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민이 돌아갈 땅은 이미 없다. 일본정부가 그 사실을 이주민에게 제대로 알리고 설득해야 한다고 봄.
이주민은 일본안에서 희망하는 곳으로 효율적으로 배분시켜야 한다.
그 땅은 재건이고 뭐고 그냥 버려둬야 한다. 원전해결책이나 잘 찾아보기를...
아직까지 이주민에 대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것도 웃긴 일...
그 지역말고 다른 지역들은 멀쩡한데 다른 지역을 활용해야 할터인데...이주민들 임시 거처 지은다고 노동자들 모집하는 광고를 왜 한국까지 가지고 오나... 전쟁이 일어나서 일본 전역이 폐허가 된 것도 아닌데... 이주민들을 설득하지 못하는 일본정부도 한심한 일, 그것은 그만큼 이주민에게도 정보가 제대로 가지 않고 있다는 것. 그래서 계속 꼬이는 것.
하나의 지방자치가 무너졌으면 아무리 일본 사회라 해도 비상시국이니 일본 정부가 권한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것은 일사분란한 힘에 의해서만 풀 수 있는 것....그런데 일본의 뿌리깊은 지방문화를 보면 이주민들 이지메당할 확률도 높을 것 같음. 그래서 고향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라 보임.
그 땅은 지금은 죽은 땅과 같음. 언제 회복될지 모름... 아마도 이주민들 마음도 이미 죽은 것과 같은지도...그들의 유산과 추억이 모두 사라져 버렸으니...
그러나 재건의 희망이 있다면 임시 막사는 필요할지 몰라도 돌아갈 곳이 없다면 일본 전역으로 흩어져 들어가 새롭게 정착하는 것이 나을 듯... 엉뚱한 곳에 성금쓰지 말고 이주민들 잘 정착하는데 혹은 진짜 살 집을 짓는데 쓰는 것이 나을 듯... 그리고 원전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모든 총력을 쏟아부어야 할 듯....
이게 댓글이 벌써 십만은 돼야 하는 기사인데, 서태지로 덥고 황급하게 메인에서 내리고.. 아주 엄청 공들이고 있소.
돌려막기의 궁극을 보오.
어후 진짜 궁극처럼 여겨지오.
차라리 여기까지가 끝이었으면 좋겠소.
하여 이방면에서는 출중한 진화력을 보이는 쥐넘들이니...
이지아측 담당 법무법인 = BBK 담당 법무법인= 법무법인 바른 법무법인 바른의 대표 = 강훈 (2008 청와대 법무비서관) 2011년 5월23일 = 노무현 대통령 2주기 = 서태지 이지아 위자료 청구소송 3차 변론일
(트위터에 돌고있는 글이오.)
무엇으로 막든 .... 하나하나 다 저장되고 있으니... 막는 것이 막는 것이 아니게 될 것이라 생각하오.
ㅎㅎㅎ오늘 아침 방송뉴스 머리기사들..
"서태지가 지인에게 보낸 메일에서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언제 귀국할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헐.... 거게 뉴스감인가....
ㅎㅎㅎ 뉴스 아나운서들이 다들 연예가 중계 리포터들이 되았소...
웃기기는 하네만 듣는 국민 기분나쁘오... 질떨어지는 취급당하는 것 같아서.
서태지가 아이가 둘이나 있데요 글쎄.
하나는 이주노 하나는 양현석.
헐.. ㅎㅎㅎ
서태지와 아이둘~
태왕사신기에서 묘한 느낌을 주더니 묘하게 대박을 냈네요.
어쨌든 서태지가 결혼을 했었다는 것은 쇼킹하네요.
은둔하여 지낸 시간이 오래니 별일이 다 있을 수 있겠지요.
깔끔하게 정리하는게 관건일 것 같네요.
터지는게 이들에게는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니..세인들의 비난이야 감수해야겠지요.
터지는게 자유회복!!
쥐박이 온갖 정보를 틀어쥐고 지 좋은대로 주무르니, 이제 청와대에 대지진이 났다해도 구하러 갈 사람 아무도 없을 거이다, 이넘아!
저런게 통하나? 봄이 봄같지 않어.
쥐사장을 대통령으로 뽑아서 여러 대통령 잡는구려, 문화대통령 얼굴을 벗겨 쥐사장 가림막을 삼고 있소.
아~ 머리야...
좋은 글이오. 사람답게 살 용기를 얻었소.
예전에 누가 내 치즈를 먹었는가? 라는 책을 보며 환호했었소. 그때 당시에는 그 사고가 조금은 획기적이었다는 것이었고... 또한 굳이 매달릴 필요없는 것에 매달리느니 나의 것을 찾아 나서겠다라는 의미로 받아 들이기도 했소. 파이의 문제는 결국 양의 문제였기 때문에 적은 양을 갖고 싸우는 것보다 더 많은 혹은 다른 양을 찾아 나서면 되는 것이었고, 결국 적은 것을 갖고 싸우는 것보다는 다른 양을 찾아 나서는 것은 도전과 같기에 이 도전은 질이 선행하지 않으면 길 찾기가 애매해져 버리기에 모두 찾아 나서지 못한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하오.
파이를 두고 싸울 것인가? 그것을 버리고 다른 파이를 찾아 나설 것인가? 라고 보이며, 결과적으로는 다른 파이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모험이기에 성공과 실패는 반반이오. 그러나 경험이라는 것은 그대로 축척되오. 또한 여기에 질에서 시작된 도전이라면 다른 파이를 찾아 모험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되오.
긍정의 배신이라는 책은 읽어 보지 않았지만, 대략 무슨말 하는지는 알것 같소. 하지만 너무 한쪽으로 몰고가는 느낌이 있다고 느껴지오.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를 지금 굳이 생각해본다면 받아들이는 사람의 생각의 차이일 수도 있으나, 그것을 가지고 경쟁의 도구로 이념으로 사용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보이며, 또한 인간의 도전의 문제, 모험, 경험의 축척, 질과양의 문제로 본다해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오. 그래서 긍정의 배신 저자는 한 쪽만을 연계시켜 자신의 생각을 부각시켰다고 생각도 되오.
파이를 갖고 싸운 상황을 질로 본다면 좀 더 높은 질을 내기 위해 피하지 말고 부딪혀야 한다고 생각되오.
그러나 피이를 갖고 싸운 상황이 양이라면 새로운 길을 찾아 모험을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되오.
긍정이라는 것도 언제나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는 양면성이 있기 때문에... 개인의 긍정보다는 사회를 변화시키는게 더 나을 때가 있고, 공동체보다는 개인이 긍정으로 변화해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되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아마도 사회나 공동체 집단의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보이기에 개인의 긍정을 재물로 삼는다고 생각하는 쪽인 것 같소.
그러니까 사회변화적인 측면에서도 쓰여졌다고 생각됩니다. 그동안 필요에 따른 해석으로 인간들을 많이 혹사시킨 것은 사실이니 사회와 공동체적인 측면이 많이 변화하기는 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무슨 얘긴지 잘 모르겠소.
긍정의 배신 저자가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를 치고 들어갔다는 얘기이오. '누가 내 치즈....?'라는 책 내용의 한 면을 부정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편 것이니 결국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라는 책의 인기(그동안 미친 영향)를 역으로 이용한 것이라 보이오. '누가 내 치즈를...? 는 한 면 만을 보고 얘기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렇소.
...그냥 맥락에서 본다면 그런다는 생각이 들고, 긍정을 어느 한쪽에서만 생각했다는 것이오.
긍정 그 자체는 개인에게 큰 에너지를 준다고 생각하기에 그렇소.
단지 긍정을 경쟁을 자극.촉진하는데에 이용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동안의 세계적인 흐름이 그렇게 어느정도 흘러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요즘은 경쟁은 더이상 경쟁력있는 단어가 아니기에 ...그래서 '긍정의 배신'의 저자는 그런점을 '누가 내 치즈..?' 라는 책을 비판하면서 자기 의견을 펴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의미오.
모든 언어들을 보면 그 언어를 해석하면 같은 말이지만 받아들여 그 쓰임의 용도를 달리하기에 이원론적이 된다고 생각하오. '긍정' 역시 산업사회에서 경쟁을 부추기는데에 어느정도 이용되었다고 보이오. 그래서 긍정의 본래의 의미를 되살리면 아무 문제가 없소. 긍정의 저자는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기에...사회적인 변화, 공동체의 변화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일리가 있는 생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과 왜곡되게 본다는 것과.... 긍정의 의미를 그대로 받아 들이고 생각하고 활용하는 것과, 긍정을 다른 어떤 것을 촉발하고자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과.. 그런 차이가 있다고 생각되오.
있는 그대로를 회복한다는 것은 ...그동안 인류가 어떤 이념이나 사조에 의해서 조금은 왜곡되게 세상을 보고 있었다는 말도 된다고 생각되오. 이념이나 사조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고 해도 되고.... 그런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오...^^;
<긍정의 배신> 의 저자가 <누가 내 치즈를...> 의 인기에 편승하려고 책을 썼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소. 진정성 뭐 이런거 따지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얘기요. 언론에서 신정아가 돈 벌 목적으로 폭로하는 책을 썼네, 노이즈 마케팅 이네... 하는 얘기가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말이오. 진정성으로 따지면 김일성의 진정성도 봐줘야 하고, 히틀러의 진정성도 봐줘야 하고, 쥐박이의 진정성도 봐줘야 하오.
'긍정' 이라는 말의 의미가 좋은데, 그 중에 일부 잘못된 면만 부각시키는게 아니냐? 맞소. 긍정적인 사고가 때로는 힘이 될 때도 있고, 그것으로 좋은 결과를 불러 올 때도 있었소. 문제는 지금 시대와 어느 지점에서 싱크로 되느냐 하는 거요. 신정아 책이 전체가 거짓이더라도 분명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과 작용 반작용 하는 부분이 있소.
'긍정'의 사전적 의미는 차치하고, 사실 이것은 저자의 의도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긍정'이 아니라 '긍정의 주술' 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오. 본문에서도 긍정적 사고가 잘못된 거라는 표현은 없었고... 하여간 본질은 구조론에서 줄기차게 얘기했던 실용주의냐? 합리주의냐? 에 관한 글이오.
미로 속의 쥐가 불평을 하지 않고 곧바로 다른 치즈를 찾는 것은 바로 미로속에 있기 때문. 폐쇄된 공간이기 때문이오. 일본사회가 실용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역시 섬나라의 폐쇄성 때문인 것이오. 사실 '긍정' 이라는 말은 중요하지가 않소. 갖다 붙인 말이오. 실제로 미로속의 쥐가 치즈를 찾아 바쁘게다니는 것이 쥐가 긍정적이라서 그랬다는 증거도 없고...
실용주의가 사회를 병들게하고, 합리적인 비판을 배제 하는 것이 진짜요. 나머지는 큰 의미가 없소. 설령 '누가 내 치즈' 의 저자가 다른 의도에서 책을 썼다고 하더라도, 일단 저자의 손을 떠난 책은 세상의 물결에 따라 흘러가게 되어있소. 저자가 어떤 의도로 책을 썼건 그 책이 나와 싱크로 되는 부분이 있기에 여기까지 온 게 아니겠소?
인기라는 말이 비약되어버렸네요.
다른말로는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누가 내 치즈를..? 과 그런 류의 서적들이 사회에 끼쳤던 영향력이라고 표현하면 될까요?
그 책 자체도 자체지만 그 책의 내용이 사람들에게 끼쳤던 영향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시면 될듯합니다.
그 책의 영향을 받은 만큼의 사람들과 혹은 사회에 대해서 그런류의 서적들 중에서 어찌되었든 탑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이런 류의 책들이 갖고 있는 영역 전체와 영향을 미친 범위 전체를 비판하기 위해 '누가 내 치즈..?을 선정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정확히 그 시대(대략 10년 정도?) 와 그 흐름에 대한 비판이기 때문에, '긍정의 배신' 저자가 '누가 내 치즈를..?' 를 비판하는 것은, 지나 온 시대에서 보자면 그런 류의 책이 나오게 되는 사상이 정점에 있었던 시기이며, 지금까지 미치는 영향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타겟을 정하는 것에서 '누가 내 치즈를..? ' 비교대상으로 선택한 것과 같다고 봅니다. 선별한 것이라고 생각되구요.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하거나 부각하기 위해서... 그러나 그것이 잘못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누가 내 치즈를 ?' 이라는 책은 그런 류의 책들이 나온 것 중에서 가장 많이 팔리거나 알려진 책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그만큼 많이 알려져 있고, 은연중에 사람들이 영향을 받고 있기에 ...그러므로 이전 시대에 대한 비판을 그 책을 꼬집으므로서 상징적으로 선택했다고 생각되구요.
그러므로 이 책은 사회비판적의 책인과 동시에 그 시기에 신호탄처럼 쏘아 올려진 그런류들의 책이 먹혀들었던 사회전반과 사람들의 인식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저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어쨌든 저자가 뭔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파악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 이용 했다고 표현한 것이구요. 왜냐하면 이 저자가 대상으로 하는 독자들과 내 치즈 독자들이 겹칠 수 밖에 없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가에 대한 관심 집중은 가장 높이 올라 있는 탑의 그 지점을 치고 들어가는 것이기에 자신이 비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겹치는 부분을 공략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쩌면 겹치는 독자들..이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구요. 그것이 변해야 자신의 말이 전달되고 먹히는 것이니까요. 물론 이 저자가 이상한 생각으로 공략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대부분 그렇게 사회는 변화되고,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밀어내듯이..그렇게 자리바꿈이 일어나는 것처럼...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지요. 단지 특정한 책이 거론되니 이 저자는 무슨 의도로 그렇게 했나? 하는 것에 관심이 가는 것이지요. 자신이 주장하고 싶고 변화시키고 싶은 부분에 대해서 얘기하려다보니 '누가 내 치즈를? 이 선택된 것이라는 것이었다고 봅니다. 사회가 열광했던, 그리고 그런 열광이 조금은 부정적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그 부분을 저자는 비판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되니까요.
물론 저는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이 든다는 것이고, 또한 '누가 내 치즈즐...?' 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 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그런 류의 책들 중에서도 다른 부분에서 생각할 부분도 있었다라는 것과, 왜 하필 그 책이어야 했는가? 왜 그 책을 선택해서 꼬집었을까?에 대해서 생각하다보니 긍정의 배신 저자의 의중을 살펴보고 싶었다라고 생각하시면 될듯합니다.
그러니까 양모님의 생각을 비판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저자가 왜 그런 생각을 하고, 많은 책 중에서 그 책을 선택했는가?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해 보았다고 생각하시면 될듯합니다. 양모님의 리뷰는 리뷰대로 있는 것이고 그 리뷰를 읽고 저는 제 얘기를 끌어낸 것이구요. 그러니 리뷰를 읽고 나서 리뷰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 한 번 살펴보았다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지요. 비슷한 얘기지만 리뷰와는 별개로 얘기를 한 것이지요. 즉 리뷰가 다른 얘기를 끄집어 낸 것이라고 보시면 좋겠지요. 나중에 책을 읽어보고 다른 의견을 낼 수도 있겠지요.^^
실용의 한계네요. 긍정이든 부정이든 치즈가 어찌 되었던 인간에겐 존엄이 필요함.
진짜배기 1개를 긍정하려면 9개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을 긍정주의자들은 모르는 듯.
주로 다른 사람을 고용하거나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긍정의 힘을 주장함. 문제는 제대로 긍정하기 위해선 늘 건전한(?) 비판세력이 존재해야 가능한데,
긍정만 하다가는 다들 맞장구 치다고 골로가기 일쑤.
불만세력이야 말로 역사를 바꾸는 원동력이었고, 인류의 삶을 편리하게 만든 원동력이었소.
제대로 된 가치를 긍정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대부분 긍정이란 것이 잘먹고 잘살기 위해
긍정적으로 살아서 잘먹고 잘살자는 동물수준에 머무르니 그런 긍정이라면 개에게나 주면 좋을 것.
17살 여름 이 세상에서 단 한사람 말을 알아들어줄 사람같은 선생님이 있어서 찾아서 그랬다.
" 나의 삶, 인간의 삶을 살아갈 필요성을 모르겠다. 결국 모든 것은 속임수.
학교가 나한테 의미가 없다. 하고 싶은 것을 찾을 수가 없다.
그냥 혼자 책이나 읽다 죽던가 그게 허락되지 않은면
그냥 살기 위해서 애쓰느니 죽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열심히 하고 싶지 않다.
인생을 긍정적으로 열심히 살라고 하는데 그게 다 속임수다.
저들은 자신들이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
그러면서 이유를 만들어내고 합리화시키는데 그건 인간이 만든 신이라는 이름의 노예가 되거나
아니면 그 밖의 이유들의 노예가 되는 것인데... 다 그것들도 궁극의 끝을 모르면서 그저 개나 돼지처럼
생존과 단순한 욕망으로 사는 것과 별로 차이가 없는 걸로 보인다."
선생님은 날마다 방과후에 남아서 참선과 요가를 배우라고 하셨다.
무슨 주문, 마인드콘트롤처럼 우주의 진리, 참, 우주의 조화력 이런걸 되뇌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서울대를 가라고 하시며 내 학습관리에 들어가셨다.ㅎㅎ
몇번 하다가 도망다녔다. 재미가 없어설.(지금도 쫌 죄송하다)
실제로 그 이유에는 뭔가에 간섭받고 관리되는 것을 못하는 나의 게으름이 70%는 넘었으니까
어쨎든 게으름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별로 없어보이니까.
대부분의 긍정이라는 것은 기복을 하는 종교적 주문과 큰 수준차가 있지 않다.
서구에서 그 긍정의 주문서(?ㅎㅎ) 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그들의 기독교적 우주관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럼 이렇게 말할 수도 있나?
"신은 죽었다."
"긍정은 죽었다."
ㅎㅎㅎ
긍정도 부정도 없다.
명확한 사실, 구조가 있을 뿐이다.
긍정도 부정도 때로 영양주사처럼, 때로 엔돌핀 주사처럼(반대로 담배나 마약처럼),
심신을 달래주거나 이완시키는 효과는 있다.
도가 지나치면 중독에도 걸리게 된다. 역시 마약처럼 자기는 기분좋고 주변은 괴롭게 한다.
일단이 글이 재밌네요.
웃자고 한 일에 죽자고 덤비는 공권력도 그렇고...
쥐 그림이 법정에 펼쳐지는 순간이 상상되어 ..어찌 웃지 않고 배기랴..하는 생각도 드네요.
자학이 극에 달하여 개거품이 잔뜩 낀 살벌하고 불길한 법정이 오싹해지는 느낌...
그런데도 웃음이 터져 나오는 그 이중적 상황이 확실히 코미디는 코미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