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과 스펜서 검색해보니 많은 사람이 다윈을 위해 변명하고 있더라. 빌어먹을 인종주의자 스펜서가 먼저 적자선택을 주장했고 다윈이 종의 기원으로 뜨는 바람에 스펜서도 덩달아 유명해져서 대중이 두 사람의 주장이 같은 것이라고 착각했을 뿐 사실은 조금 다르다는 해명이 많다. 부질없는 노릇이다. 레토릭이 어떻든 본질에서 같으면 같은 것이다. 둘의 차이는 미세하다. 마르크스도 니체도 무죄다. 아인슈타인도 중국인은 열등하다고 비난한 적이 있지만 그것을 문제 삼는다면 이상하다. 과학자는 보고할 뿐이며 그것을 악용하거나 잘못 적용한 정치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정치인은 과학의 성과를 다듬을 의무가 있다. 그것이 정치의 다스림이기 때문이다. 과학의 성과는 모난 것이고 정치의 바루기는 그것을 재가공하는 것이다. 공자는 바른말을 했지만 그것을 이용해먹은 역대 중국의 황제는 잘못을 저질렀다. 다윈의 생존투쟁이든 스펜서의 생존경쟁이든 같은 것이며 그 사람들의 견해가 아니라 그 시대의 견해다. 그들은 문명의 이기로 무장하고 부족민을 만났다. 그들은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혀 미개한 부족민을 개화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19세기의 맨얼굴이 그렇다. 인종주의 시대다. 다윈의 저서에서 자구를 낱낱이 대조하며 인종주의자가 아니라는 식의 변명을 한다면 유치하다. 공자가 남성우월주의자라는 식의 주장만큼이나 황당한 것이다. 여성의 출가를 허용한 석가는 양성평등주의자였을까? 이런 논의는 유치한 것이다. 석가가 여성의 출가를 받아들인 것은 마하프라자파티가 요구했기 때문이다. 요구하지 않았으면 없던 일로 되었을 거다. 이슬람교도 원래는 평등했다. 메카에는 여자 시장도 있었다. 그런데 점차 남성들이 여성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그게 먹혔기 때문이다. 남자가 더 힘이 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왜 평등했을까? 여자에게는 오빠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개인 대 개인으로 대결한다. 여자 대 남자로 일대일로 붙으면 여자가 오빠와 아빠의 도움으로 이길 확률이 반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여자집단 대 남자집단의 대결로 가며 이 경우는 남자가 이긴다. 쪽수가 많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는 점점 여성억압으로 변했다. 남자들끼리 모여 있으면 그렇게 합의하기가 쉽다. 왜 기독교는 여자 사제가 없을까? 그냥 그렇게 된 것이다. 예수에게 여자 제자가 여럿 있었다면 달라졌을 것이다.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다 여성 제자가 없었다. 왜 여성 제자를 키우지 않느냐고 따지면 안 된다. 그 시대의 수준이 그랬기 때문이다. 구조론으로는 마이너스다. 뭐든 나빠진다. 처음에는 개인의 판단을 따르지만 시간이 갈수록 패거리의 대결로 간다. 다윈이든 스펜서든 그 시대의 산물이다. 우리가 그들을 변명해줄 이유는 없다. 19세기를 변명할 이유가 없다. 니체는 괜찮았는데 여동생이 잘못해서 나치가 되었다? 니체의 잘못도 아니고 여동생의 잘못도 아니고 당시 독일의 수준이 그랬다. 사상은 시대를 반영할 뿐이다. 개인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되고 개인을 위해 변명해줄 이유도 없다. 20세기 중반까지 인종주의 열풍이 지구촌을 강타한 것은 사실이다. 그 문명의 수준이 낮았기 때문이다. 그 프레임을 뒤집어엎은 사람이 마르크스다. 강자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고? 천만에. 약자가 뭉치면 더 강하다. 20세기는 혁명의 세기였다. 혁명의 주체는 민중이다. 강자의 힘에 주목하던 인류가 약자의 힘에 주목하여 균형을 맞추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에 의해 인류는 시각교정을 하게 되었다. 인정해야 한다. 강자에게는 물리력이 있지만 약자에게는 심리적 힘이 있다. 분노가 있고 투쟁심이 있다. 변방에서 중심을 치는 것이 역사의 정해진 패턴이다. 인종주의 19세기나 혁명의 20세기나 모두 한때의 지나간 광풍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에너지는 사회에서 나온다. 사회의 의사결정구조를 잘 디자인한 나라가 이긴다. 이것이 스펜서와 마르크스를 변증법적으로 극복하는 구조론의 결론이다. 다윈의 오류는 격리설과 경쟁설이 모순된다는 데 있다. 두 논리는 서로 상충된다. 메기이론과 역메기이론이 되겠다. 핀치새의 부리가 다양한 것은 갈라파고스섬이 격리되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메기가 없었다. 포식자가 없었다. 메기가 있으면 스트레스를 받아 진화가 중단된다. 즉, 종은 격리에 의해 진화하며 이는 경쟁이 아니라 반경쟁 곧 경쟁의 부재에 의해 진화한다는 의미다. 경쟁하면 망한다. 현생인류가 진화한 것은 빙하가 후퇴하면서 광대한 무주지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경쟁이 치열하면 돌연변이든 개체변이든 열성인자이므로 소멸되고 만다. 칼라하리 사막의 산족은 5만 년 전 인류의 모습 그대로다. 경쟁 때문이다. 경쟁은 진화의 차단장치다. 너무 빨리 진화하면 안 된다. 격리에 의해 보호되면 열성인자가 살아남고 그래서 진화하는 것이며 경쟁하면 진화한 열성인자는 도태된다. 다양한 핀치새는 죽고 하나의 부리만 살아남는다. 경쟁은 진화의 촉매제가 아니라 반대로 진화가 너무 빨리 일어나지 않도록 속도를 조절하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이다. 경쟁이 진화의 한 가지 요소인 것은 분명하다. 지구는 좁으므로 대진화를 촉발하려면 다양성을 감소시켜야 한다. 진화를 촉발하는 것은 환경변화이고 환경변화는 대멸종을 낳고 대멸종은 경쟁을 감소시킨다. 경쟁할 대상이 다 죽었을 때 진화한다. 대멸종이 대진화를 부른다. 인류는 한때 아프리카에서 1천 개체 이하로 줄어들었다. 멸종직전이다. 경쟁자가 없어진 상태에서 환경이 양호해졌다. 당연히 죽어야 할 열성인자들이 살아남아 크게 진화한 것이다. 인간의 체력은 침팬지나 오랑우탄보다 못하다. 정글에 던져놓으면 살아날 가망이 없다. 진화하려면 멸종직전까지 몰려야 한다. 죽거나 혹은 진화하거나다. 승리자들은 진화하지 않는다. 21세기에 한중일이 뜨는 이유는 19세기에 패배했기 때문이다. 메기효과와 역메기효과가 있다. 메기효과가 경쟁이라면 역메기효과는 경쟁의 부재다. 최근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개의 인간대비 나이 산출법이 바뀌었는데 과거에 곱하기 7을 했던 것과 달리 지금은 개의 한 살이 인간의 31살에 해당되고 개의 두 살이 41에 해당된다고 한다. 개가 1살이면 인간 나이로 7살인 것이 아니라 이미 서른한 살을 먹은 성인이라는 것이다. 사실 개는 1년만 지나도 출산을 할 수 있는 성인이다. 인간은 천천히 자란다. 어린 시절에 경쟁에 노출되지 않는다. 그러나 피그미는 9살이면 출산을 한다. 너무 일찍 경쟁에 노출된다. 부족민은 열 살이면 집에서 쫓아낸다. 11살이면 어른대접을 받는다. 조선시대라도 마찬가지. 열여섯이면 몽룡과 춘향이 연애하던 나이다. 지금은 서른 살이 넘어야 결혼할까 생각하는 지경이다. 경쟁은 있어야 하지만 중간단계다. 어린이와 노인은 보호받아야 한다. 모든 인간은 출발선과 결승선에서 평등해야 한다. 모든 어린이는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하며 모든 노인은 최소한의 보장을 받아야 한다. 그 중간은 각자 알아서 해야 한다. 청년은 경쟁해야 한다. 인간의 일생은 보호>경쟁>보호의 패턴이어야 한다. 보호만 하면 이상하게 진화하는 수가 있다. 갈라파고스 효과다. 다양성을 얻는 대신 약해진다. 경쟁만 하면 획일화된다. 아예 진화를 못 한다. 다양성은 좋은 게 아니다. 다양한 것을 경쟁시켰을 때 승리한 하나가 좋은 것이다. 경쟁하면 다양성이 사라지고 보호하면 열화한다. 다양하되 뭔가 나빠진다. 건강부터 잃는다. 질병을 달고 사는 사람이 사실은 진화한 거다. 현대인은 좋은 유전자를 잃어서 환경변화에 취약하다. 진화하면서 강해지려면 보호와 경쟁을 되풀이해야 한다. 다양한 실험을 하되 그중에서 건강한 것만 추려내는 것이다. 다양할수록 건강하지 않다. 진보는 다양성과 보호주의를 강조하고 보수는 경쟁만능과 획일성을 추구한다. 둘 다 틀렸고 선보호 후경쟁이 맞다. 보호 > 경쟁 > 보호로 가야 한다. 조세희의 난쏘공을 떠올려도 좋다. 굴뚝 청소부 두 사람이 굴뚝을 청소하고 나왔다. 다윈 청소부의 얼굴은 검댕이 묻지 않아 하얗고 스펜서 청소부의 얼굴은 검댕이 묻어 까맸다. 누가 먼저 세수하러 갔을까? 의미 없다. 그 인종주의 굴뚝 속에서 오십보백보다. 그 시대가 그런 시대였다. 19세기에 그 누구라도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
" 진보는 다양성과 보호주의를 강조하고 보수는 경쟁만능과 획일성을 추구한다. 둘다 틀렸고 선보호 후경쟁이 맞다. 보호 > 경쟁 > 보호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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