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날 생각있는 사람들이 이 덜떨어진 시대착오적 계몽주의 영화를 보게 된다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인종차별에 반대한다면서 열심히 인종차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 또한 백인이 앞장서서 흑인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헐리우드의 나쁜 클리셰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에서 실제인물인 마이클 오어는 이 영화를 평생 불쾌해 했다.
부유한 보수주의자 백인 여성이 불쌍한 흑인을 구제했다는 아름다운 인생극장이지만
그 구제된 흑인 운동선수에게 그 영화는 치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영화가 만들어진 시점 기준으로 이 영화는 진보다.
그런데 말이다.
이 영화는 더러운 인종차별 그 자체다.
워낙 똥에서 썩은 거름 정도로 진보했지만
그럭저럭 흙이 되지는 못했고
더욱 옥이나 보석이 될 가능성은 없다.
미안하지만 정의는 없다.
그것은 원래 없는 것이다.
부단한 투쟁이 있을 뿐이다.
정의는 누가 의사결정을 하는가다.
공평한 대접을 한다는 말이 존재하는 한 정의는 없다.
진정한 정의는 공평한 대접이 아니라 주체적인 의사결정이다.
차별받든 우대받든 행복하든 불행하든 중요하지 않다.
인생의 정답은 치열함이며 성공이든 실패든 행복이든 불행이든 과정에 용해된다.
흔적없이 사라진다.
화장실이 하나든 둘이든 중요하지 않다.
누가 결정했는지가 중요하다.
흑인과 백인 사이의 정의는 절대로 없다.
이 싸움은 계급싸움도 신분싸움도 빈부싸움도 피부색싸움도 종교싸움도 아니다.
보편과 특수의 싸움이다.
사회에 칸막이를 쳐서 이득을 보려는 특수성과
사회의 칸막이를 제거하여 세력을 만들려는 보편성의 싸움이다.
그래서 얻는 것은 커다란 세력이다.
정의는 없고 세력이 있을 뿐이다.
흑인과 백인 사이에 정의는 무엇인가?
흑인은 흑인화장실 쓰고 백인은 백인화장실 쓰면 공평한가?
중요한 것은 칸막이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보편성에 대적한 것이다.
보편주의 대승과 특수주의 소승의 싸움이다.
칸막이를 만들어야 가부장, 선배, 상사, 웃어른, 고참의 몫이 커진다.
그들이 의사결정을 주도하게 된다.
화장실 칸막이든 무슨 칸막이든
칸막이를 제거하면 세력이 만들어지고 권력주체가 만들어진다.
불편한 진실을 말할까?
흑인과 백인 사이에 정의는 절대로 없다.
투쟁이 있을 뿐이다.
보편주의와 특수주의 사이의 투쟁이다.
보편주의는 칸막이를 제거하여 거대한 세력을 만들고 그것으로 의사결정에 가담하는 것이며
특수주의는 도처에 칸막이를 만들고 자신이 선배, 가부장, 고참이 되어 졸개를 지배하는 권력행사를 한다.
둘 다 권력쟁탈인 점은 같다.
소승인가 대승인가? 칸막이를 만들 것인가 제거할 것인가?
정의는 없고 권력투쟁이 있을 뿐이며
지는 게임과 이기는 게임이 있을 뿐이며
결국 대승이 이기고 보편주의가 이긴다. 왜? 쪽수가 많기 때문이다.
흑인과 백인의 대결이 아니라
소수자와 다수자의 대결이 아니라
전라도와 충청도의 혹은 경상도의 대결이 아니라
바라문과 크샤트리아와 바이샤와 수드라와 불가촉 천민의 대결이 아니라
기독교와 불교와 유교의 대결이 아니라
역사라는 게임의 주도권을 다투는 것이며
정의에 도달하고 싸움이 끝나고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보편주의가 특수주의를 이기고 다음 게임에서 또 이기고 다음 게임에서 또 이기고를 영원히 반복하는 것이다.
영원한 투쟁과 영원한 승리가 있을 뿐이다.
엘리트 우월주의자는 이것을 지식의 문제 정의의 문제로 환원시켜
무엇이 정의인지 보여준 다음 그 정확한 정의에 지식을 도달시켜 시험문제 백점 맞으면 되는 문제로 여긴다.
천만에. 보편주의가 거대한 세력을 이루고 특수주의를 부단히 이겨가는 과정이 진보인 것이며
정의는 없고 권력투쟁은 계속된다.
사람이 말을 타지 말이 사람을 타지는 않는다.
사람이 말 한 번 타고 말도 사람 한 번 타면 정의일까?
권력투쟁은 부단히 이겨갈 뿐 멈추지 않으며 도달지점은 없다. 영원히 싸운다.
종착지는 없다. 결승점은 없다. 정의는 없다.
저울의 평형이 맞는게 정의다.
저울은 기울어진 채로 계속 질주한다.
축구장은 계속 보편주의에 유리하도록 기울어져 있야 한다.
좌파와 우파의 특수주의는 언제나 패배하도록 세팅되어 있어야 한다.
저울이 균형을 이루는 날에 정의는 실현되고 역사는 멈추고 인류는 멸종한다.
인체는 여러가지 평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컨대 소금이 너무 적으면 물중독으로 죽고 많으면 소금독으로 죽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혈관 속의 당 평형인데 인슐린이 당을 조절합니다.
혈관 속에 당이 많으면 여러가지 장애가 발생하므로 인슐린이 당을 제거합니다.
점심 먹고 졸리는 이유는 혈관 속에 당이 너무 많아서 타격을 받은 것입니다.
점심 먹고 졸리다 - 몸이 정상이 아니다 - 당을 너무 많이 섭취했다.
고기나 지방은 천천히 소화되므로 몸이 타격받지 않습니다.
대신 소화가 안 되고 속이 더부룩해서 역시 과식하면 불편합니다.
탄수화물을 많이 먹으면 몸에 타격을 받기 때문에 인슐린이 분비되어
혈관 속의 당을 제거하는데 그 과정에서 당이 지방으로 변해서 뱃살이 찌게 됩니다.
반대로 혈관 속에 당이 너무 부족해도 저혈당이 와서 쇼크를 받습니다.
혈관 속의 당은 적당한 수치로 유지되어야 몸이 타격받지 않으며
그러므로 배가 갑자기 고프면 일단 냉수를 마셔서 위산을 제거하고
포도당이나 설탕물을 먹어서 당분수치를 약간 끌어올린 후
고기와 지방 + 탄수화물 + 야채를 1/3씩 먹는 333 식사를 하면 됩니다.
탄수화물 폭탄은 독약과 같습니다.
1) 탄수화물 폭탄은 절대 피하라.
2) 콩은 적당한 정도의 단백질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나쁘지 않다.
3) 적당한 정도의 고기를 먹으면 배고픔과 허기를 면할 수 있다.
4) 갑자기 허기가 찾아오면 약간의 설탕물이나 초컬릿을 먹어라.
5) 배가 고프면 물을 마셔서 위산을 씻어내려라.
배고픔은 저혈당 쇼크 + 위산에 위가 자극받은 상태 + 장내세균의 장 공격입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위산과 장내 잡균에 의해 장이 소화되어 장이 작아집니다.
장의 크기를 줄여놓으면 배고픔을 덜 느끼는데
굶주림으로 장이 작아진 상태에서 고기를 포식하면
몸에 열이나서 식히려고 물에 뛰어들어 사망.
흉년에 정부가 주는 밥을 둘이 먹다가 한 명이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