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지 마라’는 말은 많이 했는데, 질문하는 사람이 없어도 썰렁해진다. 질문은 당연히 해야 한다. 다만 질문을 조리 있게 잘하면 그 안에 답이 있다는 말이다. 질문과 답 사이에 이퀄=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 질문을 해본 적이 없다. 질문을 하려 해도 쉽지 않다.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하면 망신살이 뻗칠 것이고 조리 있게 말하다 보면 이미 답이 나와 있다. 그냥 질문하자면 ‘너 왜 사냐?’ 이렇게 된다. 이건 폭력이다. 동료에게 난폭한 질문을 했다가 후회한 적이 몇 차례 된다. 사실 나는 사람들이 왜 사는지 궁금했다.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상대가 주먹을 들어 보이는 것이다. 이후 질문을 포기했다. 질문하지 않으니 친구를 사귈 수 없다. 아스퍼거인의 특징인가 싶어 자중하려는데 박문호 교수가 비슷한 말을 하더라. 선생님한테 ‘사람들이 박정희한테 복종하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노예근성 때문인가요?’ 이런 질문을 하려 한 적이 있다. 포기했다. 엉뚱하잖아. 다들 ‘쟤 미쳤나?’ 이럴 거다. 사실 궁금하긴 했다. 인간은 원래 노예체질인가? 왜 시킨 대로 하지? 왜 운동장조회 시간에는 멍청하게 30분씩 서 있지? 어차피 교장 말 귀담아듣는 사람 없잖아. 나중에 알았다. 초딩 때 이렇게 당해봐야 사회에 나가서도 부장님의 갈굼을 견딜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사회는 학교보다 훨씬 가혹하다는 사실을. 흔히들 말한다. 질문을 해야 과학이 되고 창의가 된다고. 그러나 이미 싹수가 노랗다. 박문호 교수의 말에 의하면 어차피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백에 하나라고. 여기에 오는 사람은 대한민국의 상위 5퍼센트이니 다섯에 하나꼴이다. 이미 아는 것을 알게 될 뿐 모르는 것은 알 수 없다. 무에서 유가 생겨날 수 없다. 대개 아는 것 중에 패턴이 같은 것을 불러내는 것이다. 문답으로 뭔가 알게 되는 경우는 잘 없다. 물건 이름을 안다거나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싹수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메커니즘이다. A가 움직일 때 B가 연동되어 움직인다. 둘을 통일하는 제 3의 것이 반드시 있고 그것이 움직이는 방향성이 또 있다. 그것을 화살표로 나타낼 수 있다. 그것이 있어야 한다. 그 싹을 마음 안에서 조금씩 키워나가는 것이다. '자기소개 하지마라'는 말을 진짜 자기소개 금지로 알아듣고 또 질문하지 마라는 말을 진짜 질문금지로 알아들으면 곤란하다. 당연히 질문도 하고 자기소개도 해야한다. 단, 마음에 화살표가 없는 사람과의 대화는 의미없다. 방향성이 정답이다. 진보와 진보의 방향성은 다르다. 진보는 보수를 배격하지만 진보의 방향성은 보수를 달고 간다. 화살은 머리가 꼬리를 달고 간다. 물에 수압이 있고 공기에 기압이 있듯이 방향성이 있다. 그것이 세상 모든 질문의 모든 답이다. 답은 나와 있다. 인류의 모든 질문을 하나로 집약하는 근원의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질문할 필요가 없다. 어쨌든 나는 마음의 화살표 하나로 곧 방향성 개념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그대가 어떤 질문을 하든 나의 답은 정해져 있다. 화살 하나를 챙겨두어라고. |
질문에 답이 있으니, 질문을 잘해야 합니다.
그래서 질문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구조론을 질문하는 법이라는 관점에서 풀면 재밌고,
질문구조가 생기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질문한다고 다 질문이 아니다.
그래서 질문하는 패러다임을 바꾸라! 고 말합니다.
의식을 바꾸라는 말 대신 질문을 바꾸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왜 사냐고 묻기보다는, 왜 사냐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그 때가 언제인지?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는 식으로 질문을 바꿉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왜 그랬냐? 고 묻기보다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그 때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리고 그 이후에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묻습니다.
생각하는 법
질문하는 법이 곧 구조론의 핵심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