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의 실패
대가야 반파국이 결혼동맹으로 신라와 손을 잡자 창원지역 탁순국 아리사등은 이에 반발하여 왜를 끌어들였다. 임나일본부라고 불리는 안라왜신관이다. 왜를 중재인으로 삼고 함안 안라국의 주도로 백제와 신라가 참여하는 국제회의를 개최했으나 신라가 시큰둥해 하는 바람에 회의는 무산되고 신라장군 이사부가 3천병력을 동원하여 왜와 싸우려 하자 왜는 복지부동에 들어갔다. 왜가 물러가지 않고 가야에 주저앉자 백제에 구원을 요청했는데 백제는 왜를 격퇴해주는 대신 탁순국을 먹으려고 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탁순국은 신라에 투항해 버렸다. 원래 신라를 반대하기 위해 백제와 왜를 끌어들였는데 왜와 백제에 차례대로 털리다가 결국 신라에 항복한 것이다. 멍청하기가 안철수 저리가라다. 이건 하는 짓이 완전 조경태가 아닌가? 이게 손자병법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려고 하니 이렇게 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공짜 좋아하다가 탁순국 된다. 진작에 신라에 붙은 대가야는 가야연맹에서 왕따되고 남은 가야세력은 안라국을 중심으로 뭉쳐 백제에 매달렸다. 흔히 가야연맹이라고 하지만 가야가 연맹의 모습을 띤 것은 이때가 유일하다. 가야는 그냥 독립국 연합인데 내부에서 서로 경쟁하다가 왜를 끌어들이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 왜의 중재노력에 의해 일시적으로 연맹처럼 움직인 것이다. 가야세력은 사비회의에 정성을 쏟았지만 백제왕은 나제동맹을 믿고 오히려 가야 전체를 삼킬 태세였다. 당시 진흥왕은 11살로 나이가 어렸다. 신라왕이 조용하게 찌그러져 있자 백제왕은 신라에게 넘어간 금관국, 탁기탄국, 탁순국 포함 가야연맹의 완전회복을 선언하고 사비회의를 소집했는데 이번에는 가야가 반발했다. 얼떨결에 백제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가야가 이런 저런 핑계로 소집에 응하지 않자 백제는 왜를 압박하여 가야의 믿을 언덕인 안라왜신관의 왜인을 교체하고 굴복시켰다. 이 시기에 가야는 완전히 백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성왕 시기에 백제는 강성해서 가야에 성 여섯 개를 쌓고 신라와 결탁한 왜신관의 왜인들을 축출한 다음 왜군 3천 명을 주둔하게 하고 백제군사를 파견하려 했다. 그러자 안라국은 은밀히 고구려에 붙어 백제를 멸망시켜 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나제동맹으로 백제와 신라가 독산성에서 고구려를 무찌르게 되자 가야가 고구려군을 끌어들인 사실이 들통났다. 이에 백제는 왜를 의심하여 추궁했고 왜군을 가야에서 철수시켰다. 이때 백제는 가야를 접수하고 고구려와 싸우면서 신라군사와 가야군사를 지휘했다. 사실상 3국의 맹주가 된 것이다. 그러나 진흥왕이 나이를 먹고 지소태후의 섭정에서 벗어나면서 사태가 변하기 시작한다. 백제는 지략가였던 성왕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은밀히 신라와 내통하여 백제만 공격하고 있었다. 신라군과 싸우지 않고 한강을 건너 백제 영토를 침략했는데 신라는 한강일대를 차지했으면서도 고구려군의 이동을 방치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신라가 한강유역을 먹자 백제는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고 묵인하려고 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한강유역에 신라군이 주둔하면 고구려와 충돌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백제의 주적은 원래부터 고구려였다. 하나는 결혼동맹으로 신라를 안심시켜 놓고 은밀히 왜군과 가야군을 끌어들여 신라를 통째 먹으려고 손자병법을 구사한 것이다. 이런 손자병법이 성공할 리가 없다. 성왕시기에 백제는 가야를 먹었기 때문에 운이 좋으면 성공할 수 있었다. 문제는 지소태후의 섭정시기가 아니고 진흥왕이 나이를 먹어 금관가야 출신 김무력과 대가야 출신 도설지를 키웠다는 점이다. 가야연맹의 실력자인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일부가 신라에 붙은 상황이다. 원로대신들이 말렸지만 아들 위덕왕이 신라를 치려고 대가야군과 왜군을 동원하여 관산성을 습격했다. 그런데 엉뚱하게 성왕이 위문갔다가 잡혀버렸다. 관산성 전투다. 이 전투를 계기로 성왕시절의 화려한 백제는 사라지고 진흥왕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결론은 실력이 없으면서 외국군대를 동원하여 꼼수로 어떻게 해보려는 술책은 실패한다는 점이다. 물론 아주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나제동맹이 잘 지켜질 때는 백제와 신라가 힘을 합쳤고 가야도 영토를 보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야는 왜를 끌어들여놓고 물러가라고 했으며 백제를 끌어들여놓고 신라에 항복하는 식의 기행을 벌였다. 그러다가 고구려를 끌어들여 백제를 치게 했다. 사비회의에 참가해서 가야연맹의 부활을 선언하게 해놓고 성왕의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얻어낸 다음에는 순식간에 태도를 바꾼 것이다. 당연하다. 백제는 가야를 회복시키는 대신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국제관계는 냉정한 것이다. 잔머리와 배신을 거듭하다가 자멸한다. 모든 재앙은 가야가 왜를 끌어드린 데서 시작되었다. 가야는 안라왜신관을 이용하여 백제를 움직이려 했지만 백제는 왜왕과 직접 교섭하고 있었다. 왜신관의 왜인들이 왜왕의 명령도 거부하고 신라쪽에 붙는 일이 일어나고 엉망이 된 것이다. 위에서 나제동맹으로 결탁하고 있는데 밑에서 이간질을 한 것이다. 백제왕과 왜왕이 직접 교섭하는데 왜신관을 이용해 이간질하는 수법이 먹힐 리가 없다. 약할 때는 사비회의에 우르르 몰려갔지만 어린 신라왕이 즉위하자 소집에 응하지 않는 등의 배신을 때렸다. 결국 나제동맹이 깨지고 가야는 백제와 신라가 반씩 갈라먹었다. 백제는 대가야를 복속시켜 신라를 위협했지만 왕이 늙고 왕위교체기가 되면 약점을 보이는 패턴을 되풀이 했다. 왕자를 일본에 보내는 것은 견제세력을 없애는 수법이다. 눌지왕이 동생들을 고구려와 신라에 보낸 것도 자신이 왕권을 독식하기 위한 것이다. 부족국가에서 전제국가로 가는 과도기였기 때문인데 백제는 말기까지 이런 행보를 보였다. 왕위교체기만 되면 백제는 약해지는 것이다. 가야와 왜를 끌어들일수록 내부는 더 약해진다. 손자병법은 기술을 걸수록 안으로 썩는 구조다. 가야사에 대해서는 잘못 알려져 있는데 나제동맹 시기에 신라가 한강유역을 먹고 백제가 가야를 죄다 먹은 상태였다. 한때는 백제왕이 고구려에 맞서 신라군, 가야군, 왜군을 모두 지휘했다. 맹주 노릇을 한 것이다. 신라도 금관가야, 탁순, 탁기탄, 비화가야를 먹은 상태에서 왕통은 유지하게 했다. 말하자면 식민지 상태로 간접지배를 한 것이다. 고분의 사이즈만 작아졌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장수보다 뒤에서 다른 나라의 군대를 끌어오는 외교가가 더 큰 권력을 가지면 그게 망조가 드는 것이다. 전선에서 싸우는 이순신보다 명나라 군대를 끌어온 선조가 더 공훈이 높다고 우기는 식이다. 싸우지 않고 잔머리로 이기면 반드시 뒷탈이 난다. 압도적인 힘으로 이겨야 진짜 이기는 것이다. 가야는 나제동맹을 모르고 이간질을 하다가 자멸한 것이다. |
"싸우지 않고 잔머리로 이기면 반드시 뒷탈이 난다. 압도적인 힘으로 이겨야 진짜 이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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