래 하고 그의 유고집을 사 갔다. 우연히 프랑스의 보들레르가 포의 시집을 읽고 '내가 쓰려고 한 모든 것이 이 안에 있다'며 격찬하자 단번에 전세가 뒤집어졌다. 


    당시만 해도 미국인들은 미국문학을 인정하지 않고 프랑스라고 하면 껌뻑 죽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미국물을 먹었다고 떠들어야 대접을 받지만 말이다. 포가 위대한 점은 문학의 본질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이 뭐지? 뭐냐구? 그 이전에 예술은 뭐지? 예술이 뭐냐구? 포는 이 부분에서 확실한 철학이 있고 주장이 있었다.  


    그래서 예술가인 척하는 사이비들과 부딪혔던 것이다. 포는 특히 미국에서 유행한 초월주의와 충돌했다. 초월주의는 말하자면 미국 특유의 억압적인 청교도 사상과 칼뱅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낭만주의에 역시 미국적인 이상주의와 신비주의를 짬뽕한 것이다. 노벨상을 제정하며 노벨은 문학상을 이상주의 문학에만 주라고 제한해 놓았다.


    문학이 뭐지? 예술이 뭐지? 그것은 말야. 인간을 계몽하는 것이지. 다 쓰임새가 있는 거라고. 문학과 예술의 목적은 인간에게 도덕적인 고결함을 안겨주는 거라고. 신사와 숙녀의 맑은 영혼에 깃드는 것이지. 그러므로 이상주의 문학만 진정한 문학인거야. 퇴폐주의는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지. 그놈들은 되다 만 것들이니 엉덩이를 차줘야 해. 


    그러나 대중은 언제나 낭만주의와 퇴폐주의를 좋아했다. 대중음악에도 반도덕, 반권위, 반문화주의가 있다. 문제는 계몽주의다. 신사와 숙녀를 위한 이상주의 문학, 고전주의 예술만 쳐주는 것이며 낭만주의, 퇴폐주의 이런 불온한 사상을 가진 자들은 쳐죽일 빨갱이 놈들이라구. 그렇다. 그들은 애초에 계급차별의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된다. 그의 까마귀The Raven에 반복되는 구절 다시없네Nevermore는 음울하다. 반면 포가 열심히 까댄 롱펠로우의 인생찬가는 제목만 봐도 전두환 시대의 조국찬가다.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을 떠올릴 수 있다.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고.' 왜 포의 입장에서 인생찬가는 문학이 아닌가?


    왜 롱펠로우의 초월주의는 문학이 아니고 똥인가? 이는 그림에서 인상주의가 박해받은 사실과 같다. 포는 같은 이유로 아둔한 미국인들에 의해 박해받은 것이다. 프랑스인들도 한때는 인상주의가 그림이 아니라고 여겼다. 저걸 왜 그리지? 고상하고 아름다운 감정을 불러일으켜 우매한 대중을 고결한 신사와 숙녀로 이끌어야 하는거 아냐?


    인상주의 그림은 외설적이고 얄팍해. 천박하지. 고흐 그림은 30분 만에 다 그렸을 거야. 그게 그림이냐고. 대가 밑에 제자들 열 명, 스무 명을 붙여서 도제식으로 물감빻기 3년, 밑그림 3년, 색칠 3년으로 10년은 수업해야 이 바닥에서 화가라고 명함을 낼 수 있는데 말야. 구조론으로 보자. 답은 마이너스다. 방향이 플러스라면 예술이 아니다.


0ccc99d9d1af5.jpg 8a1a811f2da71943.jpg



    히틀러가 찬양한 작품들이다. 아름답고 고상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있다. 사람을 가르치는 도구로 예술을 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작가를 죽인다. 예술이 인간을 계몽하는 도구가 되면 작품만 취하고 사람은 버린다. 군주가 법대로 하면 사람들은 법을 무서워하고 군주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주는 변덕을 부린다.


4894_17324_231.jpg


     작품에 현혹되지 말고 작가를 이해해야 한다. 작가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즘 작품은 그림 안에 그림이 있다. 그러나 인상주의는 맥락을 봐야 한다. 작가의 인생을 보지 않으면 작품에 접근할 수 없다. 그림 안에는 그림이 없다. 왜 퇴폐미술전에 한나라당 현판이 우뚝한지 작품 안에서는 결코 답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문학이 무엇이고 예술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문학과 예술의 본령은 인간에게 에너지를 주는 데 있다. 에너지를 주지 않는 음악은 음악이 아니고, 에너지를 주지 않는 그림은 그림이 아니고, 에너지를 주지 않는 문학은 문학이 아니다. 롱펠로우의 인생찬가는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일단 문학이 아니고 그래서 포가 깠다.


    사랑사랑 사랑타령 하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이상이상 이상하면 이상주의가 되고 그런 것은 아니다. 플러스는 가짜다. 왜냐하면 상부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인생찬가든 조국찬가든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이든 위에 뭔가 있다. 사실 예술의 뿌리를 더듬어 보자면 예술은 원래 어용이었다. 계관시인이 임금님의 덕을 찬양하는 것이 시의 탄생이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 음악의 출발이다. 원래 음악은 교회의 성가대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스 극장의 코러스도 출발이 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뭐든 쓰임새가 있어야 하고 음악의 쓰임새, 문학의 쓰임새, 미술의 쓰임새가 그런 것이다. 오늘날 무뇌좌파들의 수준도 19세기 롱펠로우 수준에 머물러 있다. 대중을 계몽하려고 진중권스럽다.


    포가 롱펠로우를 인정하지 않듯이, 그리스월드가 포를 미워하듯이 서로는 대치상태다. 그리고 역사는 결국 천재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가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고결한 감정을 불러일으켜 신사와 숙녀로 이끄는 것은 개똥이지 문학이 아니다. 얼어 죽을. 이상주의 문학에만 노벨상을 주게 되어 있고 그래서 처칠이 문학상을 받고 개판이었다.


    포의 까마귀는 검은색이고 검은색은 죽음을 상징한다. Nevermore는 부정이다. 인간은 부정에 의해 정화된다. 그리고 에너지를 얻는다. 두 갈래 갈림길 중에서 하나를 꺾는 것이다. 그것이 문학이다. 고흐의 까마귀가 있는 밀밭과 오베로 성당에는 갈림길이 나타난다. 두 갈래 갈림길의 선택에서 쿨하게 하나를 지워 없애는 것이 문학이다. 


    그럴 때 자기 위에서 에너지를 주는 상부구조가 없어지고 자신이 에너지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을 얻으려 한다면 그것은 사물이고 그것을 얻을 때 에너지를 곧 의사결정권을 잃는다. 롱펠로우는 무언가 주려고 한다. 히틀러는 무언가 주려고 한다. 그것을 받으면 에너지를 잃는다. 애드거 앨런 포는 무엇을 버리려 한다.


    희망을 버리고, 야심을 버리고, 목적을 버리고, 꿈을 버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의식의 표백에 도달할 때 인간은 에너지를 얻고 의사결정능력을 얻는다. 포가 천재인 것은 시를 잘 썼기 때문이 아니라 평론을 통해 문학이 무엇인지 잘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는 검은 고양이나 모르그가의 살인을 써서 추리소설 장르를 처음 개척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장편보다 단편을 높이 평가했는데 단편이 더 문학의 본질에 가깝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장편은 아무래도 플러스로 간다. 원고지 한 장당 고료를 받기 때문이다. 문학성과 멀어진다. 그는 유레카를 써서 시대를 백 년은 앞선 놀라운 과학적 예견을 하기도 했는데 구조론적인 감각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돌턴의 원자가설이 지배하던 시대다.


    그는 원자를 부정하고 물질이 인력과 그 반발력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백 년 후에 정립된 양자역학의 예견으로 보인다. 그는 빅뱅을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 천문학의 난제였던 올베로스의 역설을 풀기도 했다. 포가 유레카를 쓴 이유는 소설이 그냥 쓰는게 아니라 과학적인 구성에 의해 치밀하게 쓰이는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학자들은 그냥 천재의 직관으로 보지만 구조론으로 보면 간단하다. 뭐든 입자를 부정하고 질이라고 선언하면 된다. 원자라는 것은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고 공간을 점유하는 이유는 서로 반발하기 때문이고 반발하는 이유는 세차운동 때문이고 세차운동을 하는 이유는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공간에서 회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질을 안다면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쓰고 하는 것은 문학도 아니고 예술도 아니다. 100년 전에도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대개 초월주의, 이상주의, 신비주의로 도망간다. 인간은 권력을 원하고 권력은 의사결정권에서 나오고 의사결정은 두 갈래 길에서 하나의 카드를 꺾는 까마귀 같은 검은 것이다. 


    부정함으로써 긍정하게 되는 것이 에너지의 속성이다. 어둠을 통해 빛에 이르는 것이 진실이다. 에너지를 얻지 못하면 문학도 아니고 예술도 아니다. 고상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똥이다. 그것은 배설물이다. 애드거 앨런 포는 백 년 전에 그것을 알았다. 살아서는 박해받았고 죽고 난 뒤에 유명해졌다. 포는 문학과 예술의 구조를 알았다.


    쟈니윤이 죽었다. 그가 뜬 이유는 자학개그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에서 한국을 깠다. 박정희를 깐 것이다. 그는 백인과 흑인의 대결 와중에 끼인 별수 없는 동양인이었다. 별 볼 일 없는 동양인의 자학개그로 흑인과 백인이 대치하는 인종차별과 민감한 정치발언을 잘 수습해서 뜬 것이다. 즉 그는 백인과 흑인이 못하는 이야기를 했다.


    백인과 흑인이 얼마나 치열하게 대치하는지 분위기 파악도 못 하는 얼빵한 동양인 기믹이 먹혔다. 그래서 뜬 것이다. 왜 개그는 자학개그가 먹히고 왜 드라마는 비극이 먹히는가? 비극이 인간을 정화하는 이유는 죽느냐 사느냐의 선택 앞에서 하나의 카드를 꺾기 때문이다. 그럴 때 의사결정권을 획득한다. 에너지를 얻는다. 인간이 정화된다.


    기생충이 미국과 일본에서 뜬 이유도 자학개그 코드 때문이다. 그래서 미통당이 기생충을 싫어한다. 한국의 치부를 들켜서 쪽팔리다고 여긴다. 쟈니윤의 전성시대는 한국에서 오래가지 못했다. 원래 2인조 만담은 까는 사람이 있는데 조영남이 자니윤을 까지 못해서 망한 것이다. 게다가 미국에서 금의환향한 이미지 때문에 자학할 수 없었다.


    미국에서 먹히는 자학개그가 한국에서 통할 수 없는게 자니윤은 한국에서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영웅이 자학한다면 어색하다. 문학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모든 예술은 태생적으로 어두움을 안고 있다. 어둠에서 빛이 나오기 때문이다. 어둠을 강조하다 보면 찌질해지는 경향이 있다. 쿨해져야 한다. 의사결정은 패 하나를 꺾는 것이기 때문이다.


    찌질한 이유는 패를 꺾지 못하고 읍소하며 매달리기 때문이다. 찬양하는 자나 매달리는 자나 같다. 에너지를 주는 위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아래를 굽어보는 자가 패를 꺾을 수 있다. 노무현이 마지막 패를 꺾었듯이 말이다. 정봉주가 꺾지 못하고 찌질대는 그 패 말이다. 본래 엘리트인 김어준이 멍청한 척하는 것은 패 하나를 꺾은 것이다. 


    진중권이 꺾지 못하고 애지중지하는 그 패를 꺾고 대신 대중친화적인 캐릭터를 얻은 것이다. 두 갈래 길은 고흐의 마지막 그림 몇 편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패를 꺾었다. 길은 오베르의 성당 뒤에 있고 하나는 마을로 이어지고 하나는 묘지로 이어진다. 절벽 난간에서 어렵게 잡은 나뭇가지를 놓듯이 패를 꺾을 때 인간은 에너지를 얻는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3]kilian

2020.03.12 (04:01:21)

"부정함으로써 긍정하게 되는 것이 에너지의 속성이다. 어둠을 통해 빛에 이르는 것이 진실이다. 에너지를 얻지 못하면 문학도 아니고 예술도 아니다."

http://gujoron.com/xe/1177946

프로필 이미지 [레벨:22]이금재.

2020.03.12 (04:24:12)

상당히 익숙한 전개. 이하는 나무위키 '에드거 앨런 포' 항목 중
특히 추리소설 분야에서는 현대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꼽히며, 19세기 이후 추리소설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서술방식이나 트릭, 규칙 등의 상당수가 포로부터 나왔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1인칭 관찰자 시점 주인공인 "나"와, 경찰은 아니지만 명석한 판단력과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 어거스트 뒤팽 두 명이 등장한다.
  • 범죄자가 범죄사실을 숨기는 트릭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도둑맞은 편지 항목 참조.
  • 사건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모든 선택 가능한 답안을 지우고, 마지막으로 남은 답은 그것이 아무리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해도 진실일 확률이 높다.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 참조
Drop here!
프로필 이미지 [레벨:11]수피아

2020.03.12 (16:53:18)

최근에 고흐, 슈트라우스, 입생로랑 영화들을 보면서 "예술"이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보고 있었는데 ... 예술은 여기 있군요. "의식의 표백에 도달 하는것" (내가 만든? 내가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패를 꺾는 것"
[레벨:10]mensura

2020.03.12 (18:22:11)

ㅠㅠ

감사합니다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4747 에너지를 얻는 세 가지 방법 3 김동렬 2020-03-22 4187
4746 성선택설은 가짜다 2 김동렬 2020-03-20 3617
4745 의사결정구조 2 김동렬 2020-03-19 5229
4744 패러다임의 전환 1 김동렬 2020-03-19 3376
4743 닫힌계 1 김동렬 2020-03-19 3181
4742 사건의 통제 1 김동렬 2020-03-18 3131
4741 마이너스의 방향성 1 김동렬 2020-03-18 3240
4740 계의 마이너스 통제원리 1 김동렬 2020-03-17 3288
4739 유발 하라리의 오판과 진실 5 김동렬 2020-03-16 4624
4738 존재론의 태도 1 김동렬 2020-03-15 3133
» 애드거 앨런 포 image 4 김동렬 2020-03-11 5012
4736 연역의 재현과 귀납의 관측 1 김동렬 2020-03-10 5902
4735 감정은 없다 1 김동렬 2020-03-09 3895
4734 이야기의 단초 2 김동렬 2020-03-08 3230
4733 인간의 이야기 3 김동렬 2020-03-07 3414
4732 긍정의 배신 1 김동렬 2020-03-05 3695
4731 종교는 이단이다 5 김동렬 2020-03-04 4199
4730 존재론과 인식론 2 김동렬 2020-03-02 3337
4729 위대한 도약 2 김동렬 2020-03-01 3390
4728 대칭과 비대칭 1 김동렬 2020-03-01 3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