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구조론을 한 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정치학은 정치를 설명하고, 경제학은 경제를 설명한다. 즉 대상이 있다. 그 대상의 반대편에 주체가 있다. 우리가 아는 모든 학문은 어떤 탐구대상에 대한 것이다. 탐구주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먼저 그것이 있고 다음 그것을 학문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존재할까? 주체의 맞은 편에 대상이 존재할까? '나잡아봐라' 하고 버티고 있을까? 아니다. 소금이 짜다면 그것은 대상인 소금의 사정이 아니라 주체인 혀의 사정이다. 색이 붉은 것은 과일의 사정이 아니라 눈동자의 사정이다. 색맹에게는 잘 익은 사과도 전혀 붉지 않다. 구조론은 구조에 대한 과학이다. 구조론의 탐구대상은 구조다. 그런데 구조는 대상의 존재를 부정한다. 구조는 관측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관측자의 문제다. 주체의 문제다.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본다. 왜 눈으로 보지? 구조로 보지 않고? 구조는 관측자 맞은 편의 관측대상을 부정한다.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있다. 그것은 물질이다. 혹은 원자나 소립자나 양자다. 혹은 암흑물질이거나 암흑에너지다. 그것이 뭐든 먼저 그것이 있고 다음 그것이 나타난다. 여기서 본질과 현상으로 갈린다. 있는 것이 본질이고 나타나는 것은 현상이다. 여기서부터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먼가 수습이 안 되고 있다. 본질이 있고 또 현상이 있다면? 질료가 있고 또 형상이 있다면? 이상이 있고 또 현실이 있다면? 이성이 있고 추가로 감성이 있다면? 이데아가 있고 또 만물이 있다면? 이理가 있고 또 기氣가 있다면? 골치가 아파지는 것이다. 무언가 관측대상이 있다면 반드시 그것은 현실에서 둘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존재의 딜렘마다. 신이 있고 또 사탄이 있다면? 선이 있고 또 별도로 악이 존재하여 있다면? 빛이 있고 별도로 어둠이 있다면? 위화감을 느끼게 된다. 이쯤에서 오컴의 면도날로 한 번 밀어줘야 하지 않을까? 뭔가 수렁에 빠진게 아닌가? 사람들은 본질타령 좋아한다. 근원의 하나를 찾으려고 한다. 둘이 되면 이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근원의 하나를 찾기만 하면 반드시 새끼를 친다. 인간이 본질을 추구하는 것은 그 둘의 상대성이 번거롭기 때문인데 이를 해결하려고 하면 더 번거로워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이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관측자와 관측대상으로 나누어지는 순간 잘못되고 만다. 눈은 정지한 사물을 보는 것이다. 정지시켜 보고 분리시켜 보므로 잘못되고 마는 것이다. 존재는 연속적인 시공간의 흐름인데 칼로 쪼개서 보니 왜곡되고 마는 것이다. 눈으로 보지 말고 구조로 보면 그 둘은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으로 통합된다. 메커니즘으로 환원된다. 어떤 것이 있고 그것이 어떤 계기로 움직이는게 아니라 반대로 움직이는 것이 있는 것이다. 먼저 깃발이 있고 바람을 만나 펄럭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펄럭이는 그것이 바로 깃발이다. 바람이 있고 그것이 어떤 계기로 부는 것이 아니라 부는 그것이 바람이다. 정이 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동이 교착되면 정이다. 물질이 있고 그것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 특정한 형태로 꼬이면 물질이라 부른다. 본질이 현상으로 나타나는게 아니라 현상이 본질이다. 구조론은 세상을 구조로 보는 관점이다. 구조로 본다는 것은 관측대상을 부정하고 자체 메커니즘으로 설명한다는 의미다. 세상은 어떤 그 무엇의 집합이 아니다. 무엇도 아니다. 무엇이라고 지목하면 안 된다. 지목되는 것은 모두 관측자가 있고 관측자와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왜곡된다. 빛은 있어도 어둠은 없다. 광자는 있어도 암자는 없다. 빛은 입자가 있지만 어둠은 입자가 없다. 어둠은 관측자인 인간과의 관계가 만들어낸 허상이다. 빛은 입자가 있으므로 대상에 작용하여 통제할 수 있지만 어둠은 입자가 없으므로 통제할 수가 없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선은 있어도 악은 없다. 선은 인간의 사회성을 반영하므로 실체가 존재하며 악은 그 선의 실패이므로 실체가 없다. 선은 절대로 선이나 악은 때때로 악이다. 머리는 절대로 존재하지만 꼬리는 머리가 움직일 때 순간적으로 도출되는 것이다. 머리는 항상 있고 꼬리는 움직일 때만 있는 거다. 진보는 항상 존재하며 보수는 진보가 실패할때만 성립한다. 구조론은 세상에 대한 어떤 견해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그 자체에 대한 견해다. 눈으로 보니 섬이 보이더라는 견해가 아니라 왜 눈으로 보냐 망원경으로 보자는 거다. 세상을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의 시정을 주문한다. 구조론은 추상이다. 세상을 보되 구체적인 대상으로 지목하여 바라보면 안 된다. 관측의 상대성 때문이다. 추상적인 관계로 봐야 한다. 추상은 내재적인 메커니즘으로 보는 것이다. 산을 보되 인간과의 관계로 보면 안 되고 강과의 관계로 설명해야 한다. 산이 높다는 것은 인간 입장이다. 산과 강은 세트로 존재하며 거기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 바람은 깃발을 펄럭이므로 바람인 것이 아니라 고기압과 저기압의 메커니즘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과일은 달콤하기 때문에 과일인 것이 아니라 씨앗을 퍼뜨리는 메커니즘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자체 메커니즘이 있다. 세상을 어떤 A나 혹은 B로 설명하면 안 된다. 그 A나 B가 플라톤의 이데아든, 신의 창조이든, 노자의 도든, 김용옥의 몸이든, 샤르트르의 실존이든, 원자든, 양자든, 소립자든, 암흑물질이든, 암흑에너지든 다 안 된다. 당신이 세상을 무엇으로 보든 잘못된 것이다. 그 무엇이 있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A면 B다' 하는 관계로 봐야 한다. 구조로 보고, 메커니즘으로 보고, 시스템으로 봐야 한다. 답은 의사결정구조에 있다.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그것이 있다. 그것은 동이며 인간에 의해 가리켜 지목될 수 없는 것이다. 바람은 지목된다. 불다는 지목되지 않는다. 부는 것이 바람이다. 바람이 분다는 것은 대류에 의해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기체가 이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이 아니라 동이다. 그것은 시공간의 변화를 반영하므로 지목될 수 없다. 인간이 그것을 지목하는 순간 그 지점을 떠나버린다. 그것은 어떤 사건의 시공간적인 절차, 과정, 프로세스로만 존재한다. 그것은 외적인 관계이며 그것을 계에 가두면 내적인 구조다. 소금은 짜다. 그 짠 성질은 소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과 소금의 만남에 있다. 존재는 곧 만남이다. 만남은 순간에 성립하고 곧 사라진다. 그러나 계에 가두어 시스템화 하면 반복하여 만난다. A면 B다 곧 어떤 만남의 조건에 따라 계에 가두어져 반복적으로 만남이 성립할 때 우리는 그것을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 안에서 진정한 것은 만남 뿐이며 그것이 의사결정구조다. 계에 에너지가 지속적으로 공급되고 사건이 반복적으로 연출될 때 그곳에 존재가 있다. 반면 어떤 대상을 지목하면 곧 산과 강이 분리되고, 여자와 남자가 헤어지고, 소금이 짜지 않고, 설탕이 달지 않고, 눈으로 보니 색맹이고, 귀로 들으니 막귀고, 금이 왕수에 녹고, 다이아몬드가 불에 타고, 형광등 백개의 아우라가 알고보니 백치였고, 변하지 않는 본질이란 사라지고 없다. 이에 현상이라는 말로 뒤를 받쳐서 수습하려고 하지만 이미 산만해졌다. 본질은 그대로이나 현상이 처참하다고 변명하지만 구질구질해졌다. 오컴의 면도날로 밀어야 한다. 인간에 의해 가리켜 지목되는 것은 모두 둘로 쪼개지고 왜곡된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의 프로세스 하나 뿐이다. |
"구조론은 세상에 대한 어떤 견해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그 자체에 대한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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