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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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5]오세
read 8888 vote 0 2010.07.25 (17:54:46)



여자의 매력은 튕기는 데 있다고들 한다. 그런데 지나치게 튕기면 문제가 된다. 냉담하기가 시베리아 유형소보다 더해서 아예 남자가 다가갈 여지조차 주지 않는다면, 그 땐 더이상 튕김이 매력이 될 수 없다.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지만, 열번 찍어도 도끼자국 하나 남지 않는 남자라면 나무꾼은 그 시간에 다른 나무를 베러 떠난다. 그렇게 지나친 튕김은 매력이 아니라 척력이 된다. 상대방을 나로부터 최대한 멀리 밀어내는 것이다.

연애를 할 때의 묘미 중 하나는 상대가 나에게 어느 정도 집착해 주는 것에 있다. 나에게 달라 붙고, 집착하는 모습을 보면서 상대의 애정을 확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쳐서 집착이 편집 수준에 이르면 곤란하다. 연애에서 상대방의 정서적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지면 어마어마하게 피곤해진다. 인간에겐 언제나 자신만의 심리적 공간이 필요하며 이것이 지나치게 침해당할 경우 우리는 정서적인 <질식>을 경험한다.   

얼핏 보기에 튕김과 집착은 완전히 정반대의 현상으로 보인다. 둘이 아무런 관계도 없는듯 보인다. 그러나 구조론으로 보면 다르다. 구조론적 관점으로 보면 이 둘은 같다. 튕김과 집착은 <거리두기>라는 관계 양식의 양극단이다. 마치 자석에 N극과 S극이 있듯이 거리두기라는 관계 양식에는 튕김과 집착이라는 N극과 S극이 있다. 

보통 사람들이 보이는 관계 양식은 튕김과 집착이라는 양극 사이의 중간 쯤에 위치한다. 이 둘이 적절히 균형 잡혀 있으면 어느 정도 상대방을 안달나게 하면서도 서로의 거리를 점점 좁혀나가는 것이 가능해진다. 긴장(튕김)과 이완(집착)이 적절히 교대하면서 서로의 정서적, 심리적, 신체적 거리를 좁혀 나간다. 그것이 연애의 도(道)이다. 연애의 도인은 서로의 거리를 좁히되 상대방을 지나치게 멀리 튕겨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한 번에 지나치게 거리를 좁혀 달라붙은 우를 범하지도 않는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고 한다. 튕김과 집착도 마찬가지이다. 튕김과 집착은 겉보기엔 서로 반대되는 행동양식 같지만 그 근원은 같다. 우리는 그 근원을 가족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 한 가족이 있다. 
이 가족을 지배하는 것은 바로 불안이다. 그 원인은 아빠의 바람일 수도 있고 경제적 어려움일 수도 있고 엄마의 암일수도 있고 암튼 원인이 뭐가 되었든 간에, 엄마도 불안하고 아빠도 불안하니 나도 불안하고 동생도 불안하다. 이러한 불안이라는 감정이 개인을 넘어 가족 전반의 <감정흐름>이 되고 나아가 세력이 되고 대세가 되어버리면, 이 때 나의 행동양식은 가족구조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불안을 회피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공포영화를 볼 때, 으스스한 BGM과 더불어 미칠듯한 불안감이 엄습해올 때, 당신은 무언가를 꽉 붙잡으면서 그 불안을 덜거나, 아니면 화면으로부터 고개를 홱 돌리면서 불안의 근원과 거리를 둔다. 이렇게 우리는 불안을 낳는 대상을 나로부터 튕겨내 거리를 두거나 아니면 안전한 대상을 찾아 착 달라붙음으로써 불안을 덜고자 한다.

만약 어린시절 아버지의 외도로 인한 극도의 가정불화를 경험한 여성이라면 그 때의 불안을 피하고자 자신에게 접근하는 남자마다 불안을 자아낼 수 있는 가상의 근원으로 간주하여 어마어마한 튕김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있다. 거꾸로 어린시절 어머니의 외도로 인한 이혼과 그로 인한 극도의 정서적 불안을 경험한 남성이라면 자신의 애인에게 거의 편집에 가까울 정도의 광기어린 집착을 보일 수도 있다.

이 둘의 행동을 관통하는 핵심은 바로 불안이 지배한 가족구조이며, 이 불안에 대한 대처 방식이 튕김과 집착이라는 극과 극으로 갈리는 것이다. 따라서 때로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양식이 실은 가족구조에 만연한 불안에 대한 대처라는 하나의 근원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튕김과 집착은 불안에 대한 대처라는 어미로부터 나온 이란성 쌍둥이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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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으로 재밌는 것은,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이 서로를 끌어들이듯이, 그렇게 튕김력과 집착력을 지닌 이들이 서로를 끌어당긴다는 점이다. 과도하게 튕기는 여인은 자신에게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여자는 죽을 때까지 찍는다"는 신념을 지닌 남성에게 끌릴 수 있으며, 냉담하기가 절대영도 수준에 도달한 남성에게 미저리 수준의 집착력을 보이는 여자가 달라붙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든 건 너무 극단적인 사례고, 한 번 주변의 커플들을 보자. 대부분 " 튕기는 여자-그럼에도 달라붙는 집착력을 지닌 남자" 또는 "달라붙은 여자-차가운 도시남자"의 쌍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일까? 과연 N극과 S극이 끌어당기듯이 그렇게 튕김과 집착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일까?

튕김 성향과 집착 성향을 보이는 이들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이유는 바로 구조론에서 말하는 "밸런스의 원리"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엔 항상 균형을 바로잡고자 하는 힘이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균형이 깨어질 경우 심리적인 증상의 형태를 띠며 증상은 그 자체로 균형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오잉? 이게 대체 뭔 소린가? 그러면 어렸을 때의 불안한 가족 구조로 인해 과도한 집착 또는 튕김이라는 증상을 보이는 이들의 극단적인 행동양식이 사실은 내부의 균형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취지에서 이뤄지는 것이라고?

그렇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만약 우리가 버스를 타고 가다가 흔들려 넘어질 위기에 처하면 우리는 순간 재치를 발휘해 넘어지는 반대 방향으로 얼른 몸을 가누는 것이 아니라 보통 자신이 넘어질 방향의 반대 방향에 놓인 사람이나 사물을 붙잡음으로써 균형을 회복하려 한다. 집착이나 튕김 역시 마찬가지이다.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외부의 대상에 의존한다는 것이 집착과 튕김이라는 현상의 본질이다. 외부의 대상에 의존한 밸런스의 회복. 그것이 집착과 튕김의 역할이다.

집착과 튕김이라는 양극에서 갈피를 못잡고 가없는 후회 속에 연애를 실패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외부에의 의존을 통한 밸런스의 회복이 아니라, 바로 내면의 밸런스를 회복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선 우선 자신의 관계 양식이 한 쪽에 치우쳐 있음을 알아야 하고 그러한 관계 양식이 실은 밸런스가 파괴된 자신의 원가족 구조로부터 기인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불안을 회피하기 위한 자신의 집착 또는 튕김이 어린 시절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와 지성을 갖출 만큼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 가족 내에서 극도의 불안을 경험했던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체득하는 것이 필요하다. 좋은 상담자들은 우리의 내면에 파괴된 밸런스를 회복시켜주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날고 기는 상담자라도 내면의 밸런스를 회복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이다. 만약 또 다시 집착과 튕김이라는 패턴으로 상담에 임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외부에 의존해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라 상담자와의 관계가 끝나고 나면 다시 도루묵이 됨을 잊지 말자.

오늘 글 한 줄 요약: 지나친 집착과 튕김이라는 관계양식은 불안으로 인해 내부의 밸런스가 깨진 가족구조의 산물이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양을 쫓는 모험

2010.07.26 (11:12:32)

오세님, 글 잘 읽었소.

지나친 집착과 튕김의 남녀가 만나면 오히려 밸런스가 맞아서 좋은 방향으로 발전 할 수 있고, 그런 이상 밸런스의 원인을 잘 못된 가족구조라고 하였는데, 남녀관계에서 지나친 집착과 튕김이 만나서 감정의 밸런스가 맞을 수 있지만, 반대로 생활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관하여 대응하는 과정이 취약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소. 감정으로 궁합이 맞는 경우와 생활에서 문제해결능력과는 다른게 아니냐는 질문이오. (대부분의 문제는 내부의 문제 뿐 아니라, 외부의 문제와도 관련되기 때문이오.)

[레벨:15]오세

2010.07.26 (11:28:17)

"지나친 집착과 튕김의 남녀가 만나면 오히려 밸런스가 맞아서 좋은 방향으로 발전 할 수 있고"
이거는 아닌듯하오. 암튼 극과 극은 끌어당기는데 그렇게 만난 극과 극은 자신의 성향에 대한 자각과 변화의 시도가 없는 한 해피엔딩으로 끝날 가능성이 거의 없소.

암튼 본문에서 내 의도는 극과 극이 서로 끌리긴 하지만, 그렇게 만나면 뒤끝이 좋지 않음을 이야기하려는 것이었소. 결국 자신의 내부에서 파괴된 밸런스를 외부에 의존하여 복원하려는 경우가 문제가 되오. 일단 내부의 균형을 잡아 놓아야 바깥과 관계 맺을 때 자신의 중심을 지킨 상태로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오.
프로필 이미지 [레벨:8]귀족

2012.01.11 (19:13:47)

공감가는 내용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극과 극은 끌어당기는데 그렇게 만난 극과 극은 해피엔딩으로 끝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라는 말씀이

 

와닿네요.

 

 

내부 벨런스 회복 즉, 자존감과 존엄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늘 불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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