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은 외부에서 에너지 공급이 지속되지 않는 한, 자체 구조값을 소모하며 사건을 진행시키는 수 밖에 없다. 이 경우 사건이 종결될 때 시스템 역시 붕괴된다. 시스템이 외부의 혹은 내부의 중첩을 소모한다는 건 에너지=권력을 소비한다고 표현할 수 있다. 곳간의 쌀밥을 먹으면서 빈둥거리다간 오래 가지 못해 굶어죽는다.
반대로 생산이란 외부로부터 권력을 조달하는데에 성공하는 것이다. 밥을 먹은 기운으로 농사를 지어서 새로운 수확물을 생산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생존자원 뿐만 아니라 모든 권력이 작동되는 원리이다. 상호작용의 총량 즉 시스템의 규모가 생산력이며, 권력의 소비와 생산 간 효율에 비례하여 그 규모는 축소되기도 확장되기도 한다.
권력의 소비와 생산 사이 이득이 생긴다면 그것은 재투자될 수 있으며, 이는 곧 시스템의 확장을 의미한다. 문제는 지구가 사실 제법 좁으므로 시스템들 간의 세력 경쟁은 필연이라는 사실이다. 아니 사실은 본래 인간이 권력지향적 존재인 만큼, 큰 시스템 안에서도 작은 시스템끼리 생산된 권력을 나눠가지려고 다투는 게 일상이라고 말하는 게 낫겠다.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정답은 생산력의 부단한 확장일 것이며, 이는 권력의 소비로부터 권력의 생산이 더 커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했다. 자연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들끼리 적은 시공간을 소비하여 의사결정을 으쌰으쌰했을 뿐인데, 그로부터 자연을 향하여 커다란 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 집단의 정치권력이 생산되니 마술이다.
경제를 보더라도 연예인이 무대에서 춤 한 번 출 뿐인데, 그 공연 티켓을 얻으려는 인간들이 쌀 한 가마씩은 거뜬히 농사지어 낸다. 연예산업은 실질권력을 생산해내는 기절할 정도의 권력이익률을 가진 시스템인 셈이다. 시골 토박이 농부가 먹을 게 최고 가치있다고 주장하더라도 문명이 진보하는 한, 쌀 한 포대보다 스마트폰이 더 값어치 있음을 우리는 안다.
생산의 가치란 그로인해 할 수 있는 소비로 결정된다. 권력을 생산했어도 소비로 이어질 수 없다면 애초에 그만큼 생산한 것으로 쳐주기 힘들다. 이거 중요하다. 다시말하면 생산과 소비를 긴밀하게 만들어주는 것 자체로도 실질 권력이 확대되는 즉 권력이 창출되는 셈이다. GDP 산출에서도 실질구매력이 지불되면 생산으로 쳐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돈을 벌어도 쓰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다같이 흑자부도나니 패망이다. 누군가의 소비는 동시에 누군가의 권력생산 확정이기도 하다. 전쟁으로 인한 권력소모는 역설적으로 인류의 전쟁권력을 증명하기도 한다. 다만 이 경우 소비와 생산 간 비례효용이 낮아서 지속되기 힘들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때 인류 경제사가 1,2,3차 산업으로 진보해 온 의미도 역시 1차에 비하여 2차가, 2차에 비하여 3차가 문명 안에서 실질적으로 먹어주는 권력을 증대시켜온 필연적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향후 더 큰 권력의 생산을 담보해주기만 한다면 재투자는 그 자체로서 생산활동이기도 하다.
예컨대 농부가 자체적으로 소비하고도 남은 쌀을 팔아서 농지와 일꾼 규모를 늘리는 것도 재투자이다. 이외에도 쌀을 판 돈으로 농업기법의 선진화를 달성하듯, 향후 권력생산의 확대를 담보하는 행위 역시 당연히 재투자이며 생산활동이다. GDP 산출식에서 투자가 곧장 생산으로 인정되는 사정이 다 있다.
다양한 정치권력의 확장은 집단 구성원이 생산해낸 대표자로서의 권력이 보다 크게 행사되도록 담보해준다. 깨달음대화의 예시인 지방분권화 역시 그것이 기능하여 집단 전체의 대표자가 말단까지 일일히 소비하기 힘들어했던 권력을, 복제시키는 식으로 재투자함으로서 향후 총 권력생산의 증대를 담보해준다.
그러므로 지방분권화는 그 자체로서 명백히 권력의 생산이 맞다. 화폐시스템 역시 만인을 만인에 대하여 채무자이자 채권자로 엮어냄으로서, 이로 인해 권력의 생산과 소비를 용이하게 한다. 앞서 든 쌀과 스마트폰의 예시와 같이 경제주체들 간 긴밀할수록 각 분야의 생산물은 그 권력이 제대로 발휘된다.
느슨하기 때문에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권력을 화폐시스템이 팽팽하게 하며, 이 효용은 시스템을 운용하는데에 소비되는 권력보다 낫다. 중앙권력이 갖는 화폐권력은 중앙경제권력의 지방분권화라고 할 수 있겠다.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인류의 모든 권력소비 활동은 다음 단계의 권력생산을 담보하는 만큼 효용이 크다.
반대로 말하자면 실질적인 권력을 생산해내는 모든 권력소비활동은 효용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물적자원의 소비 뿐만 아니라, 인류의 의사결정구조에 대한 건설 역시도 그 자체로서 투자=생산임을 뜻한다. 더 나은 의사결정구조에 대한 투자가 미래의 권력생산 증대를 담보해주니까.
사람들이 스마트폰의 원형을 권력으로 인정하기 곤란해하니, 스티브잡스가 손맛을 들여서 끝내주는 '신세계로의 가능성'으로 권력화한다. '석유를 소비해서 이거저거 생산하듯이, 스마트폰 갖다가 뭔가 잔뜩 생산해낼 있소!'라는 식이다. 혹은 미국이 시작했듯이 R&D 투자지출을 생산활동으로 쳐줄 수도 있다.
셰일 연구개발 자체를 생산활동으로 인정하고서 자본이라는 권력을 마구 소비시켜주니, 과연 성공해버려서 에너지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 비단 경제뿐만 아니라 모든 권력의 소비는 이어지는 권력창출이라는 미래적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이렇듯 문명은 눈에 보이기 힘들던 실질권력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진보해왔다.
인정하는 집단이 그러한 부문을 육성한 결과, 주변 집단보다 권력적으로 우위에 서므로 잘 이긴다. 이기는 시스셈이 세력을 확장함과 동시에 그 형식 또한 널리 퍼진다. 혹여 문명이 야만에 짓밟히더라도 그러한 형식만큼은 역사를 통해 살아남는다. 실질적으로 권력이 막강하므로 훗날 열심히 연구하는 누군가가 차용한다.
식당에서 테이블의 갯수보다 회전률이 더 중요한 것과 비슷한 논리로 봐도 될까요? 요즘 방송이나 주변을 보면 식도락에서 많은 권력들이 창출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