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와의 대화라는 언어의 형식이 사고를 제한한다. 대화는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 대상과의 대칭관계로 대화를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대칭이냐 비대칭이냐, 상대어냐 절대어냐의 문제가 있다.
타자성의 문제와도 통한다. 나와 타자사이의 벽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토대를 확보해야 한다. 토대가 절대어다.
사건을 통제하려는 사람은 토대를 확보해야하고, 사건을 언어에 반영하려면 절대어를 확보해야 한다.
즉 핑퐁형식의 대칭관계를 넘어서, 절대어의 비대칭적 전개를 언어화해야 한다.
문명의 지속가능한 발전 혹은 지속가능성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누군가가 머리를 써서
만들어낸 멋진 단어다. 사건이 반영된 언어는 토대(에너지원)을 확보해 비대칭적으로 자체 전개할 수 있다.
타자와의 경계선에 전율해야 한다. 먼저 토대를 확보해야 발언권을 얻는다.
인간들은 멋쩍은 웃음으로 경계선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동물의 방법이다.
언어가 당당해야 한다. 절대어를 확보해야 한다.
한쪽에서는 문명, 사회, 역사, 진보, 진리를 이야기하는데 한쪽에서 나, 너를 이야기하면 언어의 격이 떨어지는 것이다.
결국은 언어의 문제에 관점의 문제가 연동된다. 상대어냐 절대어냐에 따라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드러나는 것이다. 세상을 통합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사회적 발언권을 얻는다.
오민규
언어는 대화하는데 맞추어져 있는데 언어를 가지고 사고를 하니 뭔가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닌가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