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형문자의 한계 한자는 상형문자다. 그런데 과연 제대로 상형하고 있는가? 한자는 충분히 상형하지 못하고 있다. 고대의 암각화를 보자. 각종 기호가 그려져 있다. 무엇을 나타내려 한 것인가? 왜 고대인들은 알쏭달쏭한 선과 동심원과 방패모양을 그려놓았을까? 우리는 이 문제를 쉽게 생각한다. 상형? 그리면 되잖아. 그런데 잘 못 그린다. 그리려면 관찰을 해야 하는데 관찰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측자의 존재가 문제로 된다. 관점의 문제다. 사실이지 그림은 간단하다. 만화책을 참고하여 그리면 된다. 피사체의 윤곽선을 따라 그리는 것이다. 그런데 윤곽선이 실제로 존재하는가다. 만화고기처럼 상당부분 만화가들이 지어낸 것이다. 이런 고기 없다.
고대사회에는 만화책이 없었다. 어떻게 그리지? 그냥 그리면 되잖아. 안 된다. 우리는 윤곽선을 그리지만 고대인은 사물의 본질을 나타내려고 한다. 윤곽선이 잘 안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물의 윤곽선을 잘 안다고 믿는 것은 만화책 덕분이다. 사물을 주의 깊게 관찰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한자는 잘 상형하지 못하고 있다. 한자 중에서 잘 상형된 것은 상중하上中下다. 위와 가운데와 아래에 점을 찍으면 된다. 그런데 남녀男女만 해도 왜 모양이 이따위로 되는지 알 도리가 없다. 남자같지도 않고 여자 같지도 않다. 존재의 본질을 표시하려고 한다. 그 경우 더 나빠진다. 어린이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그림이 점점 텍스트로 변한다. 이미지가 아니다. 머리는 위에 있고 손가락은 다섯이며 머리와 몸통 사이는 목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표시하려고 한다. 특히 연결부위가 문제로 된다. 버스를 그리자면 옆모습을 그리는게 편하다. 앞모습을 그리면 곤란해진다. 정면과 측면의 연결을 자연스럽게 처리하려면 지붕을 그려야 한다. 더욱 궁지로 몰리게 된다. 관측자가 공중에 있다.
머리카락에 가려서 그릴게 없어요. 이 그림은 눈썹을 강조해서 해결했지만. 이 정도에 이르면 거의 깨달음과 같다. 인물을 그릴 때는 정면만 그리는 어린이도 있다. 한 사람을 그리면 괜찮은데 두 사람을 그리자면 둘이 나란히 한 방향을 보고 사진 찍는 포즈를 취해야 한다. 이상하다. 특히 여자어린이들이 정면만 그리는데 측면을 그리려면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려서 그릴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진다.
고구려 벽화 수렵도를 참고하자. 사실적인 그림과 고대인의 상형이 섞여 있다. 특히 산을 이상하게 그려놓았다. 나무를 이따위로 그리면 미술선생님한테 혼난다. 초등학생의 그림일기는 반드시 하늘에 태양을 그린다. 그곳이 여백이 아니라 하늘임을 표시하려고 한 것이다. 그림이 점차 기호로 변하는 것이 이발소그림의 특징이다.
신라토기의 나무목자 패턴은 나무의 위는 가지가 있고 아래는 뿌리가 있다는 점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외형을 관찰하지 않고 사물의 본질을 나타내려고 하는게 고대인의 한계, 부족민의 한계, 깨닫지 못한 사람의 한계, 지능이 낮은 사람의 한계다. 어린이가 영재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방법은 이런 점을 테스트해 보는 것이다. 영재는 사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앞을 보여주면 뒤를 추론한다. 범재는 따로 따로 생각하기 때문에 앞을 보여주면 앞만 본다. 우리는 문명중독에 걸려 있다. 현대인은 굉장히 똑똑하다. 우리가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쳐서 여기까지 올라왔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나경원같이 무식한 원시인을 만나면 당황한다. 그리스의 회화수준은 고구려나 백제가 천 년 동안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연대가 비슷한 중국 한나라 그림도 고대인의 사유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주의가 반영되지 않았으니 그림이 아니라 기호다. 그 차이는 굉장히 크다. 현대인은 어물쩡 그 과정을 패스해 버렸다. 그러므로 자신이 얼마나 높은 수준에 올라와 있는지를 모른다. 그 때문에 황당한 일이 도처에서 벌어진다. 세상을 본질로 보고 기호로 보려는 고대인들이 도처에 있다. 그림이 중요한 이유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당신은 근대인의 눈을 가지고 있는가? 여전히 고구려 벽화를 그리고 있지 않은가? 그림이 점점 기호가 되고 있지 않은가? 한자는 고대인의 상형이라 엉터리다. 그들은 애써 본질을 나타내려고 한다. 그러나 사물을 본질로 보려고 하면 안 된다. 있는 그대로를 관찰해야 과학이 된다. 세상은 유기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사물 자체의 고유한 본질 곧 내재적인 속성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 환경과의 유기적인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산은 강이 있기 때문에 산이 되고 강은 산이 있기 때문에 강이 된다. 산 따로 그리고 강 따로 그리면 산도 죽고 강도 죽고 의미도 죽는다. 점은 길이 속에 있고, 선은 너비 속에 있고, 너비는 부피 속에 있고, 부피는 밀도 속에 있다. 그러나 한자는 점과 선과 면과 입체와 밀도를 각각 분리하여 별도로 나타내려 한다. 틀려먹은 것이다. 사물의 얽혀 있음을 보지 못하고 관계맺음을 보지 못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초딩일기 수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고대인 수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스인 수준으로 보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중국 한나라의 회화수준은 같은 시기 그리스에 비해 몇 천 년이나 뒤떨어져 있다. 보는 눈의 한계가 사유의 한계를 정한다.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사물의 본질을 보지 말고 주변과의 관계를 보라. 본질에는 본질이 없다. 피사체에는 반드시 관측자가 있다. 관측자의 존재를 보는 것이 보는 것이다. 중국이 서양인과 접촉하지 않았다면 수천 년 세월이 흘러 언젠가는 근대화가 되었을까? 천만에. 그럴 가능성은 없다. 중세인의 사유를 극복하지 못한다. 외부충격 없이 고립된 문명은 절대 스스로 껍질을 벗어던지지 못한다. 서양도 마찬가지다. 아랍과 인도와 중국의 문물이 흘러들어가면서 기독교 세계관의 한계를 깨뜨렸기 때문이다. 인류는 소수의 똑똑한 사람이 이끌어가는 것이다. 묻어가는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수준이 올라갔다는 사실을 모르는데 비극이 있다. |
"사물의 본질을 보지 말고 주변과의 관계를 보라. 본질에는 본질이 없다. "
- http://gujoron.com/xe/11447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