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와의 대화 세상은 넓고 관찰해야 할 대상은 많다. 밤하늘의 별과 같다. 압도되고 마는 것이다. 천문학자가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6천 개의 별을 밤새 목이 빠지도록 쳐다보고 있어야 한다면 피곤한 일이다. '문일지십'이라는 말이 있다. 공자의 제자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고 했다. 그 하나와 열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 질서가 있다. 그 질서를 내 것으로 할 수 있다면? 하나의 질서로 밤하늘에 빛나는 6천 개 별의 운행원리를 단박에 꿰어낼 수 있다면? 만약 그것이 있다면 가히 진리라 할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진리개념은 차이가 있다. 서구는 참과 거짓에 집착한다. 서구의 진리개념은 단순히 참인 사실이다. 우리말의 진리개념은 근원의 원리인지가 중요하다. 2차적인 변화는 진리가 아니다. 사건의 제 1 원인을 찾아야 한다. 만물을 낳아 기르는 근원적인 하나의 자궁이 있다면 거기에 진리의 이름을 붙여도 좋을 터이다. 그것은 질서다. 일단 질서가 있어야만 우리가 그 대상에 접근할 수 있다. 서구의 진리개념이 공간만의 사정에 가깝다면 동양의 진리개념은 상당 부분 시간의 사정이 된다. 행성의 운행질서가 그러하다. 낮이 다하면 밤이 오고 다시 새벽이 돌아오는 것이 질서다. 곧 시간의 규칙이다. 적어도 태양은 인류의 역사 1만여 년 동안 한 번도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 밤길을 가는 여행자가 북극성에 의지하듯이 궁극적인 의지가 되는 것은 이 밤이 끝나면 내일도 해가 뜬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변화 속의 불변이다. 모든 별이 움직이지만 북극성 하나만은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모든 것은 변하지만 변화에는 방향성이 있다. 한 마리의 어미돼지가 열두 마리의 새끼를 낳으니 금세 백 마리로 늘고 천 마리로 늘어난다. 이를 거꾸로 되짚는다면 천 가지, 만 가지 사물에서 하나의 근본이 되는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어미와 새끼의 관계이다. 모든 것이 변하지만 그 가운데 변하지 않는 질서는 무엇인가? 아하! 그것은 변화 그 자체다. 변화 그 자체의 내밀한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어떤 A의 변화가 또 다른 B의 변화를 촉발할 때 변하는 A와 B 사이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의 방향성이다. 그것을 알아냈을 때 유레카를 외쳤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발언할 마음을 먹었다. 스물네 살 때였다. 그 순간의 뜨거운 느낌을 기억하고 때로 반추한다.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이는 석가의 연기설이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구조가 있다. 모든 것이 변하지만 홀로 변하지 않는 그것은 변화로 하여금 변하게 하는 그것이다. 구조는 공간과 시간의 얽힘이다. 변화는 공간과 시간의 변화이며 공간과 시간의 얽힘 그 자체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공간만 변하거나 시간만 변할 수 없다. 공간의 방향이 변하면 시간의 순서도 변한다. 시간의 질서가 변하면 공간의 대칭도 변한다. 여기에 없으면 반드시 저기에 있다. 여기가 먼저 변하고 저기가 나중에 변한다. 시간을 단서로 공간을 추적하고 공간을 단서로 시간을 추적한다. 구조는 남을 변하게 하고 자신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믿을 수 있다. 모든 변화의 자궁이 되고 모든 추론의 근거가 된다. 하나에 서서 열을 복제하니 하나를 알면 열은 자연히 따라온다. 만유는 복제된 것이다. 만유는 사건이고 사건은 복제되며 복제원리는 구조다. 그것은 A의 변화와 이에 연동된 B의 변화가 공유하는 그것이다. 그것은 방향성이다. 방향이라고 말하면 공간의 사정이다. 곧 대칭이다. 방향성은 시간과 공간의 사정이다. 곧 대칭의 변화다. 모든 변화는 궁극적으로 방향전환이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변화는 공간의 방향을 틀며 시간의 질서에 속박되므로 방향성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에너지의 성질로 나타나는 두 개의 방향성을 알고 있다. 최소작용의 원리로 파악되는 수렴의 성질과 엔트로피로 파악되는 비가역성이 그것이다. 그것은 대칭에서의 비대칭이다. 화살처럼 머리와 꼬리가 있어 대칭되지만 언제나 머리가 앞서고 꼬리는 따른다. 사건의 머리와 꼬리는 공간으로 대칭이지만 시간으로 비대칭이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갈 수 있고 반대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올 수 있어 대칭이지만 사건 안에서는 언제나 이쪽에서 저쪽으로 갈 뿐 저쪽에서 이쪽으로 오는 일은 없다. 에너지는 확산과 수렴이 있지만 사건 안에서는 언제나 수렴한다. 작용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에너지는 가역성을 가지나 사건의 계 안에서는 언제나 비가역성을 가진다. 이 두 가지 근원의 지식에 의지하여 우리는 안심하고 밤길을 갈 수 있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그러므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변화와 나란히 간다면 안심할 수 있다. 세상이 변하는데 내가 변하지 않으면 어지럽지만 세상의 변화와 내가 보조를 맞춰서 나란히 간다면 어지럽지 않다. 거기에 결코 변하지 않는 방향성이 있다. |
"세상의 변화와 내가 보조를 맞춰서 나란히 간다면 어지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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