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 되먹임이냐 음의 되먹임이냐다. 결과는 원인보다 작다. 구조론은 음의 되먹임이다. 온도가 내려가면 보일러를 가동하는 것은 양의 되먹임이고, 온도가 올라가면 보일러를 끄는 것은 음의 되먹임이다. 결과가 원인에 피드백 되어 에너지의 출입을 통제한다. 문제는 이것을 헷갈리는 경우다. 겉으로는 양의 되먹임처럼 보여질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음의 되먹임이다. 빅뱅 때 처음 입력된 에너지를 초과할 수 없다. 언제나 결과가 원인을 방해한다. 계를 지정하는 즉시 외부로부터의 에너지의 입력원이 닫혀버린다. 에너지는 외부에서 들어오는데 에너지에 의한 사건의 진행이 에너지가 들어오는 입구와 멀어지게 만든다. 쇠의 녹이 그러하다. 스텐레스는 순식간에 녹이 쓸어버린다. 그 녹이 추가적인 녹의 생성을 방해한다. 밥을 먹는 것이 입력이라면 똥을 싸는 것이 출력이다. 주변에 똥을 너무 많이 싸질러 놓아서 똥이 출입로를 막아서 결국 밥을 먹을 수 없게 된다. 이런 현상은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국소적으로는 양의 되먹임이 일어나므로 닫힌계를 파악해야 한다. 상자의 귤 하나가 상하면 순식간에 귤 상자 전체의 귤이 상해버린다. 상한 귤을 재빨리 제거하면 괜찮다. 특히 생물의 영역에서 양의 피드백은 무수히 관찰된다. 그러나 우주의 기본은 음의 피드백이다. 결과물의 축적이 에너지의 입구를 막는다. 범죄자가 결국 꼬리를 밟히는 것과 같다. 너무 많은 범죄의 결과물이 새로운 범죄를 방해한다. 생물의 번성에서 양의 피드백을 관찰할 수 있지만 이는 무수한 경쟁 끝에서 얻어낸 기적적인 승리다. 훨씬 더 많은 숫자의 멸종과 도태가 일어난 것이다. 자연의 근본은 엔트로피의 증가다. 인류에 의한 환경파괴와 같다. 결과가 원인을 방해한다. 쓰레기가 농사를 방해한다. 인간이 용의주도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자연법칙은 인간을 해친다. 술은 증류주가 아닌 자연발효로 알코올 도수가 16도 이상 올라갈 수 없다. 그 도수에서 효모가 죽기 때문이다. 결과가 원인에 피드백된 것이다. 결과는 효모에 의한 알코올의 생성이고 원인은 알코올에 의한 효모의 죽음이다. 그런데 16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다. 기생충이 자기 때문에 숙주가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과 같다. 어떤 선을 넘는 순간 갑자기 판도가 확 뒤집어진다. 그 한도 안에서는 한 번 방향이 정해지면 가속적으로 반응한다. 핵폭발처럼 되는 것이다. 브레이크 없는 폭주가 일어난다. 바이럴 마케팅이 그렇다. 영화를 본 관객이 자발적으로 홍보에 나서준다. 홍보비용을 쓰지 않았는데도 흥행이 된다. 원칙은 투자한 만큼 이익이 나오는 것인데 말이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한국인 인구가 5천만인데 극장에 관객이 6천만 명 올 수는 없다. 한동안 저절로 되다가 어느 순간부터 무슨 수를 써도 전혀 먹히지 않는다. 안철수가 기레기의 도움으로 승승장구 하며 공짜 먹다가 어느 순간부터 백약이 무효로 되는 것과 같다. 많은 경우 음의 되먹임인데도 양의 되먹임으로 착각되어 환상에 사로잡힌다. 닫한계를 지정하면 명확하다. 헷갈리는 이유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에 걸쳐 다섯 번 반응이 일어난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질을 투자했을 뿐인데 덤으로 입자를 얻고, 입자를 챙겼더니 추가로 힘이 더해지고, 힘을 챙기면 보너스로 운동이 따라붙고, 거기에 량이 더해진다. 뒤에 줄줄이 따라오니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셈이라 하겠다. 거저먹었네. 공짜네. 간절히 바랬더니 온 우주가 힘을 모아 나를 돕는구나. 착각이다. 청구서는 뒤에 날아온다. 그만큼 구조는 파괴되어 있다. 구조손실은 내부적으로 일어난다. 혹사를 당한 투수는 어깨를 다쳐 병원에 입원한다. 보이지 않게 금속피로가 누적되어 성수대교가 무너진다. 우주는 근본 방향은 분명히 음의 되먹임인 것이다. 일정한 범위 안에서 일시적으로 양의 되먹임이 일어나므로 헷갈리지 않으르면 방향성을 판단해야 한다. 닫힌계인지 열린계인지 판단해야 한다. 중국처럼 인구가 많거나 미국처럼 주가 많으면 양의 되먹임이 일어나 다른 전개가 펼쳐진다. 일본처럼 섬으로 고립되어도 특이한 일이 일어난다. 우리의 상식과 다른 엉뚱한 일이 일어나곤 한다. 방향성은 두 변화 사이에서 변하지 않는 것의 변화다. 대칭된 둘은 변해도 고정된 축은 변하지 않는다. 그 축의 변화다. 대칭된 둘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변하지 않지만 전체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변한다. 바퀴살에 대해서 바퀴축은 변하지 않는다. 수레는 바퀴살이 회전한다. 축은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자동차는 바퀴축이 바퀴를 굴린다. 에너지의 전달이 반대다. 자전거라면 앞바퀴는 바퀴축이 움직이지 않는다. 바퀴살이 바퀴축을 끌고 가는 것이다. 그런데 뒷바퀴는 바퀴축이 움직인다. 바퀴축이 바퀴살을 끌고가는 것이다. 내리막길은 반대다. 내리막에서는 페달을 밟지 않으므로 관성력에 의해 바퀴살이 바퀴축을 끌고 간다. 이러한 방향전환의 내막을 알고 있어야 한다. 어떤 대칭된 둘이 변해도 둘 사이에 맞물리는 접점은 절대로 변하지 않지만 반대로 그 접점을 이동시켜 에너지의 출입을 결정할 수 있다. 한 배에 탄 두 사람이 변해도 배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가 흔들린다. 밖에서 파도가 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불변하지만 절대적으로 변한다. 야당이 정치공세를 퍼부으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대신 국민의 마음이 변한다. 룰이 바뀌는 것이다. 기레기가 모르는 함정이다. 여야의 정치가 펀치를 주고받을 뿐 국민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국민을 믿고 마음대로 정치술을 구사할 수 있다. 그런데 국민이 변해 있다. 4년 전과 다르다. 노무현 탄핵이 그러하다. 야당이 여당에 한 방 먹였다. 야당이 이긴 것이다. 그런데 국민이 변했다. 깃발이 흔들리는 것인가? 바람이 흔들리는 것인가?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인가? 처음에는 어떤 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지만 나중에는 심판이 변한다. 룰이 바뀐다. 깃발과 바람 사이에 대칭이 있지만 그 둘을 지켜보는 국민과의 관계에도 대칭이 숨어 있다. 사건은 다른 룰에 의해 다른 양상으로 5회에 걸쳐 전개한다. 그 과정은 닫힌계 안에서 음의 되먹임이지만 어떤 범위 안에서는 양의 되먹임으로 관찰되므로 헷갈리게 된다. 멸망 직전에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집단이 오히려 기세를 업은 것처럼 보여진다. 적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데 속아서 항복하면 바보다. 그것이 최후의 발악인지 아니면 새로운 기세를 업은 것인지 닫힌계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대칭된 둘 사이에 축을 이루는 제 3자의 변화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변하지 않지만 변한다. 부부가 다툰다면 그사이의 자녀는 어떨까? 자녀는 변하지 않는다. 즉 싸움에 가담하지 않는다. 자녀는 중립이다. 여야가 다투는 것이며 국민은 중립이다. 그런데 계속 중립일까? 천만에. 자녀는 중립이 아니다. 국민은 끝까지 중립이 아니다. |
'스텐레스 = stainless(얼룩 적은)'인데 혹시 오타이신가요?
스텐레스는 녹이 쓸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1초만에 녹이 쓸어버리기 때문에
녹이 피막이 되어 추가로 녹쓸지 않는 거지요.
워낙 미세하게 끼는 녹이라서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구리도 마찬가지고 쇠붙이 제품도 인공으로 녹을 쓸게 합니다.
이것이 구조론에서 말하는 역설이지요.
한국인들은 스텐레스를 그냥 스텐이라고 부르는데
스텐레스 곧 녹 없음을 녹이라고 부르는 건 이중의 역설.
쇠는 당연히 녹이 쓰는데 스텐레스는 쇠붙이인데도 녹이 쓸지 않는다면 이상하잖아요.
녹이 서서히 쓸면 부식되어 못쓰게 되고 너무 빨리 쓸면 오히려 보호막이 됩니다.
알루미늄도 녹이 쓰는데 산화알루미늄으로 코팅을 해서 녹이 쓸지 않게 막는 거.
녹으로 녹을 막으니 이녹치녹입니다.
"대칭된 둘 사이에 축을 이루는 제 3자의 변화를 볼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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