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공자소환인가? 진정한 인류의 스승은 공자 한 사람뿐이다. 갈릴레이는 불필요하게 동료 학자들과 마찰했고, 뉴턴은 쓸데없이 연금술 따위를 연구했다. 둘 다 기독교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후배들과 충돌했고 노이만은 보수꼴통 행동을 했다. 만화에 나오는 사이코 과학자다. 그들은 모두 자기소개 한 것이다. 상대의 반응을 보고 맞대응하는 습관을 극복하지 못했던 거다. 아인슈타인이 보어와 충돌한 이유는 시스템에 의지하지 않고 혼자 책임지려고 했기 때문이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 그렇다. 이 말은 ‘내가 신이다.’라는 말과 같다. 과학계의 절대기준을 세운 자신이 원칙을 잘못 정하면 이후 줄줄이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힌 것이다. 이런 태도를 아집이라고 한다. 나에 붙잡힌 것이다. 나와 타자를 가르는 선을 넘어야 한다. 내 생각을 말하면 안 되고 천하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삼는 것인데 말이다. 나는 체질적으로 공자와 맞지 않는 사람이다. 타고난 아웃사이더다. 괴짜가 되고 싶었다. 양산박의 도둑이 나의 캐릭터다. 한때 모임 이름을 청석골이라고 지었던 것이 그랬다. 그런데 변방에 웅크리고도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중앙에 믿을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스승이 있기 때문이다. 변방에서 중앙을 향해 도발하며 야유하고 조롱하고 풍자하고 사는 것이 멋지다. 나라를 걱정하는 두보는 꽁생원이고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이백이 멋쟁이다. 그런데 이백이 있으면 두보도 있어야 한다. 이백은 두보를 믿으니 마음껏 노래할 수 있다. 그런데 두보가 없다. 스승이 없다. 스승 비슷한 사람도 없다. 근처에 간 사람도 없더라. 나는 도덕가를 찾는 게 아니다. 진리와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진짜다. 동굴에 숨지 않고 정면으로 태양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 한때는 백낙청이나 강준만이나 김훈이나 최장집이나 송두율을 주목하고 관찰하기도 했다. 알고 보니 똥이었다. 혹은 점점 똥으로 변하고 있었다. 다들 시류에 편승하고 진영논리에 의지하고 패거리에 가담하고 대중에게 아부하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우리나라에 7만 명 있다는 대학교수 중에 사람이 하나쯤 있을까? 없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자를 나는 보지 못했다.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노무현 리트머스 시험지로 검사해보면 된다. 대개 화를 내며 영웅을 질투하고 배 아파하며 소인배의 천박한 근성을 들키고 마는 것이었다. 고유한 자기 에너지 없이 상대의 행동에 맞대응하는 자는 똥이다. 자기 전략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경마장에서 중계하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진중권 똥들 말이다. 자기 계획이 없는 증거다. 어떻게든 상대의 맞대응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하는 자는 똥이다. 왜 나는 이들을 경멸하는가? 그들의 본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잘난 엘리트가 노무현을 혐오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들은 노무현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노무현을 미워하는 패거리에 굴종하는 것이다. 엘리트 계급의 생존본능이다. 본능을 극복하는 지식인을 본 적이 없다. 왜 그들은 노무현을 치는가? 자신이 자객질 하지 않으면 다른 스나이퍼가 자신을 저격하기 때문이다. 진중권 똥이라면 '청와대의 저 미친놈을 끌어내라'고 기세 좋게 한마디 했으니 알리바이 성립이다. 이 정도면 후미에로 맞춤하다. 엘리트가 대중의 편에 붙었다는 의심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다. 김훈과 같은 똥이 노무현이 자기 책을 읽었다 하니 화들짝 놀라는 게 그렇다. '나 노무현과 커넥션 없어. 오해하지 마. 나 그런 사람 아니야. 난 대중을 경멸하는 엘리트라구.' 이런 심리다. 엘리트는 냄새로 구분한다. 영화 기생충이 묘사하듯이. 친노냄새 난다며 코를 킁킁거리는 돼지들 있다. 그들의 의심을 피하여 알리바이 만들기에나 분주했던 똥들이었다. 진중권이 노무현을 깐 이유는 조폭이 한칼 찌르고 감옥 다녀오면 당분간 까방권을 얻는 것과 같다. 까방권을 얻자는 패거리 아부행동.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다. 지성인이라는 말이 있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지식인은 품위가 있고 체면이 있었다. 엘리트는 언제 타락했나? 정확히 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이 뜨고 구소련이 붕괴되면서다. 일부 체면을 차리는 자들도 있지만 그들은 주사파의 품성론을 배운 자들이다. 탈근대 운운하면서 비뚤어진 것이다. 운동권이 일제히 문화계로 방향을 틀어 영화를 만들고 음악을 하고 그런 유행들이 일어난 것이다. 왜 그들은 이문열의 '일그러진 영웅'에 동조하여 영웅 죽이기를 하는가? 영웅이 마르크스다. 구소련의 몰락을 목격한 그들은 근대=나폴레옹=영웅주의=마르크스주의로 동일시하며 탈마르크스로 질주한 것이 결과적으로 이렇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를 추종하다가 변신한 것이다. 근대는 획일화, 대량화, 보편화, 영웅화되므로 그들 탈근대 또라이즘은 다양화, 소량화, 특수화, 탈영웅화되는 것이며 영웅죽이기 하는 것이며 노무현을 죽이는 것이다. 또다시 죽일 만한 영웅을 찾아 눈알을 굴려대고 있다. 그들은 영원히 그 패거리즘의 똥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인종주의가 있었다. 양복을 입어야 출입이 가능한 까페나 턱시도를 입어야 출입이 가능한 파티가 있다. 신사가 아닌 평민계급을 걸러낼 의도다. 인종주의=귀족주의=엘리트주의였던 것이다. 그들은 우월한 인종이거나 계급이므로 점잖은 양반 행세를 했던 것이다. 나폴레옹 이후 히틀러와 마오와 체 게바라 같은 대중의 우상이 등장하면서 그들은 태도를 바꾸었다. 구소련이 몰락하자 그들은 우월한 인격을 가진 영웅상을 내려놓고 엘리트 계급의 패거리 문화에 집착한다. 주사파들만 철모르고 품성론 운운하면서 인격에 집착한다는 논리다. 지성인이 풍모는 사라지고 신사의 에티켓도 사라지고 다들 천박해졌다. 지식은 양아치가 되었다. 지성인은 스페인내전에 공화파로 참전하며 인류의 대의를 위해 뜻을 모은 행동파다. 인류단위의 가치기준이 있다. 지금은 깨졌다. 지성은 파편화되어 천박한 패거리 짓에 골몰한다. 지리멸렬해졌다. 풍자하고 야유하고 조롱하며 뒤에서 쑥덕거릴 뿐 누구 하나 대의를 위해 깃발 들고 나서지 않는다. 그들에게 노무현은 2차대전 시기의 낡은 인물로 보여졌다. '쟤 왜 저래? 지금이 헤밍웨이가 인민전선 뛰고 모택동이 장정하고 체 게바라가 정글 헤매던 시절이냐? 말하자면 이런 분위기다. 그들 똥들에게는 노무현의 철 지난 영웅주의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문열이 영웅의 씨를 말려놓은 지가 언제인데 말이다. 그들은 모두 이문열의 개가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글자 안다는 자 중에 인간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절절히 깨닫게 되었다. 2003년 12월 19일 바람 차가운 여의도 광장에서 말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세상은 사건이고 사건의 에너지고 에너지는 밸런스를 따라가며 용틀임을 한다. 에너지는 응축되었다가 타이밍 맞추어 분출한다. 그들 먹물은 시험문제 풀 듯 정답만 찍으면 된다는 식의 사고를 가졌다. 옳음과 그름의 선택지가 주어진다. 거기서 옳음만 계속 찍으면 정답을 맞추어 승리에 도달한다는 식의 1차원 사고에 매몰된 것이 유시민의 어리석은 정의당 배반이다. 세상이 장난이냐? 정치가 장난이야? 에너지는 타이밍이다. 정치적 올바름으로 정답을 찍지만 트럼프 당선된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가고 기의 파종이 결의 수확으로 가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며 2019년의 수확은 30년 전 레이건 시절에 파종된 가치의 수확이기 때문이다. 레이건 세대가 지금 트럼프를 찍은 것이다. 이런 내막을 먹물들이 알 리 없다. 세상은 1차원 선형으로 가지 않는다. 왜 공자인가? 인간은 백이면 백 모두 배신한다는 사실을 공자가 알았다. 학문은 시스템으로 간다. 개인의 신념을 말하면 안 되고 집단의 의지를 찾아야 한다. 천하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삼아야 한다. 필자가 개고기 식용을 반대하는 이유는 결혼하지 않는 흐름을 간파한 때문이다. 젊은이가 결혼하지 않으면 누구랑 살지? 개와 살고 고양이와 산다. 그러므로 식견반대파가 우세해진다. 20년 앞을 내다보고 움직여야 한다. 그러므로 광야에 먼저 와서 깃발을 꽂아놓고 기다리는 선지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들이 등대가 되어 대중을 바른길로 인도해주는 것이다.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쪽수에서 나온다. 누군가 대중을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때 역사는 크게 들썩이곤 한다. 나폴레옹이 뜬 것은 단순히 싸움을 잘해서가 아니다. 싸울 줄 아는 기술자는 많다. 귀족 출신 장교가 대중을 통제하지 못해서 안 되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연설을 잘했다. 그는 이기는 방법을 설명했고 병사는 전술을 납득했고 그러므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고 그러므로 대오가 깨지지 않았고 나폴레옹이 두 배 속도로 행군해도 도망병은 나오지 않았다. 반면 오스트리아군은 병력의 1/3이 도망쳐 쩔쩔매고 있었다. 왜 나폴레옹은 신속하게 진격하는데 오스트리아군은 꾸물대지? 병사들이 신속하게 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사의 도주를 막으려면 챙겨야 할 것이 많고 이것저것 챙기다가 보면 나폴레옹식의 화려한 기동은 불가능하다. 알고도 당한다. 무엇보다 프랑스군은 자부심이 있었다. 자유, 평등, 인권이라는 혁명정신을 전파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한국의 엘리트들이 이문열식 영웅죽이기에 골몰하는 이유는 엘리트 패거리에 대한 심리적 의존 때문이다. 마찬가지 유럽의 장교들도 계급이라는 한계를 넘지 못했다. 러시아군 장교는 원래 전쟁터에 가지도 않는다. 지휘관은 4키로 밖에서 전황보고서만 쓰는 것이다. 대포알이 떨어지는 전쟁터에서 쌍안경으로 적진을 관찰하는 일은 없다. 이런 데서 틀어지는 거다. 나폴레옹이 이런 짓을 하니까 롬멜이 따라 한 것이고 나중에는 연합국 지휘관도 흉내를 내게 되었다. 패튼이 대표적인 흉내쟁이다. 문제는 엘리트의 타락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점이다. 본능대로 하는 것을 나무랄 수 없다. 패거리에 의존하는 생존본능이다. 그러나 공자의 극기복례는 그 본능을 극복하라는 가르침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의 선제행동에 맞대응을 하고 저격하고 방어를 하고 안티를 건다. 왜? 자신의 고유한 전략과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다음 단계와 그다음 단계에 대한 대비책이 없다. 나폴레옹은 툴롱전투 때부터 어떻게 영국군을 몰아내고 그다음 이탈리아를 침공하고 하며 떠들어댔는데 말이다. 심지어 밥 먹으며 식당에서 신사들을 향해 전술을 자랑하기도 했다. 물론 밥을 먹던 신사들은 소위 정도 되는 하급장교 나부랑이의 괴설을 듣고 ‘쟤 왜 저래? 어디 아프냐?’ 하는 표정으로 슬금슬금 사라졌다. 밥값을 독박쓰게 되었는데 결국은 돈이 없어 떼먹었고 식당주인은 떼먹은 외상값 차용증을 액자에 걸어두고 식당 손님들에게 자랑하곤 했다. 자기 계획은 에너지를 운용하는 시스템에서 나온다. 시스템은 엘리트 계급 내부에서 돌아가는 배타적 인맥놀음이 아니라 인류사 단위의 맥놀이라야 한다. 역사를 이끌어가는 힘은 대중에게서 나오며 영웅은 그 대중의 에너지를 끌어내고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에 걸맞다. 왜 공자인가? 엘리트의 타락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배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패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남아와 아프리카와 아랍국이 가난한 이유는 봉건 부족주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엘리트들 역시 엘리트계급 안에 부족민과 같은 패거리를 만들어놓고 거기에 충성하고 있다. 조중동과 강남 기득권이 하는 소아병적 행태 말이다. 천하를 호령하는 헌걸찬 기개를 그들 창백한 지식인들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없다. 심리적으로 고립되어 영웅의 기상이 없다. 한국에 스승은 없다. 김훈과 같은 똥이나 김용옥과 같은 코미디언이 있을 뿐이다. 노무현 시절에 침묵한 뒷방 늙은이만 있을 뿐이다. 비겁자는 숨고 입이 있는 자는 모두 배반했다. 베드로가 해 뜨기 전에 배반했듯이 그들은 대중의 편이 아니라는 알리바이 만들기 후미에를 했다. 나는 도덕가를 추구하지 않는다. 단지 검은 것을 보고 검다고 말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나는 퇴계를 경멸한다. 남들 앞에 전시하는 위선적 유교다. 하인 300명 거느리는 봉건지주 가부장은 이래야 한다는 노예주를 위한 폼잡기 지침서 같은 것이다. 그렇게 하니 노예가 복종하더라. 소인배가 음모론 따위로 괴력난신을 추구하거나 엘리트가 노무현을 조롱하며 패거리에 아부하거나 본질은 같다. 에너지 없는 자들이 남들이 만들어놓은 시스템을 파괴해서 에너지를 빼먹는 도둑질 심보다. 그들은 사실 노무현이 부러웠던 것이다. 노무현은 에너지의 연주자이다. 에너지를 뭉치고 흩기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 그들은 시험문제 찍듯 정답만 고르면 대중이 따라올 것으로 유시민 착각하지만 대중은 바보가 아니며 타이밍 맞지 않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수순대로 가지 않으면 대중은 움직이지 않는다. 나폴레옹과 이순신과 노무현이 안다. 이기는 방법을 제안하고 그것을 실천해 보여서 대중이 납득하면 거대한 에너지가 형성된다. 그러나 지도자와 대중 사이에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선이 그어지고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식의 조건이 붙으면 대중은 백퍼센트 등을 돌리며 그때부터 모든 일이 꼬여간다. 그 선을 지워서 대중과 지도자가 한 몸임을 증명할 수 있다면 에너지를 다룰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그런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는 역사에 드물다. 그리고 배신자들은 반드시 그 지도자를 죽인다. 엘리트는 반드시 배반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에너지를 빼먹을 방법이 없으니까. 바보들은 나폴레옹의 승전비결을 '의지'에서 찾는다. 의지나 신념이나 정신주의 나오면 똥이다. 그런 거 없다. 나폴레옹은 다음과 그다음까지 계획해놓고 있었고 그러므로 다음으로 가려면 일단 여기를 돌파해야 한다. 그 차이다. 그다음 번 계획이 없어졌을 때 나폴레옹은 죽었다. 자기 계획이 없는 자는 필연적으로 남의 시스템에 빨대 꽂아야 하고 그러려면 이미 배반해 있다. 탈근대 운운은 자기 계획이 없다는 반증이다. 구소련을 추종하다가 구소련의 몰락에 쇼크먹고 자기 계획이 박살나자 비겁해진 것이다. 계획을 잃어먹은 엘리트는 거리의 똥개와도 같다. 동서고금 철학자가 많으나 대개 자기의 견해를 밝히기 바빴다. 누가 물어봤냐고? 그딴거 중요하지 않다. 시스템의 건설이 중요하다. 시스템은 다음 단계와 그다음 단계로 연결된다. 공자는 사업가다. 1단계로 제자를 키워서 세력을 이루고 2단계로 엘리트를 키워 국가를 바로잡는다. 다음은 대중을 일깨워 천하로 나아가는 것이다. 사건이 계속 이어질 때 에너지가 있다. 공자가 괴력난신을 반대하고 극기복례를 주장한 것은 사건의 지속가능성에 방해되는 것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대개 변방에서 점방을 열고 시골 왕초노릇이 분주하다. 천하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
뭔가 반대하는 에너지는 하부구조의 작은 것입니다.
아기는 원래 엄마의 에너지에 빨대 꽂고 빼먹으며 크는 거지요.
그러나 어른이 되었는데도 어딘가에 빨대 꽂고 빼먹을 궁리만 한다면
한계가 있는 것이며 그걸로 2등은 해도 일등은 못합니다.
비꼬고 풍자하고 야유하고 조롱하는 것은 마이너리그입니다.
연상호 행동은 2류지식인의 자기연민 같은 거지요.
70년대에 한국문단을 장식했던 어둠의 자식들 부류.
분노를 초극하지 못하고 분노에 갇히면 평생 2류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에너지는 자기 계획에서 나오는 것이며
세계사를 아우르는 단위의 시스템 건설에서 나오는 것이며
사건의 다음 단계를 제시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며
사건의 기승전결로 가는 관성의 법칙에서 나오는 것이며
기가 승을, 승이 전을, 전이 결을 유도하는 데서 에너지가 나오는 것이며
어떤 반대하는 대상이 있으면 그것은 찌질한 2류에 마이너리그인 것이며
청소년이나 혹은 대가의 습작이나 거장들의 초기작은 대부분 그런 식입니다.
그런 찌질한 단계를 거치지 않은 대가나 거장은 없다시피 합니다.
고흐의 네덜란드 시절 초기작과 피카소의 청색시대 작품은
우울하고 분노에 가득한 점에서 비슷한 에너지원을 갖고 있습니다.
타란티노의 초기작도 만화방 알바 주인공이 나오는데 찌질한 그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요.
무언가에 쫓기는, 장벽에 막혀 분노하는, 한계를 절감하는 캐릭터.
그 단계를 넘지 못하고 그 수준에 머무르면 평생 삼류작가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외수 초기작도 창녀촌을 전전하는 등신 이야기나 하고 있지요.
연상호의 염력이 망한 이유는 역시 찌질함을 졸업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헐리우드는 이미 다음 단계인 영웅들의 팀플레이로 넘어갔는데도 유치하게시리.
나 자신이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과 전율이 밀려옵니다.
2002년 12월 19일이 맞는듯 합니다. ^^
1219 행사는 당선 1주년입니다.
2003년 `리멤버(Remember) 1219` 행사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으앗... 역시 멋있습니다.
에너지 없는 자들이 남들이 만들어놓은 시스템을 파괴해서 에너지를 빼먹는 도둑질 심보다.
인간을 기계적으로 보면 어떤 것을 파괴하려고 하지 않고서는 에너지를 느낄 방법이 딱히 없다고 느껴집니다.
복수 작품을 보면 복수하려는 자가 에너지를 많이 얻어서 어떤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어떤 것을 안티해서 그 세력에 가담하는 것도 있겠지만
순수하게 개인적으로 인간을 혐오하고 자연을 혐오하고, 어떤 대상에 환경이 되는 부분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에너지는 긍정해야 되는 겁니까?
연상호 감독의 대부분 작품들이나 돼지의 왕을 보면 인간의 동조현상이나 무지를 비꼬는 식으로 표현되는데 그런 표현에서 에너지를 느끼면서 작품을 만드는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