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의 전쟁 유목민이 강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유목민의 치명적인 약점 때문이다. 약점을 보강하면서 강해지는 것이 진화의 원리다. 유목민은 숫자가 적다. 유목민 족장이 겁내는 것은 자기 부하를 잃는 것이다. 직속부하의 숫자가 적으면 금방 부족 내에서 열세에 처하고 서열이 뒤로 밀린다. 유목민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은 부하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직속부하여야 한다. 배신을 밥 먹듯 하는 유목민 세계에서 암살은 흔히 일어난다. 어렸을 때부터 동고동락하던 동료가 아니면 신뢰할 수 없다. 그런 동료를 잃는다면 치명적인 손실이다. 농경민이 유목민을 쳐부수는 방법은 어떻게든 부족장의 직속부하 숫자를 줄이는 것이다. 넓은 들판에서 대규모 회전을 벌여 너죽고 나죽기로 만든 다음 근접전을 벌여 인명희생을 강요하는 방법이다. 로마군은 이 수법으로 게르만족을 손쉽게 격파하곤 했다. 곽거병도 마찬가지다. 농경민은 숫자가 많다. 부하가 없으면 황제가 만들어준다. 부하를 희생시켜서라도 전쟁에 이겨야 한다. 농경민과 유목민이 싸워서 같은 숫자가 죽으면 농경민의 승리다. 유목민은 손실을 보충할 수 없지만 농경민은 언제든 백만대군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근접전을 선호한다. 유목민은 인명희생을 겁내므로 자기편은 안 죽는 얍삽한 전쟁을 한다. 근접전을 피하고 멀리서 활만 쏘아대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정적인 승부가 나지 않는다. 유목민끼리의 전투는 어느 쪽도 이기지 못하는 교착상태가 된다. 유목민 세계에서 절대강자는 잘 등장하지 않는다. 징기스칸은 다르다. 금나라에 한동안 잡혀 있었던 징기스칸은 농경민의 전투방식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유목민 방식의 싸움에 능한 자무카와 옹칸에게 여러 차례 패배하고 결사대를 만들었다. 죽는 것을 겁내는 유목민을 설득하여 오히려 죽기를 원하는 부대를 만든 것이다. 이후 몽골군은 근접전을 피하여 자기편 인명희생을 최소화하면서도 결정적인 승부처에는 결사대를 보내서 소모전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러므로 천하무적이 되었다. 인명희생을 겁내면 이길 수 없고 인명희생을 겁내지 않아도 이길 수 없다. 두 가지 태도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다. 두 가지 방법을 동시에 사용할 때 망치와 모루처럼 된다. 인명희생을 겁내는 부대로 외곽을 포위하고 결사대를 정면으로 보내는 수법이다. 죽기를 각오한 부대로 적을 유인하고 죽기 싫은 부대로 포위섬멸한다. 죽기를 싫어하는 유목민이 왜 징기스칸의 무식한 전술을 받아들였는가? 그는 종교를 이용했다. 유명한 무당의 신탁을 이용해 자신을 신과 연결된 특별한 사람으로 포장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것이 먹혔을까? 다들 자신을 신의 장남으로 포장하곤 하지 않나? 다들 자신을 신의 은총을 받은 특별한 사람으로 포장할 텐데 왜 징기스칸의 선전만 먹혔을까다. 징기스칸의 선전이 먹힌 것은 그가 언제나 의리를 지켰고 그러다가 배신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해를 봤지만 신의 특별한 돌보심에 의해 죽지 않았다. 신화의 탄생이다. 농경민은 인명희생을 가볍게 여기다가 망하고 유목민은 인명희생을 겁내다가 망한다. 어느 쪽이든 망한다. 희생을 해도 망하고 희생하지 않아도 망한다. 돌이켜보면 진보는 언제나 희생에 의해 성장했다. 전태일부터 노무현까지. 동료를 희생시키고 자기만 살겠다는 자는 농경민처럼 망한다. 희생을 거부하고 이익만 찾는 황교안은 망한다. 보수는 희생하지 않고 남을 희생시키므로 망한다. 사회의 약자를 희생시키고 타인을 희생시키는 게 보수다. 진보는 숙명적으로 자신을 희생시킨다. 그러나 약자를 희생시키지 않는다. 자신은 손해보지 않고 공짜로 이기는 방법은 없다. 최소의 손실로 최대의 효과를 얻어내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보다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할 뿐이다. 토전사에서 누르하치를 다룬다고 하던데 과연 조선과 명이 누르하치를 이길 방법이 없었을까 하는 논의가 있었다. 간단하다. 누르하치를 이기면 그 땅은 모두 네 땅이다 하고 선언하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토전사에서 나온 이야기인지 모르나 필자와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이 있다고. 군벌을 키우면 된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던데 구조론적인 사유를 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 모양이다. 당나라 시대는 절도사가 있었고 고려시대는 무신이 있었다. 그때로 돌아가기 싫었던 것이다. 명은 황실을 위협하는 절도사의 권력이 싫었고 조선은 고려 무신정치의 악몽이 싫었다. 명과 조선이 불과 2천 명으로 시작한 누르하치를 이기지 못한 이유는 손해볼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허생전에도 나온다. 청나라를 이길 방법은 있지. 그런데 그 넓은 옷소매부터 자르고 시작하자고 하니 이완대장이 뒷문으로 도망쳤다고. 이길 생각은 있는데 손해볼 생각이 없다. 당시 여진족은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있었다.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과 몽골세력이 서로 견제하고 있었다. 이들을 분열시켜 균형을 유지하게 하면 된다. 그렇게 못하는 이유는 현지에 파견되어 있는 장군에게 절대권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휘관에게 외교권을 내줘야 한다. 대장이 해서여진이나 야인여진과 교섭하여 족장을 자기사람으로 만들면 조선왕조 입장에서는 반역이다. 이성계는 그런 짓을 했다. 통두란을 귀화시켜 조선인으로 만든 것이다. 만약 조선의 어떤 장수가 이성계 행동을 했다면? 여진족 일파를 자기 부하로 만들어 누르하치를 쳤다면? 반역자로 몰려 사형을 당했을 것이다. 적과 내통했다고 백의종군을 시켰을 것이다. 조선은 병사가 없어서 진 것이 아니고 실력이 없어서 진 것이 아니고 지휘관에게 알량한 권력을 내주기가 싫어서 패배한 것이다. 명나라는 언제나 장수를 죽였다. 원숭환도 죽고 모문룡도 죽었다. 이겨도 죽고 져도 죽는다. 명의 조정은 장군이 이겨서 개선하기 보다 싸우다 적과 같이 죽기를 바란다. 조선군 역시 함경도와 평안도의 날랜군사에게 전권을 주기 싫어서 강홍립과 같은 문관을 파견하거나 하는 식이었다. 왜 서울의 문관을 보내는가? 왜 현지인을 사용하지 않는가? 장군과 병사가 특별한 관계를 맺지 못하게 방해하는 제승방략의 꼼수다. 전쟁은 한쪽 팔을 내주고 적의 목을 치는 것이다. 조금도 내주지 않고 이기는 방법은 절대로 없다. 투자하는 게 없는데 이익이 있을 리 없다. 왕조의 성씨가 바뀌는 한이 있더라도 싸워서 이길 생각을 해야한다. 이민족에게 당하는 게 습관이 되면 영영 일어서지 못한다. 아랍이 왜 망했나? 징기스칸에게 망한 트라우마 때문이다. 한 번 민족의 기가 죽으면 영영 부활하지 못한다. 이성계는 성공한 무신이다.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최영을 거쳐 마침내 이성계가 대권을 차지한 것이다. 또 다른 이성계의 등장을 각오하지 않으면 누르하치를 이길 수 없다. 이순신이 선조의 자리를 빼앗는다 해도 감수해야 한다. 이길 방법은 있다. 의사결정을 못 할 뿐이다. 부하의 희생을 막으면서도 충신의 희생을 끌어내야 한다. 보수는 남을 희생시키고 진보는 자기가 희생한다. 조선은 조총이 있고 명은 대포가 있었다. 전투를 계속하다 보면 전술이 숙달된다. 조총전술은 여러 가지다. 사정거리가 1킬로나 되는 대조총을 이용하여 저격수를 쓰는 방법도 있고 밀집사격을 하는 방법도 있고 단계적 사격을 하는 일본군 수법도 있고 조준사격을 하는 방법도 있다. 그런 것은 전투를 거듭하다 보면 저절로 깨닫게 된다. 조선과 명은 전력이 약한 것이 아니고 전투경험이 없다 보니 전술을 발달시킬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장군에게 절대권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관이 여진족을 토벌할 때도 태종이 여진을 토벌할 때도 잘 싸웠다. 현종이 거란을 물리칠 때라면 강감찬이 언제든 왕을 죽이고 찬탈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윤관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받아들여야 강군이 된다. 통제가능성의 문제다. 왕이 직접 출전하지 않으면서 천 리 밖에서 전쟁을 이길 방법은 없다. 곽거병과 위청은 황족이었기에 이길 수 있었다. 왕이 출정하거나 왕자가 출정해야 한다. 세종대왕 때 화약무기는 문종과 세조가 만들었다. 왜 왕자가 나설까?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다. 의사결정을 누가 하느냐가 중요하다. 이길 방법은 언제나 있다. 단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타인의 희생을 막는 자가 부하의 희생을 끌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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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손해 보지 않고 공짜로 이기는 방법은 없다. 최소의 손실로 최대의 효과를 얻어내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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