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북한을 다루는 방법 맹수를 다루는 조련사의 방법이 정답이다 미국은 대만과 수교하고, 중국은 북한에 기름끊고, 한국은 김평일 앉혀놓고, 대체재 김정철 확보하고 각자가 가진 카드 다 까봐라. 중국 북한 오바 언제까지 지켜볼 것인가?
공화당의 트럼프 때리기에 한국이 유탄을 맞았다. 푸틴은 트럼프와 짬짜미를 하고, 이란의 후견인을 자청하는 한편 중국과 사이가 틀어진 북한에 기름을 대고 있다. 이란의 앙숙인 사우디는 공화당에 로비를 하고 공화당은 트럼프를 엿먹이기 위해 러시아, 이란, 북한 패키지 제재안을 만들었다. 사자는 뭐야 저거 하는 표정으로 슬금슬금 물러난다. 물론 배고플 때는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일정한 속도로 계속 다가가야 한다. 상대의 모든 행동에 대응행동을 하면 맹수는 관찰하다 지쳐 포기하고 돌아간다. 김정은을 지치게 만들어야 한다. 탄도미사일 떨어지는 장면 포착 생중계 김정은이 NHK를 위해 일부러 쇼를 베풀어준 거. 일본이 재무장한다며 군사비를 쓰면 우리야 좋지. 헛된 곳에 돈을 날려라 날려. 3. 내년부터 1인가구 월소득 50만 원 이하면 생계급여 생존은 국가책임 생활은 본인책임 일하기 싫은 사람에게는 소비라도 시켜야 한다. 어쩌겠는가? 되는대로 부려먹을 수밖에. 단 돈 안 쓰고 저축하면 처벌해야. 자본주의 작동에 소비로 기여할 수 있어. 소비가 은근히 힘든 노동이긴 하다만 게으름뱅이 잡는 데는 소비강제가 상당히 먹히는 수법. 자연인들도 정기적으로 마을에 내려와서 소비해야. 의료급여는 67만 원 이하, 주거급여는 72만 원 이하에 지급. 주거급여 최대 6.6% 인상, 중·고교생에 교재비 등 18만 원 지급. 복지부, 중위소득 1.2% 인상..4인 기준 452만 원 투표를 잘못해서 노인기대수명 세계최고 노인빈곤도 세계최고 평균수명이 70세일 때 마인드로 살아와서 아니 그보다 더 험한 육이오전쟁 트라우마로 살아와서 새누리당만 주구장창 찍어댄 결과가 노인빈곤 국가에서 답을 찾아야지 민간에서 답을 찾으면 결과는 뻔해. 노후보장을 어떻게 하지? 간단하다. 동료를 죽이면 돼! 이게 자유한국당 방식의 생존경쟁 노후대책. 무인도에 두 명이 사는데 부자가 되는 방법은? 동료 한 명을 죽이는 것. 3초만에 부자가 된다. 빵! 방아쇠만 당기면 끝. 노후대책 확보. 자유한국당이 말하는 자유란 동료를 죽이는 자유. 노인들은 이러한 생존경쟁 관점으로 평생을 살아왔고 아는 게 이것뿐. 노후보장? 로또를 사면 돼! 당첨자 한 명은 노후가 편안하지. 이제는 모두가 감추어온 진실을 말해야 한다. 노후보장의 유일한 방법은 젊은이에게 빚더미 떠넘기기뿐이라는 냉정한 현실을. 진보니 복지니 하는 게 다 젊은이에게 빚을 떠넘기는 것. 그런데 보수꼴통 조중동이 젊은이에게 빚더미 물려줄 일 있나 이러니. 젊은이에게 빚을 떠넘기면 권력이 젊은이에게 가므로 그렇게 못하지. 노인들은 죽었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하고 곧 죽어도 젊은 자식들에게 절 받고 싶거든. 1. 노인은 한 재산 틀어쥐고 젊은 자식들에게 절 받고 싶다. 2. 노후보장과 권력행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은 절대로 없다. 3. 노후보장 받는 대신 젊은이에게 굽신대며 살아야 한다. 4. 모든 복지와 진보는 곧 미래세대를 착취하는 것이다. 5. 미래세대는 우리보다 더 잘살게 되므로 착취해도 된다.
이건 갑질이 아니라 조폭질이다 가락동 애들은 다 그렇지만 반은 깡패로 보면 된다. 봉건시대 길드에서 하던 도제수업이다. 가락동에서 좋은 채소 구하려면 적어도 3년은 그바닥에서 굴러먹어야 한다. 눈썰미나 안목이나 이런 건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오랫동안 현장을 뛰며 훈련하여 감각을 익혀야 하며 그런 감각익히기는 말로 설명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서 주먹이 오가기 다반사다. 군대에서 고문관에게 일 가르쳐 보면 안다. 교사도 아닌 사람이 말귀를 알아먹지 못하는 신참을 만나 답답해 하다가 흥분해서 길길이 날뛰게 된다. 눈치코치로 알아먹어야 하는데 그게 되느냐 말이다. 그쪽 동네 풍경이 어떨 지는 안봐도 비디오다. 지식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지방에서 낮에 수확하여 밤늦게 상차작업을 마치고 새벽차로 올라오는 채소를 구하려면 패거리를 규합하여 세력을 이루어야 한다. 조폭과 비슷하게 절대충성을 해야 한다. 그런 쪽으로 사람을 장악하고 지배하는 그들만의 노하우가 있는 것이며 그것은 봉건시스템이며 그런게 음지에서 활동하다가 양지로 나오면 마찰을 빚게 된다. 기어코 일은 터진다. 이영석의 행동은 충분히 납득이 된다. 원래 그 바닥이 다 그렇잖아. 근데 그걸로 자서전을 쓰고 드라마를 찍고 강연을 다녔다는 건 웃겼다. 이러다가 양은이 조폭도 강연 다닐 판이다. 식구들아. 꼴값 떨지 말고 자중해라. 음지의 인물은 음지에서 살아야 한다. 김기덕 영화 악어에 나오잖아. 물 속에 사는 악어가 물 밖으로 기어나오면 반드시 죽는 것이다. 5. 중인전쟁 발발해라 인도와 중국이 인구로 붙었다. 박정희 흉내를 내는 독재자 시진핑과 도긴개긴 모디의 대결이다. 둘 다 성질이 드러운데. 모디승 시진핑패. 원래 이런 건 민주주의 국가에 유리하다.
공산국가는 본질이 집단지도체제다. 시진핑은 흐루쇼프꼴 나는 수 있다.
중인전쟁이 터져야 한국은 한숨 돌릴 수 있는데 무제한 공급전략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
7. 제천 누드펜션의 경우 갑질은 시골갑질이 알차지 그냥 갑질하는 거. 왜냐하면 갑질할 수 있으니까. 쥐뿔도 없는 시골 노인들이 이런 거 아니면 어디 가서 갑질하겠어? 누드족들도 마찬가지로 사회를 타격하고 싶은 거. 결론은 후진국이라서 참 좋아 파와 후진국이라서 좋지 않아 파의 갈등. 인간은 어떻게든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싶어하는 거. 그게 인간의 본질이라는 점을 겸허히 인정해야. 자연주의니 그릇된 성의식이니 하는건 핑계일 뿐 아무말대잔치, 본질은 권력행동, 영향을 미치는 기술이 세련되어 가는 게 문명, 영향을 못미치면 고립으로 멸망, 영향이 통제되지 않아도 계급발생으로 멸망. 8. 전기차는 없다 전기차 두 종류 타봤다는 신문기사가 있지만 이런 베타버전 허접데기를 가지고 전기차라고 소동 피우면 곤란합니다. 인류는 아직 전기차를 발명하지 못했다. 전기차는 여전히 희망사항일 뿐 이 정도 호들갑은 100년 전에도 있었다. 전기차를 보급하느니 연비 좋은 오토바이를 타는 게 맞다. 3분 충전에 1000킬로 가는 슈퍼전지를 발명하고 가격을 2천만 원대로 낮춰야 본론이 시작되는 거. 자전거를 타면 체인에 쳐주는 기름 한 방울만으로 1만 킬로를 거뜬히 가는데 무슨 전기차 타령? 인류가 거국적으로 나서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한동안 업되어 있었던 것이고 진실로 말하면 여전히 인류의 전기차 수준은 출발점 0에서 주저앉은 거.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 1) 3분 충전에 1천킬로 가는 슈퍼전지를 발명한다. 2) 도로충전이나 무선충전, 카트리지 교체 등 획기적 충전기술을 개발한다. 3) 리튬전지를 대체할 값싼 대안전지를 발명한다. 4) 백금촉매를 대체할 값싼 수소연료전지를 개발한다. 이런 기술이 언제 나올지 몰라 잠시 설레었던 거뿐 획기적 기술이 안나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현재 인류의 기술은 여전히 0의 수준에서 1센티도 전진하지 못한 것이며 100년 전에도 이 정도는 했다. 9. 다이애나의 사랑 없는 결혼 사랑타령 좋아하네. 얼씨구 지화자 잘도 논다. 직업정신 결여다. 60억 인류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랑타령 해야 되겠나? 장난하자는 건가? 유치하기는. 까놓고 진실을 말하자. 지켜보는 60억 인류에게 한 방 먹이는 방법은? 하긴 사랑쇼밖에 없네. 결혼쇼는 해버렸고 베풀어줄 다음 쇼는? 찰스 - 60억 인류를 확실하게 엿먹이는 방법은 왕실이 망하지 않고 백 년 넘게 버티며 계속 거짓쇼를 이어가는 것이라네. 다이애나 - 60억 인류를 한 방에 엿먹이는 생쇼가 있는데도 백 년 넘게 여기서 무언극을 하라고라고라고라고라? 내가 미쳐! 이것이 진실이다. 진실을 말할 자 있는가? 그들은 단지 집단의 주의를 끌어 일단 시간을 벌고 자신의 존재이유를 만들어내려고 한 것. 그게 될 리가 있나? 마이너스 원리를 작동시켜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것만이 왕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된 몸짓이라네. 집단을 위해 개인을 파멸시키려는 무의식을 누구도 극복하지 못하지. 왜? 소인배니까. 하여간 이런 3류에 낚여서 흑흑흑 공주님이 내게 공주님을 위해 눈물 흘리는 하녀 역을 줬어. 내 배역에 맞게 곡을 해야지. 곡쟁이 하면 나잖아. 이런 때 곡을 안 하면 언제 곡을 하겠어. 하고 부화뇌동 하는 찌질이는 되지 맙시다. 10. 합리적 의사결정은 가능한가? 지난번에 언급했지만 조금 더 하면 소인배는 상대의 행동을 보고 자기 행동을 결정하려고 하고 이는 리스크를 높이게 되며 무의식적으로 집단을 위해 마루따로 희생하게 된다. 엘리트는 일관되게 가는 매뉴얼을 만들어놓고 리스크를 낮춘다. 그러나 그네와 재용은 엘리트의 매뉴얼을 익혀서 주변사람에게 친절하게 행동하는 예절은 익혔으나 재판에서는 종근당 졸부갑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합리적 의사결정은 강자의 여유를 가지는 것이며 신의 편에 섬으로써 그것은 가능하다. 신과의 일대일을 훈련해야 한다. 강자가 아니라도 강자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을 훈련해야 한다. 호연지기를 길러야 한다. 하층민 행동은 팀에 들지 못한 자가 불안해하며 팀에 들려고 하는 행동이다. 도원결의 해줘야 한다. 팀에 끼워주는 절차가 노무현 행동이다. 노무현은 하층민의 변덕스런 심리를 알기 때문에 일관된 신호를 보내서 그들을 교육시키려고 했다. 하층민 행동은 한마디로 입양된 강아지가 주인을 의심하며 나를 버릴꺼지? 나를 버릴꺼잖아. 아마 나를 버릴 거야. 이런 식으로 계속 상대를 떠보는 것이다. 한국의 어리석은 유권자들은 노무현에게 노무현은 잘났으니 조만간 우리를 버릴 거잖아. 보나마나야. 아무래도 우리를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드는뎅. 하면서 계속 테스트를 한 것이다. 이런 떠보기 행동은 놔두면 죽을 때까지 반복한다. 열등의식 때문이다. 그들은 불안한 것이다. 노무현은 어떤 경우에도 그들을 버리지 않고 끌고 간다는 확실한 신호를 줘야 했다. 그럴수록 더 센 테스트가 들어온다. 유시민은 그걸 이해하지 못했고. 그리고 국민은 교육되었다. 국민은 노무현이 그들을 버리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것이 부자증세 찬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많은 희생이 따랐고 많은 시간이 걸렸다. 노무현을 의심했다가 문재인에게 갚았다. 문제는 그게 버릇이라는 점이다. 하층민의 나쁜 버릇을 버려야 한다. 귀족행동을 해야 한다. 하층민의 심리를 아는 귀족이 되어야 한다. 문재인이 그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11. 완전성이란 무엇인가? 자연은 조립이 아니라 복제한다. 존재가 작동하는 방향은 기본적으로 마이너스다. 하부구조에서 부분적으로 플러스가 일어나지만, 이는 인간이 개입한바 관측의 오류에 해당하는 것이고 닫힌계를 걸고 사건 전체로 보면 자연은 언제나 마이너스다. 이는 우주의 절대원리다. 사건은 언제나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 완전한 것에서 불완전한 것으로 움직인다. 어떤 일이든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 일의 첫 시작은 완전한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세상은 불완전한 조각들이 우연히 맞춰져서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완전한 것에 에너지를 태워 구조를 복제하는 것이다. 그 복제과정에 에너지 공급의 부족으로 구조가 깨져서 불완전한 부스러기들이 발생한다. 애초에 완전한 씨앗이 자라다가 에너지 공급의 부족으로 불완전한 쭉정이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을 본받아 구조를 복제하여 일을 성사시키려면 먼저 완전성에 대한 개념을 닦아야 한다. 우리는 예술에서 그것을 조달할 수 있다. 완전한 음악, 완전한 그림, 완전한 소설, 완전한 디자인, 완전한 건축에서 영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오해한다. 우리는 완전한 것이 안정된 것으로 생각한다. 고대 음양론으로 보면 변화가 없는 양의 점괘는 안정되니 길하며 변화하는 음의 점괘는 불안정하니 불길한 것이다. 틀렸다.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은 변화하는 음에서 나온다. 변화는 음이다. 음은 여자다. 암컷이 새끼를 낳는다. 음은 길하다. 이것이 당연한 상식이라야 한다. 그러나 고대인의 점괘는 전쟁의 승패예측을 목적하므로 반대로 해석한다. 변화는 전쟁에서 부상을 당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해롭다고 보았다. 이는 상나라가 약탈집단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라면 모든 변화가 길하다. 기업의 번영, 생물의 진화, 동물의 생육, 곡식의 성장이 모두 길한 변화다. 고대인은 변화를 전쟁이나 기근, 천재지변, 전염병으로만 여겼기에 불길하게 본 것이다. 우리는 또 완전한 것은 좌우대칭이라고 생각한다. 솔로는 불길하고 커플은 완전하다는 식이다. 이는 역시 태양과 달이 짝짓듯이 음양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삼위일체나 혹은 천지인 삼부사상과 같이 삼각형을 안정된 구조로 보기도 한다. 원불교는 시작과 끝이 연결된 둥근 원을 완전한 것으로 여긴다. 이는 변화를 반영한 것이므로 약간의 진보성이 있다. 그러나 조악하다. 예술이나 문학이라면 아름다운 것과 재미있는 것을 완전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 말라는 자기소개다. 자신이 어떻게 느꼈다는 것이 어떤 판단의 근거가 된다면 유치하다. 아기는 달콤한 것을 완전하게 여긴다. 치아 썩는다. 꼬마는 알록달록한 것을 아름답게 여긴다. 때때옷이다. 유아틱한 수준을 극복해야 한다. 진짜라면 사람을 긴장시킨다. 그것은 반응을 끌어내는 것이며 그러므로 에너지가 있는 것이다. 가속도가 걸린 것이다. 각운동량이 조직된 것이다. 완전한 것은 움직이는 것이나 등속도운동은 아니다. 등속도로 나란히 가면 상대적인 정지상태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가만히 안정된 것은 고착된 것이며 그것은 다른 것에 붙잡힌 것이니 외부에 에너지를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고착되어 안정된 것은 사실 불완전한 것이다. 세상이 맹렬하게 움직이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상대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세상은 타오르는 불과 같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연료가 되어 소모될 뿐이다. 불보다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안정된 바위는 지구중력에 잡혀 있으니 지진에 망한다. 위태롭다. 안정된 상태는 계에 가속도가 실린 동적균형 상태다. 조직이 커가는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 예술을 통해서 우리는 그 감각을 키울 수 있다. 그림이든 음악이든 건축이든 에너지를 태우고 있어야 한다. 그냥 예쁜 것은 관객에게 아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와 관객의 게임에서 작가의 패배다. 천만관객을 자랑하는 영화라도 관객이 승리하면 작품성은 0이다. 관객을 이끌고 전진하여 나아가야 한다. 세상은 복제된 것이다. 복제의 원본이 있다. 원본은 에너지다. 에너지를 소립자 단위로 쪼개고 들어가면 안에 작은 물레방아가 있다. 물레방아는 돌아가면서 여러 개의 방향을 한 방향으로 몰아준다. 확산에서 수렴으로 튼다. 척력을 인력으로 바꾼다. 위치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꾼다. 짝수에서 홀수로 튼다. 그림이든 음악이든 건축이든 그런 생장구조가 보여야 한다. 조직이 커나가는 족보가 보여야 한다. 계통이 연결되어 맥락이 드러나 보여야 한다. 어떤 하나가 완전하다는 것은 없으며 항상 사건의 기승전결에서 다음 단계로 뻗어가는 촉수가 있느냐로 판단한다. 소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 그런 공간이 확보되고 있는가, 배후지가 있는가, 예비자원이 있는가로 판단하기다. 족보에 의존하는 것이 원죄이니 원초적인 결함이다. 자연의 모든 존재는 족보에 의존한다. 외부 에너지 공급원에 의존하므로 원초적 불완전성을 가진다. 그 족보의 진행이 완전하다. 그러므로 동적균형이 완전하다. 고착된 완전은 없으며 진보나 보수 중의 한쪽으로 치우쳐 완전한 것은 없으며 진보와 보수가 두 다리가 되어 왼발과 오른발의 교대 중에 왼발이 먼저 나가는 것이 완전한 것이다. 인생은 게임이다. 정지한 것은 게임의 파트너가 없으므로 완전할 수 없다. 다이아몬드가 빛나더라도 미인의 목에 걸리지 않으면 광채가 없다. 짝을 맞춰주는 파트너를 얻어야 한다. 미인과 다이아몬드가 합체해도 전혀 완전하지가 않다. 미인은 객석을 채운 관객의 눈동자가 모이는 소실점에서 프리마돈나의 열창으로 있어야 하며 그 자리에 모인 관객이 앵콜을 외치는 것은 다음번 공연을 예상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게임을 다음 단계로 연결해 가는 것만이 완전하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미인에 다이아몬드는 파멸이다. 다음 단계가 없기 때문이다. 씨앗이 완전한 것은 파종되어 빛과 물과 만나 싹을 틔우기 때문인데 미인에 다이아몬드라면 추수되어 조리된 음식처럼 마침내 소모되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 시작은 소박해야 한다. 심플해야 한다. 화려하면 안 된다. 화려하다는 것은 끝났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사건의 종결이 아닌 사건의 촉발이어야 한다. 그 그림, 그 건축, 그 음악이 사건의 종결인가 사건의 촉발인가다. 인생은 게임이므로 족보를 연결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완전한 것이며 그다음 단계가 예상되어야 하고 그것이 방향성이며 작품에는 방향성이 보여야 한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다. 인공지능시대를 예고한 것이다. 다음 단계가 보인다. 예술은 사기라는 게 그것이다. 어떤 작품이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건 성립하지 않는다. 다음 단계를 조직하기에 달려있다. 즉 어떤 작품의 가치는 그 작품 자체에 내재하는 게 아니라 그 문명이 다음 단계를 어떻게 가꾸느냐에 달려있다. 우리는 작품을 소비하지만, 사실은 그 작품이 예고하는 사건의 맥락을 소비하는 것이며 그것은 다음 단계를 두고 게임을 벌이는 것이다. 의도가 있다는 거다. 의도는 집단의 의지에서 나온다. 어떤 작품의 가치는 그 작품에 고유하지가 않다. 작품이 예고하는 다음 단계의 게임을 어떻게 조직하는지에 따라 상대적으로 결정된다. 즉 그 작품의 가치는 나중에 결정되는 것이다. 주식투자와 비슷하다. 그 작품에 베팅하여 키워가는 것이다. 그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가면 걸작이다. 인상주의 그림이 승리한 것은 그 그림이 좋은 작품이라서가 아니라 그 작품이 예고한 사건의 맥락이 현실에서 싸워 이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쟁이다. 여기에 명백히 의도가 있다. 앤디 워홀이 팝아트를 들고나온 것은 시비를 건 것이다. 인류문명이 이 방향으로 간다는 예고를 하고 판돈을 올려 승부를 걸었다. 앞으로 이 산업이 발전할 거라는 예측이 맞으면 그 종목 주가는 오른다. 그런 게임이다. 여기에는 의도가 있고 작전이 있고 투쟁이 있으므로 사기다. 모르면 당한다. 디자인이 어떻고 뭐가 어떻고 하지만 사실은 인류의 방향성을 논하는 것이다. 회사후소라 했다. 그 방향성을 아는 사람이라야 대화가 된다 할 것이다. 덩케르크가 어떻고 군함도가 어떻고 하지만 이게 과연 맞는 방향이냐를 논하는 것이다. ### 검색해보니 죄다 반대로 설명해놨던데 회사후소는 흰색이 나중에 온다는 해석이 정설입니다. 예술은 장식이고, 장식은 맨 마지막에 가는 것이며, 그림을 다 그려놓고 마지막에 흰색으로 눈동자를 그려서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 예술은 권력투쟁이다. 단순히 어떤 목표 곧 시각적 아름다움이나 혹은 미각의 맛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목표에 도달하면 곧 진부해지고 식상해지고 권태로워진다. 예술은 끝없이 뇌에 긴장을 불러일으켜야 하며 사회에 풍파를 일으켜야 하며 나른해지면 안 된다. 사건의 기승전결에서 기에 서서 이어지는 승과 전과 결을 지배하는 권력의 창출이 진정한 미다. 그러므로 예술은 오만한 것이며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의도를 감춘 것이며 그래서 사기다. 12. 세상은 구조다. 이 한 마디로 이야기를 끝낸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이 한 마디를 듣고도 감이 오지 않는다는 사람과는 대화하지 않는다.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는다. 다윈의 노고에 빗대자. 종은 진화다. 이 한 마디로 끝난다.그 진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사실 다윈도 몰랐다. 당시만 해도 DNA 유전자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요한건 관점이다. 진화론의 진짜 의미는 인류가 처음으로 그 문제에 진지하게 달려들었다는 거다. 창조론? 창조론은 이론이 아니다. 신이라는 방패막이 뒤로 숨었다. 굳이 말하자면 창조론은 모르겠다는 입장이다. 모르면 닥쳐야지 왜 말이 많은가? 그들은 사실 진지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인류가 거기에 과학이라는 이름의 메스를 가하여 생명의 존엄성에 도발할 것인가다. 인류가 그 후과를 감당할 수 있는가다. 교회가 무너지고 가족이 무너지는 사태다. 이미 현실화 되고 있다. 요즘 젊은이는 결혼하지 않는다. 무슬림은 열심히 출산하는 판에 말이다. 이쯤 되면 창조설의 맞대응이 정치적 기동임을 알 수 있다. 진화와 창조의 대립은 과학의 견해차이가 아니라 인류가 문명의 큰 방향을 틀어버림에 있어서 과연 인류 전체의 합의가 선행되어 있었는가 하는 정치적 이의제기다. 권력게임이 시작된다. 과학이 인류문명을 타격하자 권력해체가 일어났다. 정치적 맞대응을 한다. 그것은 학계의 논쟁인데 왜 우리 종교인이 유탄을 맞아야 하지? 이거 말 된다. 그런데 말이다. 그건 정치인이 나서서 교통정리할 문제이지 과학자의 관심사는 아니다. 과학은 진실을 말할 뿐이다. 비 온다고 기상청 패랴? 그렇다. 인류는 태만했다. 생명의 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한 사람은 없었다. 다윈이 처음으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고 진실을 누설했다. 그러자 피해본 사람들이 화를 냈다. 그러기 없기로 했잖아. 뒤로 담합해 놨는데 왜 니들이 판을 깨니? 이런 그림 충분히 가능하다. 과학적 진실과 아무 상관없는 정치적 후폭풍에 불과하다. 기상청이 일기예보를 했다. 올해는 가뭄이 들 것이다. 우산장수가 화를 낸다. 장마철에 대비해서 우산을 잔뜩 도매해놨는데 안 팔리면 니들이 책임질겨? 필자의 견해는 이런 태도가 진지하지 않다는 거다.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목숨을 걸어야 한다. 진지하지 않은 사람 꺼져! 정치적으로 구는 자들 꺼져! 우산장수 소금장수 꺼져! 종교장사 꺼져! 그들은 이 사이트의 논의에 낄 자격이 없는 거다. 사실이지 진화론을 배운 사람 중에 자신의 판단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대부분 과학자들의 권위에 굴복한 것이다. 과학자들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하는 거다. 설문조사 해보니 대학생들 중의 다수가 귀신을 믿더라고. 그들은 진화론을 믿는 척 한다. 귀신과 진화는 양립이 불가능하다. 귀신을 믿는 사람은 진화론을 믿지 않아야 한다. 사실 그들은 아무 생각이 없는 거다. 어쨌든 시험문제를 풀 때는 진화에다 체크를 하여 답안을 작성할 것이다. 외웠으니까. 구조론도 마찬가지. 아무 생각없는 사람과 대화하지 않는다. 진화를 알려주면 귀신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이미 진화를 말했는데도 귀신을 해결하지 않고 혹시 모르잖아 하며 모호한 태도를 가지는 자는 과학할 자격이 없다. 파문해야 한다. 구조라는 것은 단지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 마침내 존재의 진실에 대하여 인류가 생각을 시작한 거다. 진화도 마찬가지다. 창조론과 진화론이 대립하여 있는게 아니라 아무 생각이 없었던 상태에서 다윈이 처음으로 생각을 툭 던진 것이다. 구조론과 반구조론이 있는게 아니라 다들 아무 생각이 없는데 구조론이 출현했다. 구조론에 반대되는 그 무엇은 없다. 진화론에 반대되는 그 무엇은 당연히 없다. 창조론이라는 말은 불이익 당한 종교인들이 떠벌인 너스레에 불과한 것이다. 수학에 반대되는 반수학은 없다. 주먹구구? 주먹구구가 수학의 반대는 아니다. 마찬가지다. 구조론에 반하는게 있다면 그것은 무지와 게으름과 아무 생각없음과 진지하지 않음이다. 그들은 비겁하다. 구조론은 필자의 초딩시절 아이디어다. 나는 사람들이 뚫린 입으로 단어들을 막 내뱉어 대는데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앞단어 뒤에 뒷단어를 마구잡이로 가져다 붙여버리는 거지? 인간의 언어는 구석기인들이 발명한 것이다. 과학의 검증을 거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인간들이 함부로 내뱉어대는 언어를 신뢰할 수 있나? 그 어떤 선생님도 내가 입으로 말은 하지만 사실 인간의 언어라는 것은 일단 신뢰할 수 있는게 아닌데 하고 진실을 고백하지 않았다. 그들은 함부로 단어와 문장에 권위를 부여해 버렸다. 그리고는 눈알을 부라려 겁을 줬다. 반대질문은 원천봉쇄 되었다. 1+1=2가 맞나요? 하고 질문할 수 있을지언정 과연 인간의 언어라는게 막 내뱉어도 되는 도구인지에 대해서는 질문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비슷한 것도 나는 본 적이 없다. 인류문명의 근본에 대해 회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오래 사회를 떠나 있었다. 도무지 진지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너희 인간들과 상종하지 못하겠다. 진화와 창조가 있는게 아니라 진지한 사람과 개념없는 사람이 있는 거다. 구조론이 요구하는 것은 각잡고 진지해져야 한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과연 당신은 진지한가? 뇌의 CPU를 최대한 돌려먹고는 있는가? 구조론의 반대는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원자론적 관점이나 기계론, 결정론적 태도라 하겠다. 그런데 원자론은 창조론과 비슷하다. 원자는 쪼갤 수 없다. 신을 깨뜨릴 수 없다. 진지하지 않은 자의 방패막이다. 그들은 포기한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한계를 설정해 버렸다. 요 금 넘어 건드리기 없기. 그냥 모르겠다고 하면 될 건데 말이다. 무지의 지를 깨달아야 한다. 인류는 진지하지 않았다. 포기했다. 모르겠다는 말을 하기가 창피하니까 원자론이라는 방패막이를 내세웠다. 정치적인 곤란함을 노정하는 문제에 금을 그어놓고 서로 건드리지 말기로 묵시적인 담합을 한 거다. 우주 안에 쪼개지지 않는 것은 절대 없다. 우주가 작은 알갱이들의 집합으로 되어 있다는 전제부터 틀려먹었다. 이 전제가 성립하려면 크기가 존재해야 한다. 크기라는 것은 수학적 접근이다. 즉 관념이다. 그러므로 관념으로의 도피가 된다. 우주가 수학으로 되어 있다는 식의 허무다. 역시 모르겠다는 말과 같다. 우주는 작은 것이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원형이 널리 복제된 것이다. 이 대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 하나는 물레방아를 닮았으니 확산방향을 수렴방향으로 바꾼다. 위치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꾼다. 사건에 방향성을 부여한다. 구조론은 음악도 미술도 패션도 건축도 정치도 자본도 생명도 이 하나의 논리로 설명한다. 방향성이다. 너 음악을 알아? 이렇게 물었을 때 당신이라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음악의 나아가는 방향을 아는 사람이 진정으로 음악을 아는 사람이며 방향을 모르면 모르는 거다. 도레미파솔라시도 안다고 음악을 안다고 하면 안 된다. 너 미술을 알아? 미술이 진화하는 미래의 방향성을 아는 사람이 미술을 안다고 하겠다. 마찬가지다. 정치가 진보하는 방향을 모르는 사람은 정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미래를 예견할줄 모르는 안철수는 정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생명의 진화는 우연이 아니라 방향이 있다. 엔트로피의 법칙에 의해 방향이 결정되어 있다. 그 방향은 계 내부의 상호작용을 증대하여 환경을 장악해 가는 정도를 높이는 방향이다. 방향을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다. 자동차를 안다면 도로도 알아야 한다. 차는 잘 아는데 그 차가 나아가는 도로를 모른다면 차도 모르는 것이다. 기차역을 모르는 사람은 기차를 모르는 사람이고 버스정류장을 모르는 사람은 버스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이 전진하여 나아가는 사건의 다음 단계를 안다는 것이다. 기에 선 사람이 승전결을 아는 것이다. 두 가지 바보가 있다. 하나는 어떤 고착된 틀에 맞추려고만 하는 사람이다. 진보든 보수든 고착된 틀에 맞추려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다. 진보는 친북이라든가 보수는 반공이다 하는 식으로 틀에 맞춰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방향을 모른다. 방향을 모르면 다 모르는 것이다. 방향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 고착된 틀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바보는 노자바보다. 상대주의를 적용하여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다 다르네 한다. 그냥 모른다고 하면 될 것을 둘러댄다. 난 정치를 모르지만 정치를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정치를 아는 거라네 하는 식의 말장난이다. 패죽여야 한다. 두 바보의 공통점은 역시 진지하지 않은 것이다. 이들은 언어를 늘여 답에 맞춘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다. 1+2=3이라고 정답을 제출하는게 아니라 2를 고무줄처럼 늘여서 3까지 커버하게 만들면 된다는 식이다. 3이나 2나 불과 한끗 차이인데 봐주면 되잖아 하는 식이다. 사실을 추구하지 않고 언어를 희생시킨다. 언어는 인류의 약속인데 그 약속을 희생시켜 피해가 인류 모두에 이르게 하니 오판의 고통을 만인에게 분산하여 표나지 않게 하는 속임수다. 인류가 다친다. 두 종류의 바보가 있다. 틀에 맞추는 바보는 강박증 바보이니 곧 권력을 탐하는 자다. 상대주의로 도망치는 바보는 콤플렉스 바보이니 권력에 쓴맛을 보고 쫄아있는 거다. 공통점은 모두 권력의 법칙을 따른다는 거다. 그들은 권력에 집착하거나 혹은 권력에 반항한다. 권력에 대들다가 진리에 대들게 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둘 다 권력에 매인 점은 같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 사회 안에서 명상을 탐하거나 돈을 탐하거나 정치권력을 탐하거나 본질은 권력이다. 인간의 사회성이라는 함정에서 벗어나 머리를 써야 한다. 본능의 지시를 따라 무의식의 덫에 갇힌다. 진정 자유로운 정신에 도달하여 있는 사람은 없다시피 하다. 권력과 거리를 둔다고 말하나 권력의 눈치를 보고 쫄아있는 것이며 권력 대신 돈과 명성을 탐하지만 그게 권력의 변종이니 결국 권력이다. 진리 그 자체에 천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지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말장난 하는 자는 혀를 뽑아버려야 한다. 언어를 의심하지 않는 자는 애초에 논의에 낄 자격이 없다. 교언영색 하는 자라 할 것이다. 세상은 구조다. 이 안에 다 있다. 구조는 복제구조다. 복제는 방향을 복제한다. 금속을 비중대로 백금, 금, 은, 납, 구리로 분별하여 줄 세울 수 있지만 에너지의 진행방향이 꺾이는 정도에 불과하다. 우주는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로 되어 있다. 물질은 인간의 관측편의를 따른 것이니 관측의 용이성이라는 색안경을 씌웠다. 물질은 인간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의 촉각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구분한 것이며 존재 그 자체의 본성과 무관하다. 인간 중심의 접근인 것이며 자연 중심의 접근이 아니다. 그렇다. 인류는 1만년 동안 인간의 관측위주로 언어를 조직했다. 그게 먹혔다. 왜냐하면 인간이 벌여놓은 일들이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로 진출하려면 변변치 않은 도구를 버려야 한다. 자연의 도구를 써야 한다. 그것이 구조다. 구조는 자연의 원래 모습을 그대로 보는 관점이다. 사회에 여러 대립된 견해가 병존하여 있는게 아니라 다만 진리에 정면으로 달려들어 목숨걸고 진지한 자와 번짓수를 잘못 짚어서 엉뚱한 곳에 여불때기로 끼어들어 어색해진 자가 있을 뿐이며 진지하지 않은 자는 일단 발언권이 없으니 닥쳐! 남의 벌여놓은 판에 잘못 끼어들어 어색한 자는 이 게임에서 빠져줘야 한다. 진화론은 진지하고 창조론은 걸치적대는 방해자들이다. 그들의 언어가 어색하고 연출이 어설프다. 구조론은 진지한 것이니 목숨걸고 베팅한 자만 발언권이 있다. 정리하자. 진화냐 창조냐의 대립구도 세팅은 정치적 맞대응일 뿐 진지한 논의가 될 수 없으니 애초에 대화상대가 안 된다. 그러므로 진화냐 창조냐가 아니라 진화라면 [뭐뭐]다가 되어야 하며 그 미지수 [뭐뭐]에는 유전자 개념이 들어온다. 마찬가지 구조론과 반구조론의 대립구도는 없으며 진화라면 유전자가 있듯이 구조라면 방향성이 있다. 구조면 복제고 복제면 원본과 복제본 사이에 서열이 있어서방향성을 이루니 그 방향성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구조론의 알파요 오메가다. ### 제안 및 질문 환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