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다윈을 넘어설 때 ‘이보디보’라는 책이 있는 모양이다.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만 장대익 교수가 이 책을 가지고 이것저것 좋은 말을 많이 했다는데. 요즘 유명한가 보다. 알만한 사람은 알겠고. 대칭이 어떻고 모듈이 어떻고 이런 단어를 쓰는 점에서 구조론적이다. 모듈진화에 대해서는 필자가 십 년쯤 전에 말한 바 있다. 내 이야기는 이렇다. 당시 사람들은 진화에 대한 개념을 상당히 가지고 있었다. 다만 용감하게 나서지 못한 것이다. 서구의 브리더들은 개를 교잡시켜 날로 신품종 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농부들은 날로 새로운 종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느님이 하는 창조의 일을 농부가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자연발생설이 있었다. 밀가루를 헝겊으로 덮어놓으면 쥐가 발생한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습생이라는 말이 있었다. 난생과 태생과 습생이 있는 것이다. 농부도 헝겊도 생명을 창조하는 마당에 자연이 종을 창조하지 못할까? 말이 돼? 저절로 생겨나기도 하는게 생명인데. 사실이지 진화론과 유사한 생각은 동양에도 있고 인도에도 있고 그리스에도 있었을 거다. 다만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슬쩍 언급하고 있을 뿐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사람이 다윈 외에는 없었던 것이다. 하여간 이 정도는 나무위키에도 나온다. 그렇다면 왜? 왜 더 일찍 진화론이 나오지 않았을까? 한마디로 엄두가 안 나서다. 진화가 대단한 생각인 것이 아니라 이게 사실은 방대한 작업인 것이다. 구조론도 그렇다. 사물을 해명하는 수학이 있는데 사건을 해명하는 수학은 왜 없지? 초딩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방대한 작업이다. 엄청난 작업량 앞에서 기가 죽는 것이다. 그러나 도구가 있으면 간단하다. 진화는 사실 매우 간단한 트릭이다. 이보디보에 의하면 또는 장대익 교수에 의하면 다윈은 인간의 눈동자가 진화하려면 40여 개 정도의 단계가 필요하다고 내다봤다고 한다. 로또 40방을 연속으로 맞아야 한다고? 어렵잖아. 그런데 몰라서 그러는 것이고 사실은 간단하다. 복잡한 조각도 도구가 있으면 간단히 할 수 있다. 뭐든 도구가 없어 못하는 것이다. 진화의 도구는 유전자다. 사실 진화는 유전자에서 시작해서 유전자로 끝난다. 진화의 핵심은 유전자다. 장대익 교수도 이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 다윈은 맬서스의 인구론에 영향받았다고 한다. 거기서 생존경쟁과 자연선택 개념을 배운 것이다. 개소리다. 사실 다윈은 진화의 개념을 제시했을 뿐 본질에 근접하지 못했다. 진화의 본질은 유전자 하나다. 자연선택은 위하여지 의하여가 아니다. 유전자 하나로 이야기를 끝내자. 지구상에 최초의 유전자가 던져졌을 때 현생인류까지는 기계적으로 예정된 것이다. 주사위가 있으면 누가 그 주사위를 던진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 주사위는 던져진다. 에너지가 전달되면 어떻게든 주사위는 던져지는 것이다. 단 환경이 변수다. 주사위 눈은 여섯이다. 환경이 복잡하면 그만큼 주사위 눈이 늘어나는 셈이다. 좋은 조합을 얻어낼 수 있다. 유전자는 환경을 복제한다. 외부환경을 내부구조로 복제한다. 그것이 진화다. 문제는 마이너스법이다. 일단 유전자는 대량으로 복제한다. 던지는 주사위 숫자를 늘려서 더 많은 눈을 얻는다. 주사위 두 개를 동시에 던지면 더 많은 눈을 얻는다. 처음에는 량으로 조지는 것이다. 일단 주사위를 매우 던져본다. 뭔가 유의미한 게 하나 걸릴 때까지 일단 복제하고 보는 것이다. 그다음은 하나씩 제거한다. 중요한 진화는 그 제거과정에서 일어난다. 인간의 Y염색체는 몇 개 남지 않았다. 너무 제거되었다. 처음에는 대칭법을 쓴다. 삼엽충은 좌우대칭이 된다. 다음은 모듈법을 쓴다. 또 하나가 더 있다는데 아마 극성일 것이다. 암수구분이 있듯이 생명에 극성을 부여한다. 이렇게 해서 우연히 하나 좋은 것을 얻어걸릴 확률을 높인 다음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는 과정에 유의미한 진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진화는 나아지는 과정이 아니라 사실은 기회가 사라지는 과정이다. 이러한 본질을 보지 못하면 헛다리 짚게 된다. 우리는 여전히 다윈수준에 머물러 있다. 다윈은 옳지만 논리는 틀렸다. 생존경쟁이니 자연선택이니 하는 개소리들은 버려야 한다. 진화? 그냥 유전자가 환경을 복제한다. 환경의 변화 총량만큼 종은 진화한다. 환경이 단순하면 종은 진화하지 않는다. 종이 환경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진화는 환경의 총량에 맞추어 로그곡선을 그리며 환경변화 시점에 가속하다가 완만해진다. 결론은? 인간이 진화 앞에서 당황하는 것은 너무 복잡해서 엄두가 안 나기 때문이다. 다윈도 이 점을 고민했다고 한다. 눈동자를 만들려면 40단계를 돌파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해? 장대익 교수가 소개하는 이모디보는 그게 쉽다고 쓴 것일 게다. 필자는 유전자라는 도구가 있으면 쉽다고 말하고 있다. 다른 모든 분야도 마찬가지다. 도구가 없어 인간이 약한 것이다. 그 도구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작금의 정치판을 보라. 이놈 저놈 목청 높여 꾸짖을 뿐 누구도 도구를 만들려 하지 않는다. 진중권 노는 꼬라지 보라지. 네 이놈 조국아! 하고 호통치고 있다. 조국의 희생이 장차 신뢰를 만들어가는 밀알이 된다는 생각을 못한다. 진보는 올바른 판단. 높은 품성, 타당한 이론이 아니라 오직 획기적인 도구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법이다. 그 도구는 엘리트와 민중을 묶는 신뢰의 고리다. 그 신뢰를 깨는 순간 모두 깨지는 것이다. 그때 그 시절 노무현이 홀로 나선 것은 그 순간이 민중과 엘리트가 결별하는 위태로운 순간이었다는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모른다. 민중이 엘리트를 적대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삼당야합을 하든 뭐를 하든 민중은 지역감정 조장과 빨갱이 놀음으로 적당히 만져주면 어쩔 줄 모르고 개처럼 졸졸 따라온다고 믿는다. 천만에. 민중은 바보가 아니다. 엘리트의 목줄을 쥐려고 한다. 엘리트가 고개를 뒤로 빼고 목줄을 잡히지 않으려 할 때 노무현이 홀로 고개를 숙이고 스스로 자기 목에 방울을 달고 개의 목줄을 채우고 말의 재갈을 물렸다. 민중이 엘리트를 통제할 수 있는 도구가 확보된 것이고 그것이 촛불로 발전한 것이다. 세상 뭐든 다 그렇다. 유태인은 왜 잘하지? 노력해서? 머리가 좋아서? 민족성이 어때서? 천만에. 그들에게는 특별한 도구가 있다. 탈무드와 시나고그와 관습의 삼위일체다. 교리는 중요한 게 아니다. 유태인은 흩어졌고 이교도 사이에 고립된다. 그러므로 유태인은 유태인 공동체에 의해 강하게 결박당해 있으며 따라서 통제되는 것이다. 그들은 유태인을 하나로 묶어내는 도구가 있다. 일본인은 이웃을 맹렬하게 감시한다. 일본에서 가난하다고 비싼 책가방을 못 사주면 책망을 당한다고. 초딩들은 명품 책가방을 매고 등교해야 한다. 한국인이라면 그런 이웃의 눈길을 무시할 텐데. 그런데 그것이 일본발전의 동력이 된다. 도구가 있다. 마쓰리 등으로 팀플레이를 매우 훈련하고 있다. 독일인은 더 적극적으로 이웃을 감시한다고 한다. 정유라가 독일에서 딱 걸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어느 나라든 그런 무형의 도구가 있다. 그게 하루 이틀에 되는 게 아니다. 백 년이 걸리더라도 그것을 만들어내겠다는 것이 노무현 정신이다. 구조론도 같다. 누구든 비슷한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그런데 엄두가 안 나서 안 한 것이다. 동양인도 기하학을 조금 접하긴 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구고법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유클리드 원론을 안 배웠다. 그걸 안 배우면 워낙 엄두가 안 나서 갈피를 못 잡고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갈피라는 것은 갈림길에서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갈피를 잡아줘야 한다. 그것은 간단한 규칙이다. 앞의 증명을 통해서 다음 증명을 한다는 게 유클리드다. 후건이 전건을 칠 수 없다는 게 구조론이다. 다음 규칙은 이전 규칙에 제한된다는 규칙이다. 이 하나의 근본을 알면 우리는 사건을 해명할 수 있다. 진화를 넉넉히 해명할 수 있다. 목수가 오전 내내 연장을 벼르더니 오후에 집을 한 채 뚝딱 지어놓더라고 했다. 유전자라는 도구만 알면 진화는 한 방에 풀린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트릭이다. 마술사의 현란한 손놀림을 보고 기죽을 필요는 없다. 속이는 것은 마술사의 손이 아니라 당신의 눈이다. 마술사가 이쪽을 보라고 할 때 저쪽을 보면 속지 않는다. 마술사가 막대기로 컵을 툭 치면 여러분의 눈은 마술사의 막대기를 바라보게 된다. 그런데 그 막대기는 왜 들고 있지? 손에 쥔 호두를 감추기 위해 눈길을 다른 쪽으로 유도하는 장치다. 현란한 손동작 필요 없고 그 막대기에 홀리지 않으면 된다. 손에 쥔 막대기라는 간단한 도구 하나가 마술사의 실력을 매우 점프시켜 주는 것이다. 진화의 도구는 유전자다. 유전자만 알면 된다. 구조론도 도구다. 도구가 있어야 뭐든 풀리는 것이다. 노무현을 시비하는 자들은 그의 품성을 물고 늘어진다. 막말을 했다며? 가방을 찢었다며? 유치하다. 품성은 하인에게 존대하는 안철수가 높다. 가짜다. 올바른 노선 필요없고, 합리적인 판단 필요없고, 탁월한 이론 필요없고, 높은 품성 필요없고, 정신력, 의지, 노력 그딴거 다 필요없다. 개나 줘라. 오로지 도구가 필요하며 그 도구를 만드는 데는 짧으면 30년 걸리고 길면 3백 년 걸린다. 축구로 말하면 포메이션과 같은 것이다. 박항서가 베트남 축구를 지도해도 그 포메이션을 제대로 이해하는 선수가 공격수에 3명, 수비수에 1명으로 단 네 명밖에 없다고 한다. 그게 원래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정답이다. 포메이션이 답이다. 포메이션만 완성하면 베트남처럼 단번에 강력해진다. 우리는 정당과 후보와 지자체와 유권자 간에 철통같은 포메이션을 완성해야 한다. 우리편은 허물이 있어도 서로 감싸주는 의리플레이를 하자. 공지영같이 마구 날뛰면 좋다가도 좋지 않다. 부족민의 화물교가 이해를 도울 수 있다. Cargo Cult라고 한다. 백인들이 가진 통조림과 의류를 비롯한 각종 화물은 공장에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내려주시는 선물이라고 믿는다. 인간이 그토록 놀라운 물건을 생산할 수 없다는 식이다. 창조론자들은 화물교신도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다윈이 그 한계를 넘으려는 시도를 했지만 메커니즘을 이해한 것은 아니다. 장대익 교수도 모른다. 도구가 있으면 매우 간단하다는 사실을. 사물로 보면 복잡하지만 사건으로 보면 간단하다. |
"오로지 도구가 필요하며 그 도구를 만드는 데는 짧으면 30년 걸리고 길면 3백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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