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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3337 vote 1 2020.03.02 (18:39:08)

      

    존재론과 인식론


    구조론은 쉽다. 구조론은 간단히 말하면 눈에 보이는 대로 보지 말고 자연의 있는 그대로를 보자는 제안이다. 세상의 모든 어려움은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인식 사이에서 결 어긋남의 문제 때문이다. 자연이 가는 방향과 인간이 보는 방향이 다르므로 어긋나는 방향을 맞춰야 하는 문제 때문에 세상이 이토록 복잡한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결을 맞추면 일사천리로 풀린다. 마술사가 보자기나 상자를 사용하는 것은 관객을 속이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마술사의 보자기를 벗기고 상자를 열어보자는 것이 구조론의 제안이다. 야바위의 덮어놓은 바가지나 쥐고 있는 주먹 속에 무엇을 감추었는지 그 내막을 알아보자는 거다. 자연에도 내막이 있다.


   엔트로피의 비가역성이다. 자연은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원인에서 결과로, 작용에서 수용으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 가려면 에너지가 필요한데 에너지는 전체에 있기 때문이다. 2는 1을 움직일 수 있지만 1은 2를 움직일 수 없다. 이것이 자연의 대전제다. 2에서 출발하여 1로 나아가면 자연을 손바닥 보듯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1에서 출발하여 2를 추론한다. 우리가 파악해야 하는 것은 사건이고, 사건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우리는 언제나 사건의 원인측이 아닌 결과측에 서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은 이유는 총을 맞았기 때문이다. 총을 살펴보면 답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총을 쏜 자는 도망쳤고 우리는 죽은 자만 살펴본다.


   우리의 사유체계는 당연하다는 듯이 부분에서 전체의 방향으로 거꾸로 되짚어가는 형태로 굳어버렸다. 70억 인류가 모두 덫에 걸려버렸다. 아주 뇌가 굳어버렸다. 일단 언어가 여기에 맞춰져 있다. 다들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그래서 깨달음이 필요한 것이다. 방향이 틀렸다. 거기가 아니라 여기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라. 


    결과측이 아닌 원인측을 보라. 수용측이 아닌 작용측을 보라.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보라. 약자가 아닌 강자를 보라. 이익이 아닌 권력을 보라. 개인이 아닌 집단을 보라. 정보가 아닌 메커니즘을 보라. 사물이 아닌 사건을 보고, 물질이 아닌 에너지를 보라. 량이 아닌 질을 보고 대상이 아닌 관계를 보라. 1이 아닌 2를 보라.


   관계는 둘 사이의 관계다. 어떤 대상을 바라보면 이미 틀렸다. 당신이 무엇을 보든 그것은 틀린 것이다. 당신이 흔들리는 깃발을 보든, 그 깃발을 흔드는 바람을 보든, 깃발이냐 바람이냐 하고 생각하는 자기 마음을 보든, 당신이 무엇을 봤다면 이미 잘못 본 것이다. 당신은 생각의 습관을 완전히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이 진리의 이면으로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면 잘못된 습관을 유지해도 상관없다. 잘못된 것은 마찰을 일으키고 밀고 당기는 상호작용 과정에 용해되기 때문이다. 단, 당신은 헷갈리게 된다. 단편적인 사실에 낱낱이 대응할 수 있어도 돌아가는 판도 전체를 운영하지는 못한다. 그렇다. 당신은 일대일 대응법을 쓸 수 있다.


   한 명, 한 명을 낱낱이 상대한다면 어디에 서든 상관없다. 그러나 다 하나의 명령어로 돌아가는 판도 전체를 바꾸려고 한다면 당신은 깨달아야 한다. 맥을 짚어야 한다. 그물의 기둥줄을 장악해야 한다. 핵심을 틀어쥐어야 한다. 에너지가 들어가는 동력원을 장악해야 한다. 줄을 세운 다음 꼬리를 버리고 머리를 공략해야 한다.


   존재는 사건이다. 사건은 에너지의 작용이다. 작용이 있으면 수용이 있다. 때리는 사람이 있으면 맞는 사람이 있다. 수용은 작용을 복제한다. 그러나 완전하지 않다. 에너지가 빠져 있다. 돌아가는 팽이와 죽은 팽이의 차이다. 우리는 수용측을 보고 추론하여 작용측을 판단한다. 그 판단은 틀린다. 그런데 어느 정도 들어맞는다. 


    완전하지 않을 뿐이다. 이에 혼선이 빚어진다. 작용측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작용이 순식간에 끝나기 때문이다. 때린 사람의 주먹은 전광석화처럼 빠르다. 너무 빨라서 볼 수 없다. 맞은 사람은 10분 동안 그라운드에 누워 있다. 살펴볼 시간이 있다. 우리는 쓰러진 사람의 상태를 보고 때린 사람의 주먹 강도를 추론해야 한다.


    이런 식이다. 그것은 불완전하다.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속 카메라로 찍으면 된다. 느린 화면으로 돌려보면 때린 사람이 찰나의 순간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그런데 우리가 눈으로 보는 사물은 그 작용이 지나간 흔적들이다. 나무막대가 직선인 이유는 대패로 밀어서 깎았기 때문이다. 


    선이 작업하기 쉽다. 국수가 선의 형태로 뽑혀 나오는 이유는 선으로 뽑는 것이 수제비 만들기보다 쉽기 때문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사물의 입체, 면, 선은 인간의 작업과정에 왜곡된 것이고 실제로 자연의 의사결정은 다르다. 자연에서 선은 두 점의 연결이다. 선은 길이가 없다. 점은 선의 단절이다. 점은 크기가 없다.


   점은 크기가 없다. 각은 변화각이다. 실제로 자연의 변화는 언제나 각을 트는 것이며 각을 틀면 연결이 끊어진다. 연결이 끊기면 점이고 끊어지려고 하면 선이며 끊어지도록 각을 틀면 각이다. 각을 틀 수 있는 방향의 중심은 입체다. 각을 틀려면 두 방향이 겹쳐야 하는 것이 밀도다. 크기는 작용측이 아니라 수용측에 반영된다.


   대패는 나무에 작용한다. 점, 선, 면, 입체의 형태는 대패가 지나간 나무에 자취로 남는다. 즉 우리는 정확히 사건의 반대편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귀납이다. 우리가 보는 점, 선, 면, 입체는 에너지가 지나간 자취이지 에너지 그 자체의 작동방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밀도를 볼 수 없다. 입체는 에너지가 떠나간 자취다.


   에너지 그 자체를 볼 수 없다. 보려면 연역해야 한다. 에너지는 홀로 성립하지 않으며 반드시 어떤 둘의 만남 형태로만 성립한다. 닫힌 계가 두 방향을 가져야 에너지가 된다. 중력은 한 방향이므로 사용할 수 없다. 반중력이 있다면 중력을 빼먹을 수 있을 것이지만 그런 것은 없다. 수력발전은 두 방향의 힘이 성립한다.


   중력과 그 중력을 버티는 댐의 항력이다. 추력과 항력, 두 힘의 팽팽한 대결 중에서 하나가 다른 한쪽을 이겨서 방향을 하나로 통일하면 그것이 입체다. 우리는 에너지가 가는 결을 따라가며 관측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것은 관측대상을 개별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닫힌계 내부의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연역의 존재론이다. 그냥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은 귀납의 인식론이다. 인간의 뇌구조는 연역으로 되어 있다. 메커니즘에 반응하게 되어 있다. 우리가 문법을 배우지 않고도 한국어를 말할 줄 아는 것이 그러하다. 무릎을 탁 치며 알았다고 하는 말은 메커니즘을 알았다는 말이다. 메커니즘에 연결된 정보를 채워 넣는다.


   메커니즘에 해당하는 단어나 개념과 기억을 채워 넣는 것은 귀납이다. 이는 인식론의 영역이다. 실제로 사유는 메커니즘을 가동하여 연역하게 되어 있고 학교에서 암기하는 단어는 귀납으로 하게 되어 있으므로 각종 혼선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둘의 진행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방향을 통일하면 쉽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3]kilian

2020.03.04 (08:52:04)

"관측대상을 개별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닫힌계 내부의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보는 것이다.이것이 연역의 존재론이다."

http://gujoron.com/xe/1174360

프로필 이미지 [레벨:22]이금재.

2020.03.10 (04:4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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