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동설은 진작에 깨졌지만 인간은 여전히 원자설이라는 또다른 천동설에 갇혀 있다. 메커니즘설로 갈아타야 한다. 천동설이 인간 중심의 사고이듯이 원자설 역시 인간중심의 사고다. 인간중심의 사고란 인간들에게 그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인간에게는 뭔가 의사결정의 중심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지구가 중심이다. 이 얼마나 편리한 우격다짐 논리인가? 인간은 권력을 원한다. 하늘이 지구를 도는 이유는 그래야 인간의 권력이 정당화 되기 때문이다. 천동설이 교회의 권력과 군주의 권력을 정당화 하는 아전인수의 도구로 이용된 것이다. 평범성의 원리도 지식권력의 도구로 이용된다. 지구는 특별한 별이 아니라는 말은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는 말이다. 이는 엘리트 지식계급이 대중의 자발적 권력을 제압하는데 쓰인다. 20세기는 혁명의 세기다. 인간들이 흥분했다. 대중은 특별해. 민중은 위대해. 우리 민족이 우월해. 의욕이 넘치는 베이비붐 세대의 기를 꺾어놔야 한다. 21세기 MZ 세대는 얌전해졌다. 중앙집권제와 지방분권제가 있다. 19세기의 공산주의, 전체주의, 제국주의, 민족주의가 중앙집권을 강조한다면 20세기의 탈근대 사상은 지방분권을 강조하지만 둘 다 권력놀음이다. 원자설 역시 왜곡된 인간 중심의 사유다. 원자가 구슬이면 구슬을 꿰는 실은 인간의 권력이다. 원자설은 자연을 타자로 보고 객체로 본다. 자연을 주체로 보지 않는 비뚤어진 사고다. 진정한 권력의 주인은 인간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대중도 아니고, 지식인도 아니다. 권력이 권력의 주인이다. 원자설을 대체하는 메커니즘설은 메커니즘 안에 자발적 권력이 있다. 우리는 세상을 원자의 집합으로 알지만 틀렸다. 원자는 자연의 변화 메커니즘에서 밸런스 중심이다. 그것은 바퀴의 축과 같다. 바퀴는 전달한다. 배후에 바퀴를 움직이는 엔진이 있다. 바퀴는 변화의 격발자가 아니라 전달자다. 우리가 아는 물질은 변화의 전달자에 불과하다. 그 변화의 자궁에 대해서는 모른다. 굳이 말하면 그것은 자기장과 시공간의 특별한 성질이다. 인류원리가 시사하는 바는 인간의 사유가 권력의 압박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다. 천동설의 중앙집권설이든 지동설의 지방분권설이든 권력을 매개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어 있는 것이다. 권력은 자연의 의사결정 메커니즘에서 나온다. 활이 화살을 쏘면 활에 권력이 있다. 어미가 새끼를 낳는다면 어미에게 권력이 있다. 메커니즘은 둘의 연결이다. 연결고리가 권력이다. 네거리의 땅값이 비싼 이유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연결고리가 되는 상권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권력을 탐하는 인간의 입장을 배제하고 의사결정 메커니즘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