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구조론에서 수없이 얘기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구조론식 사고법을 훈련하는데 사용해보고자 합니다. 구조론을 배우는데 가장 큰 문턱은 관계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깨달음이며 관점의 상승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 정도 얘기하면 제가 말하려는 게 대강 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로 말할 수 있는게 뻔하잖아요.
뻔한 것에 굳이 "훈련"이라는 거창한 용어를 갖다 붙이는 이유는 이게 원래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몬티홀 딜레마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은 레이저를 쫓는 고양이처럼 레이저의 원천인 사람의 손까지는 관심이 이르지 못합니다. 구조론에서야 이런 인간을 두고 인간의 멍청함이라고 말하지만, 그게 인간의 디폴트 값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역으로 그것을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데카르트를 가져온 이유는 구조론을 이해하고자 너무 멀리 가지 말자는 취지입니다. 제가 그리스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다 뒤져봤지만, 현대인의 입장에서 너무 멀리 가면 도리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현대인에게 그리스인의 입장은 잘 와닿지 않는 거죠. 하지만 데카르트 정도라면 어느정도 공감할 수 있습니다. 먼저 데카르트에 대한 좀 그럴듯한 몇몇 설명 블로그나 위키를 살펴봅시다.
데카르트(1596~1650)는 베이컨과 함께 근대철학의 대표 인물입니다. 베이컨과 데카르트는 서양철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바로 중세의 신 중심의 철학에서 인간 중심의 철학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베이컨은 경험론, 데카르트는 합리론자였는데요, 베이컨은 귀납적 지식을 통한 진리의 발견을 중요시 했고, 데카르트는 절대 불변의 진리로부터 연역적으로 진리를 확장해나가는 것을 중요시했습니다.
이때 데카르트가 절대불변의 진리를 찾기위해 사용한 방법이 바로 방법론적 회의론 입니다. 방법론적 회의론이란 말 그대로 절대불변의 진리를 찾기 위해 회의론을 사용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데카르트를 회의론자라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데카르트는 절대불변의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었고, 그것을 발견하기 위한 방법으로 회의론을 채택한것이니까요.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론은 이렇습니다. 데카르트는 장미를 보고 의심합니다. '저 장미는 빨간색일까 아니면 나의 뇌가 빨간색이라고 생각하는걸까?' 데카르트는 물을 마시면서 의심합니다. '이 물은 실제로 차가운걸까 아니면 나의 뇌가 차갑다고 느끼는걸까?'
만약, 나는 의심한다. 가 사실이라면 사실이지요. 만약, 나는 의심한다. 가 사실이 아니고, 내가 내 자신이 의심하고있다고 생각하는것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나는 의심한다.' 라는 명제를 의심하는것이기 때문에 '나는 의심한다.' 는 사실이 됩니다.
이를 사유의 제 1법칙이라하고 여기서 데카르트의 명언이 나오는 것입니다.
(의심→생각)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출처: https://m.blog.naver.com/rheemh/110108922730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생각은 방법적 회의(懷疑)에서 출발한다. 그 당시 회의주의에 반대했던 데카르트는 모든 지식은 인간 내면에 숨겨져 있으며 연역법으로 이들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고 그 연역의 기반이 되는 제1공리를 얻어내려고 노력했는데 그 결과 유명 어록이기도 한 '나는 생각한다, 그렇기에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라는 근본원리가 《방법서설》에서 확립되고 이 확실성에서 세계에 관한 모든 인식이 유도된다. 후에 《성찰》에서는 '나는 있다, 존재한다.'로 제1명제를 치환하는데 그 이유는 "고로"를 포함한 표현이 전제와 결론처럼 읽히기 때문이라고......데카르트가 자기 견해를 더 표현하는 쪽으로 나아갔음에도 사람들에겐 이전의 공식이 너무 뇌리를 떠나지않아 오늘날까지 제1명제는 보통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알려져있다.
출처: https://namu.wiki/w/%EB%A5%B4%EB%84%A4%20%EB%8D%B0%EC%B9%B4%EB%A5%B4%ED%8A%B8
간단히 말하면, 데카르트는 순간 언어의 불완전성과 완전성을 동시에 깨닫게 된 것입니다. 불완전한 것은 상대적이며 '외짝'인 것이며, 완전한 것은 상대적인 것에 대해 상대적인, 즉 절대적인 것 혹은 '짝'을 말합니다. 이는 "나는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대상을 바라본다 정도로, "고로 존재한다"는 "내가 대상을 바라보는 것"을 묶고 그것을 존재라고 명하는, 즉 언어의 중첩을 가리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회의"를 이해해야 하는데, 회의는 "순환논법의 오류" 같은 겁니다. 懷疑主義, scepticism(영국식)/skepticism(미국식)인데, 진중권류의 답 안나오는 꼬리물기 논쟁을 보면 잘 나타납니다. 진중권류 토론을 학교에서 토론의 정석으로 가르친다고 하는데, 진중권이 저러는 이유가 납득이 됩니다. 결국 데카르트가 회의주의를 회의하는데 이유가 이런 겁니다. 데카르트는 순환 위에 비순환이 있다는 것을 본 겁니다.
물론 이런 제 해석이 데카르트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으며 다소 과대 해석의 여지가 있겠습니다만, 데카르트가 연역을 주장하고, 좌표계를 창안하는 배경을 어느정도는 설명할 수 있습니다. 좌표계라는게 구성소의 중첩으로 교차점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연역은 좌표 관계의 비순환성을 의미합니다.
그럼 데카르트에 비해 구조론의 월등한 점은? 구조론은 계와 단위를 과학적으로 서술하며, 관계와 주체 그리고 대상을 통합했다는 것에서 발전하여 '회의의 회의의 회의를 한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상대성과 절대성 그리고 다시 상대성을 말하는 거죠. 이게 왜 대단한 발견인지를 이해하려면 데카르트만으로는 설명이 불가하고 러셀, 프레게 > 비트겐슈타인의 족보를 따져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건 이어지는 글에서 설명해보죠.
구조론에서 일대일이라고 하면
천지창조 검지손가락 붙은 거 생각나고
접점에 존재가 있다고 생각해야 하며
존재는 다시 내부의 질서가 있으므로
또다시 5가 있으며
외부와 내부, 내부와 제3부 사이에 질서가 성립하며
사실 외부와 제3부가 손가락 두개여
이제 관점 생각을 해야 하는데
구조론의 계체각선점의 전개는
양측 삼측의 관점이 아닌 어느 한측의 관점을 말하는 작명법이며
체/각/선이 이쪽이면 계는 반대고 점은 제3이며
체각선이 1이면 계는 0.5, 점도 0.5쯤 되며
결국 보통 우리가 말하는 사물은 체각선쯤 되고
그 사물이라 명명한 것은 사실 사물이 아니라 연결인데,
이는 신체라는 파이프가 밥을 먹고 똥을 싸는 것과 같이
언놈한테 패스를 받아서 다른 놈한테 패스를 전달할 때
배구에서 나의 포지션이 성립하는 것이며
그러면 그게 작용반작용이고 손가락 접점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고
또한 물리학의 작용과 반작용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면
작용반작용법칙은 사실 관성의 법칙 위에서 유효한데
그런데 관성의 법칙은 또어떤 작용반작용의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순환은 비순환으로 묶여있고 그 비순환은 또다른 순환의 부분인데
결국 이는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종속적인 계의 완전성과 불완전성을
직선적이면서 순환적인 모순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혹은
통합하는 제3의 회의라고 보았습니다.
구조책을 보면 다층구 모형과 모래시계 모형이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하는데,
사실 질입힘운량의 명명법에 대한 서로다른 관점을 설명했다면 좀 더 이해하기가 쉬웠을 겁니다.
다층구는 에너지의 관점에서, 온 우주가 연결되어 있다는 즉 절대적인 관점에서 좀 더 바라본 것이고
파이프나 모래시계는 좀 더 사물의 관점에서, 즉 내부에서 외부와 제3부를 바라본 관점에서 바라본 것인데
두 모형을 짝을 맞추려면 당연히 헷갈리죠.
질입힘운량이라는 명명법이 독자가 대충 생각하면
그냥 직선으로 쭈욱 인과인과인과인과인과하는 식으로 비순환만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컴공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그냥 트리가 다섯번쯤 진행된 것이라고 오해할 만 한데,
트리 다섯번이 맞지만
다섯개의 트리는 외부와 내부 제3부로 구분해야 하므로
컴공의 트리와는 차이가 있죠.
여기서 힌트를 얻는데
외부와 제3부를 연결하는게 내부입니다.
이쯤되면 구조론이 왜 모든 2가 5라고 하는지
한 사건의 구성소가 3125 즉 5의 5승이 되는지
대강 이해가 됩니다.
대강 생각해보면 외부와 내부로 5의 5승이 됐나부지
둘을 연결했으므로 5가 되며
그 내부에서 5는 중심과 주변으로
또 둘을 연결하니깐
그게 의사결정의 의미이기도 하고
외부와 제3부에 대한 내부의 의미이기도 하고
즉 크게 보면 구조론은 2이지만
외부와 내부 또 다시 내내부로 나누면 3이요
내부에 3이 들었으므로
3+3은 5가 되며, 6이 아니라 5인 이유는 중복 제외하니깐 그런 거고
데카르트가 회의론자를 회의했다면
구조론은 데카르트를 회의한거죠.
구조론과 데카르트 사이는 생략.
사실 그 사이에 비트겐슈타인이 언어게임이란 말을 했으므로
대략 계를 말했다고 볼 수 있는데,
비트겐슈타인의 계는 패스 전달의 형태가 아니라 대칭의 형태이므로
다 말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지점이 바로 구조론이 기존 수학과 가장 차이가 나는 점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패스의 의미는 순환이 3개가 중첩된 것입니다.
단순히 1:1이 아닌 거죠. 1:1만 있을 리가 없으니깐.
연결이자 단절인 세상의 법칙을 설명하려다보니 말이 길어지는데
다 같은 말입니다.
연결되면 단절되는 것이며
단절되면 연결됩니다.
그런데 사실 연결된 겁니다.
단위라는 말을 하려면 반복이 있어야 하고
동시에 비반복이 있으며
다시 반복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는 언어의 구조이기도 하고요.
제가 굳이 구조론을 연습하고자 데카르트를 꺼내든 것은
데카르트가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라
데카르트의 깨달음에도 이르지 못한 자들이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떠들고 다니니깐
속이 거북했기 때문.
그런데 생각하려면 주어와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런데 존재한다면 동사를 관계라고 본 것이 됩니다.
1+1=2 정도는 된다는 거죠.
http://www.ktword.co.kr/abbr_view.php?m_temp1=4979
현대수학은 점차 함수 하나로 대동단결하고 있습니다.
방정식이라고도 함수라고도 변환이라고도 하고
투영이라고도 하고 코딩이라고도 하는데
문제는 일대일대응(전단사함수)이 집합론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
러셀이 역설으로 집합론을 뒤집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집합론으로 수학의 기초를 붙들고 있으니
그림이 이렇게 밖에 안 나오는 거.
작대기를 하나만 그어야지.
장미가 빨간색이든 뇌가 빨갛게 인식하든 무슨 차이가 있는가? 물이 차갑든 뇌가 차갑게 인식하든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게 차이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수학을 이해 못한 사람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게 차이가 만들어지는 것은 나의 행복이 너의 불행으로 전이될 때 입니다. 빨간색과 파란색은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긴 것은 짧은 것이요 흰 것은 검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는 수학자입니다. 수학자는 감각이 있습니다. 색깔에는 색깔이 없습니다. 뇌에도 장미에도 빨강은 없습니다. 장미가 먼저고 뇌가 다음이며 물이 먼저고 뇌가 다음이며 순서가 있을 뿐이고 그 순서가 바로 수학이며 그 순서의 앞서는 것은 전제와 진술에서 전제이고 제 1 전제는 1이 아니라는 사실을. 1 대 1입니다. 존재는 일대일입니다. 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구조론을 공부할 자격이 있습니다. 과연 내가 존재할까요? 존재하기는 개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할 리가 없잖아요. 생각하므로 존재할 리가 없고 존재하므로 생각할 리도 없습니다. 결국 존재와 생각은 동어반복이며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했다면 한 단어로 줄여야 하는데 그 결과는 존재.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면 좋으련만. 사과가 있다고 하면 사과는 여기에 있을까요 저기에 있을까요? 상관이 없지요. 일대일입니다. 일원론이라는 말이지요. 만유의 연결되어 있음을 포착한 사람이라면 대화가 가능합니다. 남는 것은 링크 뿐.
사과가 있다고 말하지 말라. 사과가 사라지면 링크가 삭제된다고 말하라. 연동되어 있다고 말하라.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나며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진다네. 이것과 저것 사이의 일대일이 있을 뿐이라네. 링크 하나가 걸려 있을 뿐이라네. 너도 없고 나도 없지만 너와 나 사이의 일대일은 존재한다네. 그것이 수학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