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는 모든 것의 시작이고 끝이다. 행복도 없고 쾌락도 없고 영생도 없고 영혼도 없고 천국도 없다. 그런 관념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며 집단 무의식에 따른 것이며 헛된 것이며 사회적 본능의 산물이다. 에너지만이 진실하다. 신비주의로 빠지지 말아야 한다. 기라든가 쿤달리니라든가 채널링이라든가 하는 것은 없다. 그냥 거짓말이다. 용기 있게 진실을 향해 전진해서 다음 스테이지를 열어야 한다. 세상의 법칙은 딱 하나다. 그것은 지름길을 가는 것이다. 에너지는 언제나 빠른 길을 간다. 빠른 길은 이기는 길이다. 이긴다는 표현에 붙잡히면 안 된다. 구조론의 용어로 이긴다는 말은 수학적인 것이다. 의사결정은 둘의 대칭에 따른 계의 모순을 해소하는 것이며 곧 하거나 아니면 당한다. 하는 것은 이기는 것이요 당하는 것은 지는 것이다. 하지 않으면 당한다. 당하는 것은 의사결정권을 빼앗기는 것이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다. 주인은 하고 노예는 당한다. 에너지는 연쇄고리로 이어진다. 앞서는 쪽이 하고 따르는 쪽이 당한다. 작용과 수용이며 능동과 수동이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이어가며 기가 하면 승이 당하고 승이 하면 전은 당한다. 큰 것과 작은 것이 충돌할 때 의사결정 중심은 큰 것에 있다. 큰 것은 하고 작은 것은 당한다. 중심이 작은 것에 있으면? 흔들린다. 파동이 생긴다. 파동은 중심이 바깥에 있다. 빛이 파동이라는 말은 중심이 자기장과 전기장이 교차하는 지점이 빛의 전진에 의해 계의 바깥에 형성된다는 말이다. 그 경우는 계가 깨진다. 파도는 흩어진다. 파동은 곧 죽는다. 젊은이는 중심을 피하고 변방에 머무른다. 그래서 공동체에 관심이 많고 사유재산보다 공유자산에 주목한다. 섣불리 계의 중심부로 진입하다가는 튕겨 나가기 때문이다. 이기지 못하고 진다. 하지 못하고 당한다. 에너지가 약한 젊은이는 무대 위의 배우보다 객석의 관객이 된다. 학생이 되려고 한다. 그러나 에너지가 생기면 중심부로 진입하려고 한다. 무거운 것이 주변부에 있으면 파동이 커져서 계가 깨지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를 회피하게 된다. 집단의 중심에 있으면 방해자의 방해를 덜 받는다. 파장이 짧아진다. 파장은 짧아지려는 속성이 있다. 원심분리기와 같다. 무거운 것은 중심지로 가면 파장이 짧아지고 가벼운 것은 가장자리로 밀려서 파장이 커진다. 강한 에너지가 있으면 구심력을 받는다. 에너지는 오직 수학적 법칙으로 작동하며 자연의 법칙이면서 인간의 심리다. 다만 강자냐 약자냐, 중심부냐 주변부냐, 젊은이냐 늙었느냐에 따라 다른 전략을 선택하게 된다. 구조론의 결론은 강자의 철학이며 약자의 처세나 적응은 따로 논할 이유가 없다. 약자의 도주에는 전술이 필요 없다. 그냥 도망치면 된다. 강자의 도전에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약자가 죽는데 어떻게 죽으면 예쁘게 죽는가? 이런 건 연구하지 않는다. 어떻게 죽든 상관없다. 어떻게 당하든 상관없다. 어떻게 패배하든 상관없다. 오로지 사는 길을 연구할 것이며 하는 길을 추구할 것이며 이기는 길을 찾을 뿐이다. 죽는 방법, 지는 방법, 당하는 방법은 몰라도 된다. 가만있으면 당한다. 가만있으면 죽는다. 가만있으면 당연히 진다. 인간은 대부분 약자다. 그러므로 지는 방법에 관심이 있다. 그들은 언제나 지기 때문이다. 처세하고 적응하려고 한다. 필요 없다. 다만 극소수가 이겨서 길을 만들면 모두가 혜택 본다. 이때는 지는 사람들도 묻어간다. 일본이 조선을 이겼다 해도 일본인 중에 몇 사람이 이긴 것이며 나머지는 묻어간 것이다. 묻어가는 사람이라도 이기는 길을 배워야 한다. 어떻게 에너지를 만들고 그 에너지를 다스려서 목적을 달성할 것인가? 문제는 여기서 에너지를 유도하는 방법과 제어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점이다. 에너지를 유도하려면 균일해야 하지만 에너지를 제어하려면 불균일해야 한다. 에너지를 유도할 때는 공유가 낫고 제어할 때는 사유가 낫다. 이런 모순 때문에 헷갈리게 된다. 순서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선공유 후사유다. 권력도 그러하고 자본도 그러하고 마음도 그러하다. 남녀가 맺어져도 공유하려는 것이다. 공유하려고 하므로 침범하게 된다. 마찰하게 된다. 헤어지게 된다. 크게 공유하면서 적절히 사유할 영역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전체를 공유하고 부분을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는 공유가 마치 플러스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착각이다. 우주 안에 플러스는 없다. 사건은 발생했다가 발전되다가 소멸한다. 아니다. 발전은 없다. 뭐든 마이너스다. 작아진다. 사건EVENT의 정의가 중요하다. 이벤트는 주사위를 한 번 던지는 것이며 두 번 던지면 안 된다. 1회의 에너지 입력을 기준으로 계를 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남녀가 만나 커플이 되는 것은 사건의 발전이 아니다. 별개의 사건이 된다. 춘향의 삶이 사건 1이면 몽룡의 삶은 사건 2다. 둘이 만난 커플은 사건 3이다. 춘향이 커플이 되어 플러스 된 것이 아니다. 춘향과 몽룡이 별개의 사건이면서 새로운 사건을 복제한 것이다. 이때 추가로 에너지가 투입된다. 둘이 결혼하면 부조금이 들어오고 신뢰가 들어오고 신분이 바뀐다. 외부에서 별도 에너지가 들어오므로 사건은 새로 복제된 것이다. 세상은 마이너스이며 춘향은 마이너스 되어 늙는다. 몽룡도 마이너스 되어 타락한다. 커플도 마이너스 되어 서먹서먹해진다. 그사이에 아기라는 새로운 사건이 탄생한다. 하나의 사건은 무조건 마이너스지만 외부 환경과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새로운 사건이 복제되는 것이다. 그것이 플러스처럼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에너지원에 비용이 더 발생한다. 세상이 오직 마이너스라는 한 방향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헷갈리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무언가를 플러스할 수 없지만 대신 복제할 수 있다. 행복을, 쾌락을, 성공을, 영생을, 천국을 플러스할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런 것은 없다. 지어낸 이야기다. 다만 선배는 후배를, 부모는 자식을, 스승은 제자를 복제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진정한 삶의 가치다. 내가 무엇을 얻는 게 아니라 무엇을 복제하는 것이다. 복제본은 내 소유가 아니다. 노무현이 무엇을 획득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노무현을 복제하면 성공이다. 사건을 키워가는 것이 중요하다. 전파하고 증폭하고 공명하는 게 중요하다. 무언가를 획득하는 것은 없다. 인간은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지만 그사이에 사건을 하나 복제해놓고 떠난다. 답은 에너지다. 에너지라는 물질이 있다고 믿는 자라면 피곤한 거다. 에너지는 수학이다. 물질이라면 별도로 이름이 붙을 것이다. 세상은 그저 수학이다. 수학 안에 의사결정구조가 있다. 이긴다는 표현을 오해하면 안 된다. 에너지는 전달된다. 전달하는 쪽이 이기는 것이고 전달받는 쪽이 지는 것이다. 에너지를 잘못 전달받으면 계가 깨져서 소멸된다. 그게 전부다. 인생은 이기거나 죽거나다. 에너지를 전달하거나 죽거나다. 에너지를 전달하는 편에 서야 한다. 총은 에너지를 전달하고 과녁은 에너지를 전달받는다. 과녁이 되어 있으면 계속 얻어맞다가 죽는다. 깨지는 것이다. 의사결정할 수 없게 된다. 계 내부로 들어온 에너지를 용이하게 처리하여 외부로 전달해야 이겨서 자기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왜 지면 안 되는가? 지면 안 되는 게 아니고 지면 당하다가 결국 사라지므로 되고 안 되고 간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라졌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죽은 사람에게 해줄 말은 없다. 이기는 게 능사는 아니지만 결국은 이기는 길로 가야 한다. 단기전을 지더라도 장기전을 이기고, 국지전을 지더라도 전면전을 이기고, 부분을 져도 전체를 이긴다. |
"에너지는 전달된다. 전달하는 쪽이 이기는 것이고 전달받는 쪽이 지는 것이다. ~ 그게 전부다. 인생은 이기거나 죽거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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