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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양을 쫓는 모험
read 9518 vote 0 2010.07.16 (05:41:56)


1. 문제란 무엇인가?



싯타르타 부처는 "삶은 고통의 바다" 라고 했단다. 누구나 고통스러운 삶은 사는 것은 아닐테지만, 어쨌거나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표현을 고통이라고 하긴 했지만, 사실 삶은 문제의 연속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고통은 문제에서 나온다. 문제를 해결하면 고통은 사라진다. 예컨대, 무거운 짐을 옮기는데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하고, 위험하고, 졸 고통스럽지만, 바퀴를 사용하면 그 힘은 최대 1/1,000로 줄어들고, 위험은 감소하고, 편리하다.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문제의 연속이다. 내가 태어나는 것은 내 부모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문제 이기도 하다. 또한 성장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생기고, 원하든 원치 않든 어떠한 공동체에 속하므로서 문제에 부딛히기도 한다. 

옆집 순이한테 쳐 맞은 것도 문제요, 학교에서 왕따 당하는 것도 문제요, 등록금이 치솟는 것도 문제요, 취직이 안되는 것도 문제요, 장가 못가는 것도 문제요, 직장에서 짤리는 것도 문제요, 쥐박이 삽질하는 것도 문제다. 삶은 문제 덩어리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진보이고, 그렇게 문제를 해결해 온 것이 역사인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 기준점을 설정하는 것부터 문제해결의 시작이다.




2. 자전거를 타다


자전거를 탄다고 가정하자. 자전거를 타고 갈 때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넘어졌을 경우다. 자전거가 넘어지면 다치거나, 짐이 깨지고 손상될 수 있다. 그래서 자전거를 탈 때에는 넘어지지 않도록 잘 타야 한다. 

모든 문제는 자전거를 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전거가 넘어졌다는 것은 그 이전에 자전거를 '타다(Ride)'가 전제 된 것이다. 자전거를 탄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일(work)이 진행중인 것이고, 자전거가 넘어진 것은 진행되던 일(work)이 방해를 받거나 중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가 생겼다면, 보통 문제가 되는 '사건'을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이전에 어떤 일(work)가 선순환 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가 일어나는 사건(accident)은 작은 단위이고, 문제의 전제가 되는 일(work)은 큰 단위다. 그러니 문제의 현상만을 봐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자전거.jpg



자전거를 타는 행위는 자전거의 패달을 밞아서 에너지를 얻었을 때 가능한 것. 잘 가다가도 더이상 패달을 밟지 않으면, 점점 속도가 줄어들다가 결국 쓰러지고 만다. 또 다른 경우를 상상할 수가 있는데, 자전거의 패달을 막 밟아대며 속도를 높여 전진하다가 커브길을 만나면 핸들을 부드럽게 꺽어주며, 무게중심을 진행방향 쪽으로 기울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곧 넘어지게 될 것이다. 서 있을 때와 타고 갈 때의 밸런스 개념이 다르고, 직선구간에서의 밸런스 개념과 커브구간에서의 밸런스의 개념은 다르다.

한 개인이 애초에 자전거를 타지 않으면 넘어질 일도 없을테지만, 인류가 자전거를 타지 않으면 진보하지 못해 문명은 퇴보했을 것이다. 잉카문명은 동시대에 유럽권에서는 상상도 못할 세련된 문화를 꽃피웠지만, 바퀴를 발명하지 못해서 진보에 한계가 있었다고 한다.


바퀴 > 수레 > 자전거 > 자동차 > 비행기



마찬가지로 현대인이 인터넷을 하지 않으면, 개똥녀 사건 따위는 애초에 없었겠지만, 반대로 정보의 속도가 느려서 의식이 진보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 밸런스는 두 발로 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왼 쪽 발을 내딛으면, 무게 중심이 불안정해서 자연스레 오른 쪽 발을 내딛고, 또 불안정해서, 왼 발 > 오른 발 > 왼 발 >  오른 발... 을 교차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수영도 왼 팔과 오른팔을 저어가며 나아가는 것이고, 정치도 진보와 보수가 교차하며 발전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보다.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도 하지만, 인류가 살아가기 위해서 계속해서 문제를 필요로 하기도 하다. 인류의 숙명이다.




3. 에너지 혹은 밸런스



문제란, 문제가 되는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전에 에너지의 선순환(work)이 무엇으로부터 방해를 받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work)는 에너지가 가는 길, 1cycle 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죽은 것이 문제가 된다면, 사실 '죽음'이라는 사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해오던 삶이 방해를 받은 것이다. 맞아죽건, 병으로 죽건, 스스로 목숨을 끊건 간에, 삶이 어느 시점에서 선순환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죽음은 삶의 그림자일 뿐이다. 

누군가에게 주먹으로 얻어맞았다면, 보통 문제가 되지만, 만약 나의 직업이 권투선수 라거나 이종격투기 선수라면, 똑같이 맞는다는 행위가 있더라도 그것은 일의 선순환일 수가 있다. 요는 사건, 행위를 볼 것이 아니라, 포지션과 진행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일(work)는 자전거의 패달을 밟는 것처럼, 에너지가 있어야 하고, 자전거의 핸들을 움직이는 것처럼 밸런스가 맞아야 성립된다. 반대로 말해서, 온 세상에 모든 문제는 그 에너지가 고갈되었거나, 밸런스가 무너졌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고, 그러므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외부로부터 에너지를 끌어오거나, 밸런스를 맞추어야지만 해결이 된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0]id: 거시기거시기

2010.07.16 (10:36:39)


문제는 물어야 할 꺼리를 말하오.
우리가 살다가 "이거 뭥미?...엉?" 이런 경우 발생하오.

물론 아무리 큰 문제가 발생해도 안 묻는 사람도 있소.
뭐...이래요래조래...하면 되지 뭘 묻나...이러면 문제는 없소.

이거 뭥미? 로 문제가 발생했소.
그럼 그 다음은 "오, 이런... 우짜지?" 단계가 되고, 해결을 하려 하오.
해결할 생각이 없거나 해결할 필요가 없다면 될대로 되라지 방법을 쓰오.

해결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그 다음엔 도구를 찾게 되오.
우짤라면 뭐든 들어야 우째 볼수 있기 때문이오.

경험이 많으면 딱 보고 척 맞는 도구를 갖다 대는 전문가형이 있소.
잘 맞으면 힘이 적게 들고, 안 맞는 도구를 쓰면 힘만 쓰고 상처 남소.
해결보면 경험치가 축적되고 뿌듯하오.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면 내 안에 너 있다. 곧 문제 안에 답 있다이오.
문제의 구조를 알면 답이 나온다는 것이오.

그런데 ...
이건 뭥미? 는 항상 끌려 다니는 입장이지만
이건 뭘까~~~~요? 맞춰바바바바....메롱
이런 사람들이 있소. 공식을 아는 문제쟁이들이오.

아...내 문제가 석 장이오.
구조론 공부하러 가오. 끙...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0.07.16 (16:44:56)

삶은 고해다..임재범의 고해가 생각나오^^
고란 무엇이라고 부처가 얘기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서 써 보았소.

 엄밀하게 부처의 말을 따져 본다면 부처가 한 말은 "오온은 고다,오취온은 고다"이오.
오온은 색수상행식 이오.
색은 물질인 몸을 뜻하고 수상행은 정신이고 여기의 식은 마음이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의도로 행해져 업형성에 관련하여 태어남을 부르는 형성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되오.길어지니 이 얘기는 그만하고...
색에서 다시 안이비설신의 (몸의 구성)로 분화되오.
안이비설신은 외부의 대상을 감지하고 그것의 의해서 일어나는 마음를  인지하오.
그래서 외부 대상을 감지하여 일어나는 5식과 정신과 마음을 감지하는 6식(의식)을 통털어 일체는 12처라고 하오.
그래서 여기서 일체는 색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안이비설신의가 몸과 외부의 대상,마음 정신을 모두 감지하고 인지하는 기능을 모두 역할에 맞게 다 포함하고 있음으로 일체는 오온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는 것이며,
곧 오온은 존재를 가리키고 있다고 보는 것이오.
일체는 안이비설신의(여섯 감각기관-내입처) 이고 이에 대응하는 대상은 색성향미촉법(외입처)이오.
그리고 거기서 각각 여섯가지 의식(意識)이 생겨나서
보는 것에 대한 의식(안식)
듣는 것에 대한 의식(이식)
맡는 것에 대한 의식(비식)
감촉에 대한 의식 (설식)
사물에 대한 의식(의식) -마음과 정신을 감지

이런 형태로 사람은 구성되어 있소.

불교는 크게 두 갈래 길이  있으니 세간과 출세간인데...이 둘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과 같고,절대성과 상대성의 경로를 갖고 있으니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이오.
부처는 연기법을 발견하고 12연기로 존재의 한 싸이클을 얘기했소. 그리고 그 한 싸이클이 끝나면 죽음이고 다시 시작되면 태어남이오. 이것이 무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오.
그러나 태어나는 것이 같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삶에서 "의도"와 관계된 것들 중에서 그것이 쌓임으로 인해서 업이되어 재생을 부른다는 것이지만...
지금의 나와 나의 업 형성으로 인해서 태어남을 갖는 존재는 전혀 다른 것이오. 그러나 업형성의 결과로 인한 태어남이기에 또한 다른것도 아니오. 그러나 같은 영혼이 계속해서 윤회한다는 것은 불교의 의미가 아니고 다른 종교들의 해석일 뿐이오. 불교의 업은 곧 지금의 의도이오.


업형성을 파괴시키는게 부처가 말한 해탈이고 열반으로 가는 길이오. 그래서 사성제(고집멸도)를 얘기했고 8정도를 얘기했소.
불교의 궁극적 지향점은 해탈이므로 부처는 존재의 싸이클을 벗어나는 것이었소. 예를 들어 둥글게 도는 원을 이탈하는 것이고, 연기법을 벗어나 버리는 것이오.
그러나 벗어나기 위해서는 집착을 가져서는 안되오. 집착을 벗어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고, 안이비설신의로 대상을 감지하는 그것의 기능이 오염되지 않아야 한다고 했소.
그저 왜곡없이 잘듣고 ,맡고...의 기능과 화났구나,생각하는 구나, 분노하고 있구나 ,기쁘구나...등등 마음을 있는 그대로 주시해서 잘 알아차리고 거기서 더 확장시키지 말고 멈추라는 것이고보면
부처의 주장은 곧 존재의 바른 기능을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되오.
존재를 바르게 쓰지 못하면 해탈이고 뭐고 없다는 얘기가 되오. 그 바르게 가는 길이 8정도이고 보면 정견은 사성제를 제대로 보고 알고 이해하는 것이오.


고집멸도... 부처가 본 고는 모든 형성된 것은 영원하지 않고 변화하기에 무상한데 그래서 무엇인가 그것의 실체라고 할 것이 없어서 무아인데 무아인 것에 집착하여 생기는 괴로움, 그것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기에 그것을 고라고 했소.
산과 들도 사람도, 기쁨도 변하여 슬픔이 되고 슬픔도 변하여 기쁨이 되고 계속 변하고 있소.변하기에 고인 것이오.
하지만 그 변화를 이해하여 부처는 해탈의 길을 발견한 것이고 보면... 변하지 않고 영원한것 법칙으로 확립된 것.그것이 연기법이고 보면 그래서 그것이 진리인 것이고 보면,
연기법을 발견하였기에 연기법을 벗어나는 길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오.
하나를 보면 바로 다른 하나가 따라나와 주어야 하오.
연기법과 해탈은 늘 같이가오. 불교에서 연기법을 보지 못한 사람이 해탈을 할 수 있을까..혹은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드오.
해탈이 이해가 안가면 연기법이 이해가 안된것이오. 흠....^^;
안의 뇌와 바깥의 뇌도 같은 의미라 생각되오.
세상이 변해감에 따라 뇌도 그렇게 세팅이 되어야 하고, 그래서 세상이 변함에 따라 관습,도덕,윤리,법도 변해가야 하는 것처럼, 자연상태 보다는 도시의 모습에 더 익숙해진 것처럼,
그러나 아직 인간의 뇌는 도시에는 덜 적응이 되어 스트레스를 받는 것처럼... 불교의 목적은 안이비설신의가 감지한 대상들로 인하여 왜곡된 마음을 만들어 내지 않고 또한 왜곡된 마음들로 인하여 스트레스를 안받는 것이오.
그래서 갈애가 일어나 집착하는 마음이 생기기전에 마음을 알아차려 그것에 집중하는 것이고, 그렇게 관하는 것이 그 마음의 실체를 보는 것이기에 그 마음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오.

하여 부처가 말한 삶은 고해다.라는 것은 삶 자체가 고다.오온 자체가 고다.라는 것 보다는 연기법의 법칙에 의하여 무한하게 순환하고 있는 그 상태를 고라고 한 것이고 ,또한 대상과 접촉하여 일어나는 마음들에 집착하기에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라고 한 것이고 보면, 역으로 생각해보면 집착 안하면 되는 것이오. 그래서 집착을 벗어나는 바른 길을 제시한 것이오.
의도에 의해서 업 형성이 나타나지만 인간으로의 태어남이 없으면 해탈도 없는 것이어서, 고해가 아니면 해탈도 없는것과 같다.라는 말이어서 세간과 출세간은 그렇게 같이 가는 것이라고 보오. 그러나 엄밀하게 하자면 오취온이 고를 부른다는 것이지 삶 자체가 고라는 것은 아니었소. 한편으로는 업형성에 의해 물질인 존재가 나타난 것이기에 오온이 바로 고다.라고 하지만 그것은 너무 인식을 확대한 결과라고 생각되어서 지금 상태의 현재의 나를 보아야만 하므로 오온이 고가 아니라 오취온이 고다.라고 해야 지금의 상태에서 합당한 말이라고 생각되오. 잘못된 인식의 결과로 나타난 느낌들과 마음이 고라라는 것이오.
상대적으로 볼 수 있기에 절대적인 것이 보이는 것처럼 실체와 그림자는 늘 같이가오. 빛과 어둠이 같이 있을 수 없지만 그러나 늘 같이 있소.


부처가 발견한 연기법,해탈의 길이 곧게 나 있듯이 노무현의 길도 곧게 나 있소. 그런데 곧게 나있는 그 길을 모두 어려워 하오. 보이는데도 어렵소. 이것이 출세간의 길이라고 본다면, 이명박의 길은 세간의 길이오. 위의 두 사진을 놓고보니 더 확연해지오. 아슬아슬 한치앞도 모르게 위태한 삶들..대체로 그렇게 살고 있소. 그러나 대체로 그 길을 따라가고 있소.
세간길과 출세간의 길..이 역시 욕망이 어디를 향하느냐,어떻게 단속을 하느냐, 바른 이정표를 보고 가느냐, 아니냐일 것이오.


하지만 불교는 세간법도 중요하고 출세간법도 중요하오. 궁극적 지향은 출세간의 길이지만 세간의 길에서 출세간의 길을 같이 가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오.
우리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분분투하지만 결국 그것은 깨달으면서 사는 길을 가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오.
부처가 인간의 수명대로 깨달은 바를 실천하고 갔듯이 우리도 우리가 깨달은 바를 실천하고 가야할 것이오.
각자가 깨달은 바의 자신의 삶을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이 눈앞에 놓인 문제 해결과 동시에 문제의 원인을 보는 것일 것이오.


불교에서 해탈이란 사성제와 팔정도를 제대로 아는 것이고 그것을 통하여 열반으로 향하는 길이지만, 사성제와 팔정도를 설명하기 위해 일단은 연기법이 필요하고 12연기를 이해해야 하고,무상.고 무아를 알아야 하고, 오온과 12처에 , 의식에 대해서 전반적인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듯이 그리고 이러한 것이 다시 자신에게로 수렴되어 자신을 해체하여 가는 과정을 통하듯이 ... 여기에서 파생된 많은 불설과 비불설들이 혼재하여 현재 불교를 이루었듯이 ..여기에도 작용 반작용은 내재되어 있으며, 불교를 이해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모색되기도 하였소. 그러나 불설은 직관과 관찰, 통찰 없이는 상당히 난해하기도 하다고 생각되오.


부처는 인간의 삶에서 고통을 보았기에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고통이 되어 버렸기에 맨 처음 문제의식이 발현되었던 것이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도전한 것이며, 그 결과 발견한 것이 연기법이고, 연기법을 통하여 찾아낸 해법이 해탈과 열반의 길이었고 그 길을 가는 통로는 사성제와 8정도였소.
부처의 시작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고 마지막도 인간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소.그래서 철저하게 존재에게 초점이 맞추어져있고, 자신 스스로를 해체하여 인간안에서의 답을 찾은 것이라 볼 수 있소. 내가 보는 모든 것은 나의 인식으로 생겨난 것이고, 그렇게 많은 객체들의 인식활동 결과가 현재이고 인간의 문명이므로 곧 스스로를 보는 것이 해결의 실마리라고 본 셈이오.
지금의 몸에서대상을 감지하는  여섯감각 기관을 잘 관리하는 것이 인식체계를 바르게 잡아주기에 스트레스 덜받고 바르게 사는 길이라고 얘기한 것이고 보면, 세간의 길에서 그것이 출세간으로 가는 길이었던 것이오. 그러면 의식은 맑아져 바른 것을 인지하고 알아차리게 되어 그쪽으로 관심이 증폭될 것이오.
그리고 이것을 사회로 확장하여 본다면 바른 언론의 역할이 될 것이오. 바른 언론이 나와야 사회에 바른 인식체계가 잡힐 것이오. 바른 인식체계가 잡히면 그 사회의 의식이 높아지오. 많은 문제들이 해결 될 수 있소.


대략 이렇게 불교를 이해해 보고 있소.

다시보니 너무 길어졌소.양해부탁하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양을 쫓는 모험

2010.07.16 (18:55:44)

풍성한 댓글을 보니, 아란도 님께서 양모를 무쟈게 좋아하는 것 같소. ^^
글을 읽으면서 어쩐지 반야심경을 외는 듯한 느낌이 들었소.

나중에 기회가 되면 글을 쓰겠지만, 동양은 밸런스에 의한 문제해결, 서양은 에너지에 의한 문제해결을 해왔소. 동양에는 음양사상, 서양에는 인과율이 있었기 때문이오. 그런데 동양에서 인과율로 시작되는 논리학이 발전하지 못한 그 이유가 사실은 불교의 연기론 때문이오.

부처는 명상을 통하여 연기를 보았겠지만, 연기론이 일반화 되었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에 시간을 무한확장하여, 시간의 기준점이 없어 인과관계를 증명하지 못하게 되어버린게요. 반대로 서양은 작은 사건 단위의 인과를 증명하지만, 사건과 사건이 보이지 않게 맞물려 있음을 알지 못하므로 오류가 생기는 것이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0.07.16 (21:49:35)



댓글의 양으로 본다면 단연 그렇소..하하^^

어떠한 사상이던지 동양은 최초의 시작하는 사람에 의해서 이미 완성되어 나왔고,서양은 처음부터 완결되었다기 보다는 보완을 하는 측면으로 진행되어졌다고 생각되오.
또한 동양은 그 사상들을 일부 각색은 하지만 대체로 그대로 적용하려 해왔고,
서양은 하나의 사상에 덧칠하거나 아주 새롭게 각색을 하기도 하였다고 생각되오.
서양은 사상을 그 시대에 맞게 적용했다고 생각되오. 반면에 동양은 그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이 조금 부족했소.
원본이 변했다고 하기보다는 시대가 변했기에 적용방식과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방식이 바뀐 것이라고 보오.
동양은 원본보전에 힘쓰기에 응용적인 측면이 약하지만 서양은 그 시대에 맞게 원본을 늘 재해석하기에 응용측면이 강했다고 생각되오.
그래서 많은 '..주의,사조'들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생각되오. 그리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정치에 이용했다고 보오.

동양에서 논리학이 약한 이유는 최초의 사람이 스스로 완성하여 후학을 길렀고 사고가 거기로 고착화 되었고, 더이상 어찌 손볼 수 있는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오. 그러나 불교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불교를 나름대로 해석하는 논사들을 보면 논리적이기도 하오.그러나 그것이 불교라는 틀안에서 진행되어지는 것이기에 ,부처라는 사람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기에 그것에 매여있는 경우들이 많소. 최초의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느냐가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된다고 생각하오. 그래서 그러한 것이 종교적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오. 그러나 그러한 것만 과감하게 해결할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지오. 그러나 그러기가 어렵다는 것이기에....
새로운 사상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고, 그 사상들이 인정을 받으려면 충분한 근거가 확보 되어야 하오. 그러나 대체로 근거가 부족한 것들이 많다고 보오.

동북아시아 사상이 거의 불교로 흡수통합되게 된것도 그러한 이유일 것이오. 현재 동북아시아 불교는 거의 중국의 사상들을 다 흡수하고 있소. 그래서 그리스 철학과도 맥이 통하는 부분들도 있소. 특히 대승불교의 한 부류인 여래장 사상 측면과 선의 미학적인 측면이  그리스 철학을 흡수한 기독교의 사상과도 통한 측면들이 많다고 주장을 하고 있소. 동양사상+불교, 그리스철학+ 기독교 이렇게는 기본적으로는 소통되고 있다고 나도 생각하오.
그러나 부처가 말한 불교에서 보면 얘기는 조금 달라지기도 하오. 그동안 불교는 해석하는 것의 차이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인식된 과정에서 부처가 전하고자 한 방향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되오.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불교가 사람을 때로는 옥죄게 하는 결과도 있소. 죽음 문제도 그렇고, 업이라는 것에서도 그렇고, 관계적인 측면을 설명할 때도 그렇고...대체로 인간을 옥죄는 방향으로 흘러왔소. 그것이 종교의 가장 큰 특징이오. 기독교가 원죄설이나 등등으로 사람을 옭아매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보오.

불교에서 인과관계를 증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숙명처럼 잘못 오도 되어 버렸다고 보오.
부처는 언제나 원인과 결과를 얘기했소. 단 그것을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그 안에서 얘기했소.
부처는 시간을 무한확장하지 않았소. 오히려 언제나 확장되는 것을 상견이라 하여 경계했고, 일체는 12처에 제한했다고 볼 수 있소.
세계를 제한 한 것이오.
시각의세계. 형상의 세계. 시각의식의 세계,
청각의 세계. 소리의 세계. 청각의식의 세계
후각의 세계. 냄새의 세계. 후각의식의 세계,
미각의 세계. 맛의 세계.  미각의식의 세계,
촉각의 세계. 감촉의 세계. 촉각의식의 세계,
정신의 세계. 사물의 세계. 정신의식의 세계 이오.

시간을 무한확장 하게된 것은 대승불교에서 부터라고 볼 수 있소. 그것은 인식에 의한 확장이었소. 좀 더 풍부해지기는 하였지만 주체할 수 없을 지경까지 가버린 것도 사실이오. 이것은 범아일여 사상의 영향도 있을 것이오.
부처는 시간을 제한하였지만 공간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이 드오.부처는 경험하고 인지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조금 그 부분은 의문이 드오.
부처는 연기법의 시작을 알 수도 없고 끝도 알 수 없다고 했소. 그 이유는 사건이 지금의 나부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오.
그래서 인간에게 관점을 맞춘것이라고 생각되오.

그러나 이러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뭔가 부족한 부분들을 느끼오.
어쩌면 열반보다는 삶을 해결해야 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오.그리고 삶을 해결한 것이 해탈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오.
그래서 세상을 해석하는 경로인 구조론에 관심이 가는 것이오.
부처는 삶의 복잡 다단한 것보다는 그것에서 자연스럽게 빠져 나가는 것, 삶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방법, 인과의 의해 크게 포용해버리는 자비를 선택한 것이라 보오. 그리고 그 인과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사는 것, 높은 정신 세계로 도약해버리는 것을 선택했다고 보오. 스트레스 받지 않고 마음에 휘둘리지 않으며 사는 길을 찾은 것이겠지요. 그것이 부처의 방식이었다고 생각되오.

부처는 우리에게 인식된 존재의 시간을 충실하게 살다갔지만 부처는 시공을 뛰어넘었다고 생각되오.
그러나 시공을 뛰어넘는 방법이 열반이지만 열반이 구체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 사실이기에 부처의 공간 개념에 대해서는 좀 더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지오. 그리고 다소 불교에서 시간과 공간 개념이 모호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불교의 개념은  모두 조건지어져서 생겨난다고 보기 때문인듯하오.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색수상행식)이  형성의 괴로움에 속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일 것이오, 괴로움은 있어도 괴로워하는 자는 발견할 수 없다는 것도 막상 파고 들어가 해체하여 보면 행위하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오. 곧 무아를 뜻하지만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가 무명이므로 무명은 조건적인 것이어서 자양분을 수반하게 되오. 그 자양분이 탐진치이고, 그것에 갈망하는 마음이 생겨 집착하게 되고, 그 집착에는 의도가 수반되기에  업이 되는 것이다.라고 부처는 설명하고 있소.
대체로 이런 방식으로 불교는 설명되고 있어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일부러 찾지않으면 조금 모호해지는데 대승불교에서는 그런 모호성을 극복하고자 하였는지는 모르나 인식을 무한 확장하다보니 조금 난해지기도 하였다고 생각되오.



댓글을  약간 수정했소.^^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양을 쫓는 모험

2010.07.17 (23:41:08)

지배계층이 불교의 연기론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서양은 암흑시대 이후에 르네상스가 일어났지만, 동양은 바로 얼마전까지도 암흑시대라고 해야할 지도 모르겠소. 어쩌면 지금도...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0.07.18 (19:00:54)


아마도...
지금도 쇄국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도...바깥도 아음안에도... 오랜 시간동안의 주입이란 무서운 것이오.
지배계층은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것이지만 여전히 지배층은 이용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고,
또한 오랜 시간 주입된 결과는 그것에 반대도 찬성도 없는 이상한 형태로 진행되었다는 것이오. 방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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