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3261 vote 2 2020.03.07 (21:10:35)

      
    인간의 이야기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오더라도 어제 심던 사과나무를 계속 심는 일 외에는 달리 할 것이 없다는 것이 인간의 비참이다. 버킷리스트 아이디어가 있지만 영화에나 나오는 이야기다. 실제로 죽음을 앞둔 사람은 '이웃집 철수엄마에게 빌린 돈 5만 원을 대신 갚아달라.'는 식의 사소한 부탁이나 할 뿐 그런 거창한 계획은 세우지 못한다. 그만한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의욕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왕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동물과는 다르다는 점을 보여야 한다.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는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 하느냐 아니면 당하느냐다. 이리 휘둘리고 저리 떠밀리며 당하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알면 일관된 계획을 세울 수 있고 환경의 변덕에 맞대응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이길 수 있다.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나 어디쯤 와 있고 어디로 가는지는 구조론으로 알 수 있다.  


    나는 그냥 태어났다. 승낙한 바 없고 사인한 바도 없다. 태어나 보니 출발선에 서 있었다. 총성이 울렸다. 남들이 뛰어나가길래 나도 뛰어갔다. 그러다가 금새 뒤처졌다. 이것들이 다들 어디로 몰려가는 거지? 경쟁은 자신이 없고 지름길을 찾기 시작했다. 씨앗은 그냥 주어졌다. 싹이 트면 가꾸고 꽃 피우는 절차는 알 수 있다. 이 우주가 왜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알 수 있다. 


    갈 수 있는 곳으로 간다. 갈 수 없는 곳으로는 당연히 못 간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엇이 오답인지는 알 수 있다. 오답을 전부 쳐내면 남는 것이 정답이다. 거기서 방향성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부단히 거짓을 타파할 뿐이다. 최초에 완전성이 있었다. 환경의 변화에 맞게 그것을 풀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왜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것은 있고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있다. 


    1이 왜 1인지는 알 수 없지만 누가 1을 정해주면 2는 내가 알 수 있다. 3도 알아낼 수 있다. 첫 단추를 끼워주면 두 번째 단추를 스스로 끼울 수 있다. 세 번째 단추도 끼울 수 있다.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나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 어디로 가는지를 헤아리면 그 이어지는 선들의 소실점에서 어디서 왔는지도 희미하게 파악할 수 있다. 출발점을 가늠할 수 있다.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나는 기록을 남길 수 있다. 몇 사람이 이 기록을 보는가는 그들의 역량과 수준에 달린 것이다. 수준이 안되는 자들이 본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니다. 볼 사람이 봐야 한다. 들을 귀 있는 자가 들어야 한다. 갈 사람이 가야 한다. 할 사람이 해야 한다. 남들을 쳐다보고 조바심 내는 일이 없이 태연할 수 있다면 인생은 그다지 성공이다. 세상 별거 아니고 인생 별거 아니더라.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더라.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것은 못 해도 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나쁜 것을 피하지 않아도 무방하나 할 수 없는 것은 피해 가야 한다. 인생은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에서의 선택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의 선택이다. 때로는 좋은 것을 먹고 때로는 나쁜 것도 먹게 되더라만 못 먹는 것은 안 먹는게 맞다.


    나는 많은 좋은 것들을 차지하지 못했고 많은 나쁜 것들을 피해 가지도 못했다. 구조론은 내가 할 수 있기에 하는 것이다. 포기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도 지혜가 된다. 하면서 깨닫는 것은 내가 등판하기 전에도 많은 이야기가 있어 왔다는 사실이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나 커다란 이야기의 흐름 속에 내가 있는 것이다. 더 좋은 길은 선택할 수 없으나 갈 수 있는 길은 끝까지 가보는 거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1]수피아

2020.03.08 (05:51:55)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나 어디쯤 와 있고 어디로 가는지는 구조론으로 알 수 있다" _오늘의 문장

[레벨:15]떡갈나무

2020.03.08 (10:43:45)

인간의 이야기에 수도 없이 귀기울여 지는건 그 이야기속에 계획과 희망이 있어서겠지요.
또한 내가 사는 이유겠구요 ^^
프로필 이미지 [레벨:13]kilian

2020.03.08 (15:53:25)

"인생은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에서 선택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선택이다."

http://gujoron.com/xe/1176343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6910 키스톤 1 김동렬 2024-07-10 1983
6909 자기소개 하지마라 1 김동렬 2024-07-10 2340
6908 김건희 한동훈 지리멸렬 사태 김동렬 2024-07-09 3557
6907 논객은 죽고 초딩은 날고 김동렬 2024-07-08 3557
6906 허웅과 여친 김동렬 2024-07-07 3538
6905 한심한 노력타령 김동렬 2024-07-07 3568
6904 다르마와 동기부여 김동렬 2024-07-07 2124
6903 힘과 짐과 도움 김동렬 2024-07-06 2313
6902 허웅 박철 강형욱 손웅정 윤석열의 경우 김동렬 2024-07-05 3626
6901 KBS, 메갈, 삐라 김동렬 2024-07-04 3640
6900 선택적 열고닫기의 명암 김동렬 2024-07-03 3548
6899 손웅정 르노코리아 박철 옥소리 김동렬 2024-07-02 3597
6898 왜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는가? 7 김동렬 2024-07-02 3483
6897 이념이란 무엇인가? 김동렬 2024-07-02 2786
6896 교종소승 정의당, 선종대승 민주당 김동렬 2024-07-01 3523
6895 깔때기의 법칙 김동렬 2024-06-29 3655
6894 타투를 해야 하는 이유 1 김동렬 2024-06-29 3750
6893 다르마와 요짐보 김동렬 2024-06-29 3261
6892 임성근 이종호 김건희 커넥션 2 김동렬 2024-06-27 3942
6891 금쪽이 전성시대 김동렬 2024-06-27 35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