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마이너스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것은 플러스다. 마이너스는 사건의 원인측이고 플러스는 결과측이다. 우리는 결과를 원하지만 세상은 원인에 의해 통제된다. 여기에 구조의 모순이 있고 인간의 딜레마가 있다. 옷을 벗는 것이 마이너스라면 옷을 입는 것은 플러스다. 옷을 벗기는 쉽고 옷을 입기는 어렵다. 세상은 옷을 벗는 형태로 작동한다. 그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인간은 옷을 입는 형태로 진보한다. 특별한 수단이 사용된다.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벗을 것을 벗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의 자연스러움을 따라야 하지만 문명은 반대방향으로 발전한다. 옷을 입어야 살 수 있다. 여기에 모순이 있고 딜레마가 있다. 사람들은 프레임에 의존한다. 진보든 보수든 어느 한쪽 기준에 맞추고 외골수로 밀어붙이는 게 편하다. 그러다가 죽는다. 힘들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원인측과 결과측, 진보측과 보수측,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동시에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는 특별한 기술이 사용된다. 뚜껑을 덮으면 된다. 몰아서 한 방향으로 통제가 된다. 상부구조를 건설하면 된다. 무엇인가? 표면의 문제다. 인간의 눈코귀입 손발과 머리가 모두 표면에 있다. 덮이면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은 털을 잃은 대신 피부의 표면을 얻었다. 추워서 좁은 동굴에 옹기종기 모여 있으니 체온을 나누고 정이 두터워져서 대부족이 출현하여 자연을 압도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의사결정 하나로 환원될 수 있다. 의사결정은 사물의 표면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되도록 많은 표면을 확보해야 한다. 식물은 침엽수보다 활엽수가 더 많은 표면을 확보한다. 동물은 갑각류보다 척추동물이 더 많은 표면을 확보한다. 문제는 표면의 노출이다. 척추동물은 표면을 차곡차곡 접어서 안으로 말아 넣었다. 두루마리와 같다. 이때 잘 접어야 한다. 잘못 접으면 짓눌려서 표면의 의미가 없어진다. 압착되어 붙어버리면 표면을 잃게 된다. 면과 입체 사이에 존재가 있다. 구조는 둘의 관계를 내면화한 것이다. 의사결정은 표면에서 일어난다. 그것을 안으로 집어넣는 것이 진보다. 겉씨식물과 속씨식물의 문제는 입체로 완전히 내부를 감쌌을 때 회로를 어떻게 연결하느냐 하는 문제다. 예컨대 TV의 회로기판은 평면이지 입체가 아니다. 입체가 되면 몸의 성장에 따라 라인을 새로 깔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 뇌도 동일한 딜레마를 겪는다. 뇌의 해법은 대뇌의 주름을 이용해서 표면적을 최대한 늘리는 것이다. 뇌는 공과 같은 입체꼴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두루마리다. 그렇다면 뇌의 일부가 사라졌을 때 오히려 새로 획득된 표면을 따라 새로 라인을 깔기가 쉬워진다. 그러므로 진화는 플러스가 아닌 마이너스 형태로 일어난다. 그렇다면 플러스는 전혀 없는가? 그건 아니다. 대진화는 플러스에 의해 일어나고 소진화는 마이너스로 일어난다. 그러나 플러스는 역시 상부구조의 마이너스에 의해 일어나므로 전체적으로 진화는 언제나 마이너스로 일어난다. 즉 유전자는 무한복제에 의해 플러스가 되고 그때부터 하나씩 제거하면서 라인을 깔게 되는 것이다. 진화했다는 것은 새로 라인을 깔았다는 건데 산에 터널을 뚫어서 도로를 깔고 재개발을 해도 철거반이 밑작업을 한다. 구조는 어떤 둘의 접점이며 접점은 표면에 노출되어 있어야 하며 라인은 표면을 따라 깔아야 하는 것이며 표면에 노출되면 취약해져서 환경변화나 외부작용에 망한다. 뚜껑을 덮어서 내부로 보내는 게 진화인데 딜레마다. 내부로 밀어 넣으면 새로 라인을 깔 수 없다. 성장하지 못한다. 게는 살이 안에 있다. 정기적으로 허물을 벗어야 한다. 갑자기 몸이 커지는데 이때 취약하다. 물렁게가 되기 때문이다. 살이 단단해지기까지 활동을 못한다. 아날로그 관계를 디지털 구조로 바꾸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여러 가지 구조적 모순을 낳기 때문에 각종 꼼수를 쓰게 되는데 뇌의 주름도 그렇게 만들어진 꼼수 중의 하나이고 위장의 융털이나 구불구불한 소장과 같다. 표면적을 최대화해보자는 노력의 결과다. 인체는 체적이 아닌 표면으로 되어 있다. 좋은 구조는 외부에 위태롭게 노출되지 않으면서도 표면적을 최대화하는 구조다. 두 논리는 모순되므로 꼼수가 아니고는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의 뇌는 여전히 자원을 최적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뇌의 주름은 어설픈 꼼수이고 표면을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라인을 개설하는 방법이 없다. 반도체라도 표면을 확보하고 다시 이를 층으로 쌓는 식으로 한다. 층과 층을 연결하는 부분은 여전히 여러 가지 구조적 난점을 발생시킨다. 건축이라도 수직과 수평이 만나는 부분이 위태롭다. 아치와 돔 구조를 쓰기도 하고 한옥이라면 트리모양으로 공포를 짜기도 한다. 다포식 건축이다. 생물의 진화는 표면을 넓혀온 역사다. 사회의 진보도 표면을 넓혀온 역사다. 단층보다 이층이 더 많은 표면을 가진다. 그런데 계단은 위태롭다. 엘리베이터는 비효율적이다. 고층건물은 반이 엘리베이터 공간으로 낭비된다. 정당이라도 더 많은 표면을 가진 정당이 승리한다. 평면적인 구조보다 입체적인 구조가 더 많은 표면을 가진다. 전제군주제나 공산주의는 표면을 늘리지 못해서 망했다. 의사결정이 일어나는 외부와의 연결지점이 절대로 적다. 세상이 마이너스에 의해 작동하는 이유는 무언가 플러스할 때 그 외부와의 접촉면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표면이 손실된다. 국가라도 항구가 없는 나라는 표면을 손실한 것이다. 중국이 영토를 늘릴수록 표면은 사라진다. 14억 인구에 비하면 표면이 없다. 정리하자. 표면을 늘리는 게 진보다. 표면을 늘릴 수 없다. 꼼수로 표면을 늘리지만 위태롭다. 마이너스를 하면 표면이 증가한다. 통제된다. 플러스를 하면 표면을 손실하여 통제되지 않는다. |
"표면을 늘리는 게 진보다. 표면을 늘릴 수 없다. 꼼수로 표면을 늘리지만 위태롭다. 마이너스를 하면 표면이 증가한다. 통제된다."
- http://gujoron.com/xe/11428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