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영의 경우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세상은 물질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의 연결이기 때문이다. 사건이 연결되는 마디들에서 인간은 운명의 기로에 선다. 갈림길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거기에 연동되어 일어나는 다른 많은 사건에도 책임져야 하며 그러므로 스트레스받는다. 그러나 자유의지는 에너지가 작동하는 사건의 도입부에 있을 뿐이고 사건이 상당히 진행된 단계에서는 자유의지가 없거나 약하다. 핸들을 잡을지 말지는 자유의지로 선택하지만 이미 핸들을 잡았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중간에 핸들을 놓을 수는 없다. 달리는 호랑이 등에서 뛰어내릴 수 없다. 상황에 휩쓸리게 된다. 계에 에너지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는 YES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유행 따라 친구 따라 분위기 따라 사건의 에너지 흐름에 말려들어 무의식적으로 집단이 원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에너지를 빼앗긴 거다. 변희재와 윤서인들의 관종짓이다. 그들은 원래부터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독립적 판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원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소속된 패거리에 아부하는 짓이다. 패거리의 에너지에 붙잡혀 있는 것이며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들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 그러나 무엇을 하지 않는 NO는 선택의 여지가 있다. 3월의 만세, 4월의 혁명, 5월의 저항, 6월의 투쟁 그리고 탄핵을 완성시킨 그해 겨울의 촛불은 민중의 자유의지에 따른 NO의 선언이다. 인간은 NO 할 수 있는 동물이므로 자유의지가 있다. 에너지는 NO로만 통제된다. BTS의 방시혁이 증언하듯이 무언가 긍정하는 야망, 탐욕, 도전, 희망, 의지, 신념, 의욕들은 대부분 타인에게 설명하기 위해 꾸며대는 가짜이고 무언가를 거부하고 반대하고 저항하는 NO는 진실하다. 방시혁을 키운 것은 이건 아니잖아 하는 부조리에 대한 분노였다고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에너지는 집단에서 나온다. 개인은 긍정하고 도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집단의 분위기에 휩쓸리는 존재이며 인지부조화 원리에 따라 먼저 행동해놓고 나중에 야심이니 의도이니 욕망이니 하며 변명을 그럴듯하게 하는 것이다. 마광수는 또 왜 그랬을까?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그에게 대단한 성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면 남들이 좋아할 줄 알고 그랬던 것이다. 실제로 그의 지지자들은 마광수의 그런 모습을 좋아했다. 화통하고 좋잖아. 온통 낙관주의가 지배하던 60년대 학생혁명 70년대 히피시대의 분위기를 탔다. 한번 궤도에 올라버리면 이후 관성력에 지배되는 것이며 자력으로는 탈출하지 못한다. 방향전환이 가능해야 한다. 인생에 한 번은 방향을 틀어야 한다. 세력에 묻어가지 않고 강한 개인으로 독립해야 한다. 자기 에너지원을 가져야 한다. 마광수도 이문열도 묻어간 사람이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인 것이며 방향전환이 자유의지의 의미인 것이며 그것이 동물에게 없고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인 것이며 그러므로 선제대응하여 환경과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조건들을 미리 만들어 두어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념과 이상주의와 철학과 정당과 진영을 따르고 가담할 때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다. 피아구분을 잘해야 한다. 나의 소속을 분명히 해야 한다. 누가 내편인지 똑똑히 알아야 한다. 이방인은 그럴 수 없다. 자기편이 없다. 정준영은 왜 그랬을까? 그는 초등학교만 한국에서 다녔을 뿐 줄곧 외국을 떠돌았다. 태어나자마자 인도네시아로 이주하는 등 무려 8개국을 전전했던 것이다. 외국을 전전하면서 심리적인 이방인이 되어 있다. 소년기에 주변에 말려줄 사람이 없었다. 부모의 허락도 없이 한국에 귀국한 것부터 그렇다. 역으로 사고를 쳐서라도 자신을 말려줄 사람을 생산하려고 하는 무의식이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질러졌을 때는 유승민처럼 너무 늦은 것이며 수습은 난망이다. 별명이 잘 자란 또라이인데 그게 자신을 거꾸로 타자화하고 대상화하고 위악을 저지르는 이방인의 심리다. 자신에게 남을 지배할 권력적 에너지가 없으므로 자신을 길거리에 함부로 투척하여 놓고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집적거리는지 지켜보며 낄낄거리는 심리다. 권력적인 샤르트르와 대비되는 반권력적 까뮈의 심리가 그러하다. 자신에게 허용되는 한계선을 시험하려는 의도이다. 자신에게 남의 운명을 지배하는 권력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을 부평초처럼 떠도는 존재로 여긴다. 동영상을 공유하며 그들 패거리에 아부한 것이다. 자기비하로 먹고사는 개그맨들처럼 말이다. 그의 인생은 지저분한 자학개그다. 인기에 연연하는 권력 없는 자들이다. 그 반대로 가야 한다. 우리는 타인을 타자화하고 대상화하지 말아야 하듯이 자기 자신도 타자화하지 말고 대상화하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자신을 주체화하고 대표화해야 한다. 타인을 타자화하고 대상화하는 것은 자신이 권력자 포지션에 세우고 타인을 지배하는 거다. 반대로 주체화하고 대표화하는 것은 자신의 권력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타인의 운명을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백인이 함부로 흑인의 운명을 흔들어 버린다면 그것이 타자화요 대상화다. 노예주는 가벼운 말 한마디로 흑인 노예를 죽일 수도 있다. 그런 점을 의식하고 신중하게 행동한다면 주체화하고 대표화하는 것이다. 반대로 이방인의 심리에 빠져 자신은 운명에 흔들리는 부평초 같은 존재이며 권력이 없으므로 책임도 없다고 믿으면 정준영 되고 유승민 된다. 인기에 휘둘리는 한낱 연예인에 무슨 권력이 있느냐? 아니다. 권력이 있다. 대단한 특권을 누리고 있다. 연예인이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추종자가 있고 모방자가 있기 때문이다. 남녀관계도 같다. 여자든 남자든 상대방의 운명을 함부로 흔들어 대는 권력적인 행동은 안 되는 것이다. 반대로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운명을 쥐고 흔들도록 방치하는 위악을 저질러도 안 된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노숙자들처럼 세상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있다면 박근혜가 설치고 이명박이 나대도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발언권이 없다. 정준영은 자기 자신에게 NO를 하지 않은 것이며 노숙자의 심리가 되어 자신에게는 발언권이 없다고 믿은 것이다. 잘 자란 또라이인 이방인 주제에 말이다. 공인으로서 타인의 운명을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거다. 끊을 수 있는 것은 끊어야 한다. NO라야 한다. 그러므로 끊을 만한 연결점들을 미리 챙겨놓고 있어야 한다. 이미 연결이 끊어져 있는 사람은 끊을 수 없다. 이념도 없고, 사상도 없고, 철학도 없고, 정당도 없고, 진영도 없다면 끊을 수 없다. 친구도 있고, 가족도 있고, 동료도 있고, 동지도 있고, 이상주의도 있어야 끊어낸다. 정준영은 한국 포함 9개국을 떠돌며 자신에게는 그러한 연결점들이 없다고 믿은 것이다. 자신을 타자화하고 대상화한 것이다. 자기소외다. 그런 사람 있다. 지나치게 사람들 사이에 끼어 분위기를 띄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까지 봉사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타인을 소외시키지 말아야 하며 자기를 소외시키지도 말아야 한다. 무리에 끼려고 빵셔틀을 자원하는 비참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많이들 그렇게 한다. 패거리를 위해 자봉 빵셔틀 하다가 신세만 조진 변희재, 윤서인들 많다. 사람들 사이에서 고립되어 허우적대고 있다. |
욕망운운하는데, 욕망이 없다는게 아니라,
이미, 내적외적 관계에서 어그러져있다는게 중요.
어긋나면, 그 자체로 에너지는 되는데, 어깃장을 끝까지 부려서,
상황을 망가뜨리고, 자신을 희생해서, 사회의 약점을 알리려는 행동.
치료 요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