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하는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미리 판을 짜놓고 선택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전에 게임을 설계해놓고, 형식을 맞춰놓고, 전제를 숨기고 진술을 강요한다. 그들의 요구에 응하면 을이 되어 있다. 나쁜 것을 선택하면 손해를 보고 좋은 것을 선택하면 길들여진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좋지 않다. 삐딱한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 법이다. 삐딱한 사람은 판을 깬다. 옳은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나쁜 쪽에도 가담하지 않는다. 막연히 회의하거나 냉소하거나 도망가는 짓도 좋지 않다. 함부로 YES를 하면 종속되고 NO를 하면 튕겨나가서 고립된다. 에너지원을 틀어쥐고 주최측이 되어 새로운 게임을 설계하는게 진짜다. 선택하지 말고 대응해야 한다. 언제라도 상황에 맞게 대응하는 것이 정답이다. 미리 너무 많은 것을 정해놓지 말아야 한다. 일단 판단을 유보하고 가만이 숨죽인 채로 주시하고 있다가 한순간에 들이닥쳐 게임의 주도권을 뺏어야 한다. 닫힌계와 에너지원과 토대를 간파하여 사건의 전모를 꿰뚫어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보편성 – 특수성 일원론 - 이원론 대승 - 소승 세력전략 - 생존전략 진리의 속성은 보편성이다. 보편은 같다는 거다. 다른 것들 속에서 같은 것을 알아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무엇이 같은가? 구조가 같다. 플랫폼이 같다. 에너지원이 같다. 패러다임이 같고 메커니즘이 같다. 같음이 보편성이면 특수성은 그 같음을 다른 것에 대입한 것이다. 그러므로 특수성은 보편성 안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보편과 특수가 별도로 있는게 아니라 하나의 보편이 있을 뿐이며 그것을 이곳저곳에 대입하면 특수가 된다. 한 사람의 홍길동이 아버지도 되고 남편도 되고 자식도 되고 부하도 되고 상사도 되는 것이 특수성이다. 자식에게 아버지고 부인에게 남편이고 부모에게 자식이고 상사에게 부하이고 부하에게 상사다. 마찬가지로 절대성만 있고 상대성은 없다. 상대성은 절대성을 쪼개놓은 것이다. 객관성은 있고 주관성은 없다. 주관성은 그냥 자기를 판단기준으로 삼는 착오다. 위치에너지만 있고 운동에너지는 없다. 방향을 바꾸는게 에너지인데 운동에너지는 방향이 지정되어 있어 쓸 수 없지만 지정된 방향과 맞는 경우는 쓸 수 있다. 관성의 법칙이 진짜고 작용반작용은 가짜다. 위에 열거한 열여덟 가지 모두 앞은 진짜고 뒤는 가짜다. 물론 가짜라도 제한된 조건에서 쓸 수 있다. 문제는 통제할 수 없다는 거다. 방향을 바꿀 수 없다. 방향이 맞아야만 유용하다. 선택하면 선택권을 빼앗긴다. 대응하여 선택권을 뺏어와야 한다. 설계하는 자가 이긴다. 대부분의 종교나 철학에는 보편-특수의 대립이 있다. 전자는 일원론이고 후자는 이원론이다. 전자는 대승이고 후자는 소승이다. 기독교는 원래 유태교의 일부였다. 바울이 보편으로 확장한 것이다. 예수는 유태교인이지만 예수의 사상은 유태교와 모순된다. 바울이 그 점을 간파하고 보다 보편적인 기독교를 만든 것이다. 이슬람으로 가면 수니파가 보편이고 시아파가 특수다. 전략의 차이에 기인한다. 보편은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특수는 문제를 해결한다. 대부분의 사상은 보편적인 일원론으로 출발하지만 곧 특수한 이원론으로 퇴행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권력을 행사하다보면 이원론이 되어 있다. 문제해결이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그러므로 사상이 교체되고 정권이 교체되는 것이다. 드러나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이 진짜다. 은폐된 차별을 들추어내는 것이 진짜다. 에너지를 사용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대신 에너지가 고갈된다. 문제를 만들어내야 에너지가 새로 모여든다. 새로운 게임의 설계가 정답이다. |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권력을 행사하다보면 이원론이 되어 있다. 문제해결이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드러나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이 진짜다.
문제를 만들어내야 에너지가 새로 모여든다. 새로운 게임의 설계가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