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음과 없음 구조는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구조론의 요지는 어떤 것의 존재보다 부재에 더 많은 정보를 실을 수 있다는 거다. 당연하다. 승객들은 만원 버스보다 빈 버스가 도착하기를 바란다. 밭의 이랑보다 고랑을 더 많이 이용한다. 뾰족한 마루보다 오목한 골이 중요하다. 산길을 가더라도 마루를 타고 다니는 사람보다 골을 타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 존재는 독점되지만 부재는 공유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실체보다 관계가 낫다. 보석이나 현물은 실체다. 신용이나 인맥은 관계다. 돈은 관계를 실체화한 것으로 봐야 한다. 현물은 감가상각되지만 관계는 더 발달된다. 머릿속에 지식을 넣고 다니기보다 필요할 때 지식과 연결하는 기반을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 관악기는 관은 비워져 있다. 마루에서 골로 바뀔 때 각운동량은 가속된다. 레코드판도 마루가 아닌 골에 정보가 기록된다. 버스 정거장처럼 비워져 있으면서도 공유되는 것에 가치가 있다. 막연히 비움을 주장하면 곤란하다. 골은 그냥 있는 게 아니라 두 마루의 만남에 있다. 만날 때 배를 채우고 가면 실수한다. 트림하는 수가 있다. 만남은 균일해야 한다. 결맞음이다. 지구를 움직이려면 지구 하나가 필요하다. 균일한 만남을 통해서 비울 수 있다. 우리는 채움을 원한다. 사랑을 채우고, 행복을 채우고, 성공을 채우고, 평화를 채우고, 정의를 채우고, 도덕을 채우려 한다. 평화를 채우려 하므로 도리어 트러블이 일어난다. 정의를 채우려 하므로 엄격해지고, 도덕을 채우려 하므로 도리어 권위주의가 된다. 서로 간격을 두어야 한다. 매너로 침범을 막고, 에티켓으로 간격을 띄우고, 교양으로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사랑이나 행복이나 평화나 도덕이 침범의 구실이 된다면 배반이다. 이익의 이利는 뾰족한 이다. 뾰족한 것은 모다. 쓸모 있다고 말한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것을 이롭게 여긴다. 진정한 이로움은 만남이다. 칼은 칼집을 만나야 이롭다. 쏠로는 파트너를 만나야 이롭고, 젓가락은 두 짝이 만나야 이롭다. 북은 북채를 만나야 이롭고, 악기는 연주자를 만나야 이롭고, 무대는 배우를 만나야 이롭고, 상품은 소비자를 만나야 이롭다. 진정한 것은 부름과 응답으로 만나는 것이다. 서로를 불러내는 것이다. 불러서 마루에 세운다. 대칭을 이룬다. 호응해야 한다. 완전성이 거기에 있다. 둘이 마루에서 만나 골을 이룬다. 마루는 독점하고 골은 공유한다. 에너지는 만나서 골을 이루고 공유하는 데 있다. 거기에 찾아야 할 방향성이 있다. 증폭되기 때문이다. 무대는 하나라도 배우는 여럿이다. 공연은 1회라도 커플은 손에 손잡고 모여든다. 방송국은 하나라도 라디오는 여럿이다. 태양은 하나라도 만인이 공유하므로 증폭된다. 소유냐 존재냐? 소유도 부질없고 존재라도 망부석이다. 있어도 부질없고 없어도 허무하다. 채워도 숨이 막히고 비워도 가난하다. 마루에서 만나 골을 공유하는 것이 진실하다. 만나서 이겨야 한다. 말은 기수를 이기고, 운전자는 자동차를 이기고, 무사는 칼을 이기고, 배우는 무대를 이기고, 스포츠맨은 게임을 이긴다. 서로 이겨서 윈윈이다. |
골탕먹이려고 일부러 하는 주문이지요?
그러면 안 됩니다.
돈이 뭔지는 5살 꼬마도 안답니다.
돈의 어원은 은을 저울에 계량하다>저울에 달다>달란트(저울에 달았다는 뜻)
무게를 알 수 없는 덩어리 은괴가 아니고
저울에 달아 가치가 고정된 금이나 은을 돈이라고 했다고 봅니다.
돈방석이라는 말이 있는데 비단 한 필을 길이를 재서
가치를 고정시킨 것을 돈방석이라고 합니다.
금은 현물이지만 달러는 금보관증인데 원래는 빚입니다.
채권증서라는 말이지요.
즉 금을 교환할 수 있는 증명서가 달러인데
현물에 대한 관계입니다.
그리고 화폐의 개념은 현물에 대한 영수증임과 동시에 근본적으로 빚이다. 지금의 미국 달러는 금대신 미국의 국채로 가치를 보장한다.[4][나무위키}
이런 것을 나한테 검색시켜 먹으려고
즉 일시켜 먹으려고 초딩도 아는 질문을 했다면 진짜 나쁜 거지요.
요즘은 돈이 거의 은행계좌로 있지
누가 화폐로 갖고 있으며 화폐라도 교환가치를 나타내므로
빚을 실체인 화폐로 고정시켜 나타낸 관계입니다.
빚을 현물로 돌려받을 자격을 나타내는 거.
옛날에 유태인 랍비 중에 힐렐이라는 사람이
검은 것은 왜 검으냐? 요런 때려죽일 질문을 해도
끝내 인내하면서 악착같이 설명해줘서
흉악한 질문을 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었다는데
저는 힐렐이 아니라서 그런거 참지 않습니다.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러면 안 됩니다.
신용을 실체화 한다는 것 아닌지요?
돈이 아니라 관계를 실체화한다는 것을 여쭌것 입니다
거기에 왜 설명이 필요합니까?
빨간 색은 붉다고 말하면
빨간 색을 질문한게 아니라 붉다를 질문했다고 둘러대실 참인가요?
동사는 설명되는게 아닙니다.
전제와 진술이 있다면 전제를 설명하고 진술은 표현하는데
표현을 설명하라고 하면 폭력입니다.
커플이 반지를 교환해서 관계를 실체로 나타내든가
왕이 왕관을 써서 관계를 나타내든가
월드컵에 컵을 주든자 올림픽에 매달을 따든가
군인이 군복을 입든가
추상적인 관계를 구체적인 사물로 실체화 한 것은
흔한 건데 예술이나 작품이 다 그런 건데
그걸 가지고 물음표를 붙여서 걸고 자빠지면
사람을 괴롭히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번은 그의 학생들이 자기 선생님의 인내력을 시험하기로 했다. 그래서 누구든지 힐렐을 화나게 하는 사람에게 상 주기로 했다. 마침 금요일 낮에 힐렐이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있었다. 그때 한 학생이 힐렐이 목욕하고 있는 목욕탕 문을 노크했다. 그러자 힐렐은 젖은 몸을 수건으로 닦고 옷을 입고 나왔다. 그러자 학생은, “선생님 인간의 머리는 왜 둥글까요?”하고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을 했다. 그러자 힐렐은 열심히 대답했다. 학생이 돌아가자 힐렐은 다시 목욕탕으로 들어가서 몸을 씻기 시작했다. 그러자 학생이 다시 와서 문을 노크했다. 힐렐은 전과같이 다시 몸의 물끼를 닦고 옷을 입고 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왜 흑인은 검은 가요?”라고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힐렐은 그래도 흑인이 왜 검은지를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학생이 돌아가자 다시 목욕탕에 들어가서 몸을 씻기 시작했다. 그러자 학생이 다시와서 또 문을 노크하고 또 질문을 한다. 그래도 힐렐은 화내지 않고 대답했다. 이런 일이 다섯 번이나 되풀이 되었다. 그러나 힐렐은 짜증내지 않고 질문을 할 때마다 열심히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마지막에 학생들이 와서 “선생님 같은 분 때문에 제가 내기에 젔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잘 참으십니까?” 하자 힐렐이 대답하기를, “내가 인내력을 잃기보다 네가 돈을 잃는 쪽이 낫다”고 했다.
사람을 화나게 하려면 주어가 아닌 동사를 질문하면 됩니다.
반대로 기쁘게 하려면 동사에 대해 주어, 진술에 대해 전제를 질문하면 됩니다.
"마루에서 만나 골을 공유하는 것이 진실하다. 만나서 이겨야 한다."
이런 글에 질문이나 요청을 할 때는
자신이 이해한 부분과 모르는 부분의 경계를 설명한 후에
그런 요청을 하는 것이 기본매너입니다.
그거 설명 못하면 질문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말이라고 해서 아무 말이나 뱉으면 안되듯이..
=> 동렬님 , 추가 설명 부탁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