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이의 직관 갈릴레이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과연 일반의 고정관념과 달랐다. 위인전에 나오는 스테레오 타입과 다르다는 말이다. 영웅이 영웅같으면 어색하다. 영웅은 보다 인간적이어야 한다. 인간은 상호작용을 통해 성장하는 존재다. 뜬금없이 혼자 잘났다는 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싸워서 이기려고 하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 싸우다 보면 손에 흙을 묻히게 된다. 갈릴레이는 짖궂은 사람이었다. 그는 일생동안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흠결이 많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을 갈릴레이는 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왜? 갈릴레이가 쓴 책이 그런 식이다. 뒤통수 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갈릴레이라면 충분히 그럴만 하다고 생각된 것이다. 갈릴레이의 ‘두 우주체계에 대한 대화’는 천동설을 편드는 척 하면서 지동설을 주장한다. 천동설과 지동설을 공정하게 다루고 진실은 신만이 안다는 내용으로 출판을 허락받고는 천동설을 매우 까는 것이었다. 결정적으로 갈릴레이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교황을 모독하고 있다. 지동설 자체는 처벌대상이 아니었다. 교황을 모욕한 죄로 처벌받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당시 개신교가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카톨릭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었는데 급진적인 갈릴레이가 교황과 손잡고 지동설을 천명하여 개신교에 한 방 먹이자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던 거다. 당연히 카톨릭 내부의 꼴통들에 의해 좌절되었다. 보수개혁 실패다. 갈릴레이는 이상주의를 추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다. 세상을 신의 이상적인 작품으로 본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정신적 난쟁이로 여기고 매우 경멸했다. 시대를 앞서가며 혼자 잘난척이다. 문제는 갈릴레이가 경험과 실증을 중시하는 과학자가 아니라 사고실험으로 답을 찾은 거다. 여기서 헷갈리기 시작한다. 구조론의 연역논리는 직관과 이성으로 답을 찾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이다. 갈릴레이 역시 직관과 이성으로 답을 찾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천동설을 위주로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봉건적 세계관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경험과 실증을 중시하는 근대과학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그렇다. 앞뒤가 안 맞아야 정상이다. 영웅이 영웅같으면 안 된다. 세상은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에 의해 진보하는 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을 전파하려고 낡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을 파괴해야 말이 된다. 그는 피사의 사탑에서 깃털과 쇠구슬을 떨어뜨리는 실험을 한 적이 없다. 사고실험으로 충분하다.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을 연결하여 떨어뜨리면 어떻게 되지? 무거운 것은 빨리 떨어지고 가벼운 것은 느리게 떨어지므로 둘의 중간 속도로 떨어진다? 맞네. 그런데 무거운 것에 가벼운 것을 보탰으니 전체적으로 더 무거워져서 더 빨리 떨어지는거 아냐? 그것도 맞네. 답이 두개라서 모순이다. 그러므로 속도는 같아야 한다. 갈릴레이는 간단히 생각으로 알아낸 것이다. 어떻게? 편한 것을 찍었다. 복잡한 것을 거부한다. 오컴의 면도날과 같다. 천동설은 복잡하다. 무거운 것이 더 빨리 떨어지면 뭔가 복잡해진다. 본능적으로 저항감을 느낀다. 무엇인가? 진정한 과학자는 수학적 직관으로 판단해야 하는 법이다. 여기서 직관 나왔다. 직관이라고 하면 대개 경험적 직관을 떠올린다. 경험이란 것은 그냥 느낌이다. 그 느낌은 다분히 인간의 생존본능이다. 근거가 없다. 밸런스를 따르는 수학적 직관을 믿고 방향성을 따르는 구조론적 직관을 믿어야 한다. 세상은 한 방향이어야 한다. 이게 구조론이다. 세상은 대칭적으로 되어있다. 이건 수학적 직관이다. 왜? 세상이 한 방향이 아니면 복잡해진다. 세상이 대칭적이지 않으면 손이 많이 간다. 대칭은 축이 있으므로 원 큐에 해결된다. 손이 덜 가는게 맞다. 문제는 그 갈릴레이가 매우 틀렸다는 점이다. 갈릴레이는 케플러의 편지를 받아 행성이 타원궤도를 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원운동을 고집했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달의 인력 때문이라는 설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그것도 부정했다. 이쯤되면 고집불통이다. 갈릴레이의 진짜 업적은 관성의 발견에 있고 뉴턴이 이를 이론화 했다. 모든 문제가 단번에 풀렸다. 사실 갈릴레이는 모순과 혼돈에 가득찬 짖궂고 괴퍅한 노인이었다. 학자들을 모욕하여 적을 만들었다. 갈릴레이가 성격좋은 사람은 아니었던 거다. 갈릴레이는 처세술도 뛰어나서 등 치고 배 만지기는 그의 전매특허였다. 그는 확실히 에너지가 넘쳤다. 죽을때까지 고지식한 학계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믿음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이상주의 세계관이었다. 구조론의 연역적 직관은 일반의 경험적 직관과 다른 거다. 귀납적 직관은 가짜다. 귀납은 우연을 기대하며 어림으로 찍는 거다. 경험은 인간을 속인다. 구조와 시스템을 따르는 연역추론이 정답이다. 이게 이러면 저게 저래야 한다. 둘을 연결시킨다. 둘 사이에 최단거리로 라인을 연결하면 구조다. 구조는 효율적이고 효율은 잉여를 남긴다. 세상은 그 잉여에 의해 작동한다. 그러므로 뭔가 비효율적인 배치가 있으면 그것은 가짜인 것이다. 비효율은 이익이 없으므로 작동하지 않는다. 세상은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쌍으로 일어서니 더 효율적이다. 뭐든 복잡하면 가짜다. 천동설은 복잡하다. 하느님이 바보가 아닐텐데 그런 미련한 짓을 했을 리가 없다. 이것이 갈릴레이의 이성적 직관이다. 사실 갈릴레이는 죽을때까지 지동설을 증명하지 못했다. 바보들에게 화를 냈을 뿐이다. 모욕당한 바보들이 갈릴레이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런 식의 내용이 등장하는 책은 이미 출판되어 있었는데 그 책에는 교황이 실제로 한 말이 바보 캐릭터 등장인물이 하는 대사로 나온다. 학자는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 도덕가는 대중의 눈치를 보고 아부하는 사람이다. 학자는 이상주의를 품어야 한다. 학자는 단순한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하며 수학적 직관과 미학적 직관으로 무장하고 경험적 직관을 극복해야 한다. 경험은 대개 허상이다. 답은 열결에 있다. 사건을 다음 단계로 연결시켜 보는 것이다. 답은 스스로 자명해진다. 상대가 맞대응할 수 있으면 틀린 거다. 상대가 맞대응할 수 있다는 것은 거기서 사건이 끝난다는 거다. 끝나면 가짜다. 이 작품은 좋다. 좋으면 가짜다. 그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좋은데 그래서 어쩌라고? 좋으면 지가 좋지 내가 좋냐? 나도 끼워달라고. 그러려면 사건의 다음 단계가 필요하다. 일방향으로 계속 연결되어 가면 바르다. 갈릴레이가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를 연결시켰듯이 사건을 연결시켜 다음 단계로 전개시켜 보면 된다. 이건 본능적으로 안다. 뭔가 건수가 많아지는게 답이다. 아인슈타인도 사고실험으로 답을 찾은 사람이다. 상대성이론의 아이디어는 16세때 이미 가지고 있었던 거다. 위대한 발견들은 대개 그렇다. 근대과학의 방법론인 실험과 재현은 바보들을 납득시키는데 필요한 수단이다. 언어감각에서 90퍼센트 나와준다. 보수꼴통은 대개 현장에서 상처입은 경험을 대입한다. 북한이 과거에 속였으므로 또 속인다는 식이다. 경험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스스로 무너지는 것이다. 내가 60평생을 살면서 강남집값이 떨어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식이다. 지금까지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이제 떨어질 때가 되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갈릴레이의 패기와 열정과 에너지와 카리스마가 그립다. 매력이 있는 사람이 그 에너지를 동료들에게 나눠주는 법이다. 질투하지 말아야 한다. 일전에 이야기한 알프레드 배게너의 대륙이동설도 그렇다. 당시에는 실증적으로 증명하지 못했지만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단서가 있고 직관적으로 방향이 맞으면 맞는 거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것이 방향이 맞는 것이다. 구조론은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설명한다. 결과측이 아닌 원인측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원인은 모여있고 결과는 흩어져 있다. 원인의 활은 한 곳에서 쏘지만 결과의 화살은 여러곳에 흩어져 떨어진다. 무조건 원인이 결과보다 단순하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가면서 사건은 다섯 배씩 복잡해진다. 에너지는 언제나 지름길로 간다. 지름길에 효율이 있고 효율이 사건을 전개시키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
''학자는 이상주의를 품어야 한다. 학자는 단순한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하며 수학적 직관과 미학적 직관으로 무장하고 경험적 직관을 극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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