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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5]오세
read 6565 vote 0 2010.07.12 (00:55:20)

형제간의 다툼은 잦다. 그야말로 일상이라 부를만 할 정도이다.  특히 하나의 자원을 놓고 다투는 경우가 많다.
공을 놓고 다투기도 하고 인형을 놓고 다투기도 하고 게임을 놓고 다투기도 하고, 특히 다른 무엇보다도 부모와 관심과 애정을 놓고 다툰다.

구조론적으로 보자면, 형제는 저울의 양날개를 이루고 부모는 이를 통제하는 축의 역할을 한다. 부모는 둘 사이의 다툼이 일어날 때 축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관계의 균형을 유지해준다. 부모는 축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개입으로도 둘 사이의 다툼을 다스릴 수 있다. 그러나 많은 부모들이 자신이 축임을 잊고 날개에 직접 개입하다가 오히려 싸움을 부채질하곤 한다. 아이는 아이대로 감정이 상해 씩씩 거리고 부모는 부모대로 말려도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 때문에 화가 나 얼굴이 울긋불긋해지는 상황. 아마 다들 경험했으리라.

오늘 농구를 하는 도중에 반대편 코트에 부모와 남자아이 두 명이 어울려 농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곧 남자 아이 두명이 서로 공을 갖겠다고 다투고 있더라. 급기야 동생놈인지, 형인지, 암튼 공을 냅다 상대방에게 집어 던진다. 나는 농구를 하다말고 반대편에서 이를 지켜보았다. 과연 아이의 부모가 어떤 식으로 개입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내가 본 부모들의 개입은 거의 백이면 백, 뻔했다. 부모가 보기에 공을 좀 많이 가지고 놀았다 싶은 아이로부터 공을 뺏으면서, "니가 공을 더 많이 가지고 놀았으니 이제 양보해야지?"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니가 형이니, 동생한테 양보 좀 해야지?" 이랬다. 부모가 직접 공의 소유권을 두고 형제라는 두 날개 중의 한 편을 듦으로써 분쟁을 조정하는 전략을 쓴 것이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거의 모든 부모가 그랬다. 물론 아이들은 이에 쉽사리 승복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관점에서 공의 소유권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공을 충분히 다루면서 부모로부터 주의와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의 문제이며 더불어 공을 다루면서 자신의 힘과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싶은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흔히 부모들은 이른바 <합리적>인 개입을 한다.

그러나 이 때의 합리성은 주로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볼 소유 시간 같은 것을 고려할 뿐 아이들이 형제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느끼는 형 또는 동생이란 역할에 대해 느끼는 압박감 및 박탈감, 그리고 부모로부터 관심과 애정을 좀 더 많이 차지하려는 바람과 그로 인한 형제 관계에서의 긴장감을 고려치 않은 반쪽짜리이다. 합리일지는 몰라도, 합정(合情)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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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처음엔 아버지가 몇 번 아이들을 가볍게 나무라는 듯 보였다. "서로 패스 하면서 해야지?". "00야 형한테 공좀 줘야지?"
뭐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계속 농구공을 독점하려고만 들었지 사이좋게 차례차례 슛을 쏘는 일은 없었다. 서로 공을 쥐고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많이 쏘면서 골을 넣을 경우 부모로부터 받는 칭찬을 갈구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 때 아버지의 개입이 달라졌다. 더 이상 형제에게 서로 공을 돌리라는 말을 하는 대신, 아버지가 갑자기 분주하게 뛰어들면서 아이들과 2:1의 대칭관계를 만들었다. 그는  아이들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긴장감을 불러넣었고 이를 통해 아이들이 서로 패스를 주고 받지 않으면 아예 슛을 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형제간의 대립관계는 끝이 났다. 마치 전쟁이 터지면 여야할 것 없이 국회에서 전쟁결의안을 통과시키듯, 그렇게 아이 둘은 아버지란 적을 두고 서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더 이상 아이들에게 공을 돌리라고 잔소리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냥 아이들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 만으로도, 아이들로 하여금 서로 협력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 만으로도, 형제간의 대립을 순식간에 종식시켰다. 나는 이것이 구조론에서 말하는 <외부에서 에너지 끌어오기>와 비슷한 패턴임을 알아차렸다.

구조론에선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로 내부에서 지지고 볶는 둘에게 외부에서 충격을 가함으로써 각자에게 포지션을 부여하고 갈등을 종식시키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축의 개입이 양 날개에 대한 개입보다 더욱 효과적임을 역설하고 있다. 오늘 내가 관찰한 사례는 정확히 구조론의 이러한 통찰과 맞아떨어졌다. ㅇ

외부(부모)의 개입, 서로 싸우고 있던 아이들에게 외부의 적이라는 공통목표를 줌으로써 아이들을 하나의 팀으로 묶어 내부의 갈등을 종식시켰으며, 아이들 각자(날)에 개입하는 대신 아버지(축) 스스로 포지션을 이동함으로써(내부의 개입자에서 외부의 개입자로) 아이들 사이의 갈등(양날의 불균형)을 종식시켰다.

결국 아버지의 개입은 성공적이었다. 곧이어 어머니가 팀에 가세하면서 아버지+어머니 vs 형제의 구도로 시합이 진행되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음은 물론이다. 이는 분명 구조론적인 접근이었다. 이는 구조론적인 개입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내게 던져주었다.

구조론적 개입은 갈등의 양극, 양날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 축의 차원에서 개입이 이뤄져야 하며, 이는 축이 외부의 에너지를 계에 끌어들일 수 있는 포지션으로 이동하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 그렇게 해서 양날의 불균형을 해소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없이 최소한도의 개입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끌어낼 수 있다. 오늘 내가 본 광경이 이를 잘 드러내주고 있음은 물론이다.


[레벨:15]오세

2010.07.12 (01:13:57)

참, 이번에 구조론 공부방을 하나 만들었소.
gujoronstudy.tistory.com
심심하신 분들은 놀러오기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17]안단테

2010.07.14 (00:20:45)

오세님, 방금 구조론 공부방으로 들어가 댓글 하나를 남겼는데 웬 난데없이 '비밀댓글'로 뜨는데, 이유가? 제가 뭐를 잘못 눌렀을까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17]안단테

2010.07.14 (00:28:01)

아, 다시 수정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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