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적 세계관이 필요하다. 일찍이 헤라클레이토스가 갈파한 바 있다.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변화는 불변을 설명할 수 있다. 변화가 제 자리에서 반복되면 그것이 불변이다. 하나로 두 가지를 설명하므로 일원론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원론적 사유에 매몰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이 대표적이다. 씨앗이 질료라면 나무는 형상이다. 나무가 질료라면 나무로 만든 책상은 형상이다. 그러한 변화 그 자체가 질료이자 동시에 형상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씨앗과 나무와 책상은 모두 눈에 보이는 것이다. 즉 변하지 않는 것이다. 씨앗을 놔두면 계속 씨앗에 머물러 있다. 나무를 놔두면 계속 나무로 머물러 있다. 책상을 놔두면 계속 책상에 머물러 있다. 즉 우리는 변하지 않는 것을 중심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왜 변화를 사유하지 못할까? 인간의 사유는 짝짓기 방법을 쓴다. 관측자인 자신과 대칭시키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둘을 대칭시키지 못한다. 이쪽으로 연결된 끈을 잡으면 저쪽으로 연결된 끈을 놓아버린다. 인간과 연결시키므로 객체 내부에서 서로 붙잡고 있는 질서를 보지 못한다. 우주에는 변하는 것과 정지한 것이 있다. 모든 것은 변화다. 정지한 것은 변화가 교착된 것이다. 이 경우는 변화가 상호작용하는 계 내부로 숨었을 뿐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구조론은 교착상태가 풀리면서 내부에 숨은 변화가 겉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해명한다. 양자역학의 최신 성과는 동적 세계관을 뒷받침하고 있다. 우리가 유물론, 원자론, 결정론으로 뒷받침되는 정적 세계관을 극복해야 한다. 인류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인류문명을 통째로 다시 설계해야 한다.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원자는 내부가 없다. 쪼갤 수 없다. 인간은 언제나 외부의 작용에 의해 변화가 일어난다고 생각된다. 인류는 사건 내부에서 일어난 자발적 변화를 추적한 적이 없다. 인류는 자연의 절반만 본 것이다. 나머지 절반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모르는 척 했다. 정지한 것이 어떤 외부의 이유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것이 내부에서 나란하면 머무르는 것처럼 보인다. 교착상태는 언제든지 풀릴 수 있다. 변화는 언제나 내부의 이유로 일어난다. 당구공을 친다면 변화는 당구공 밖에서 시작되지만 게임 안에서 일어난다. 조금 단위를 높여서 보면 언제나 원인은 내부에 있다. 단위를 높여서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의 어떤 행동은 그 사람이 소속된 집단으로부터 암묵적인 합의와 암시와 심리적인 압박을 받아서 일어난 것이다. 집단의 무의식을 파헤치는 것은 힘들다. 그러므로 포기한다. 교사범은 놔두고 실행범만 족친다. 집단의 구성원 모두가 교사범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실행범이 나쁜 사람이며 그 사람의 신체 내부에 악의 원소가 가득 들어차 있다는 식으로 생각해 버린다. 이는 비겁한 도피다. 해결하기 힘든 큰 문제를 임의로 좁혀서 작은 문제로 바꾼다. 만만한 놈을 족치려는 비겁한 태도다. 그 한 사람을 제거하면 문제가 해결되는듯 보이지만 금새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악순환은 계속되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시야를 좁혀서 보기 때문이다. 더 큰 단위로 보면 변화는 언제나 내부에서 일어난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법칙이 정해져 있다. 내부의 밸런스가 통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내부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포기한다. 내부사정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지적 태만이자 비겁함이다. 용기를 내야 한다. 한 걸음 더 전진해야 한다. 세상은 변화다. 인류가 알고 있는 변화를 해명하는 논리는 인과율 하나 뿐이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 그 사이에 의사결정이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 내부 밸런스의 붕괴에 의해 일어나는 자발적인 변화는 새로운 밸런스를 찾을때까지 단계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원인의 원인이 있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모두 원인이 될 수 있고 모두 결과가 될 수 있다. 하나의 사건에는 다섯가지 중간원인이 있고 동시에 다섯가지 중간결과가 있다. 원인과 결과 두 단어만으로 이 거대한 우주를 설명한다면 터무니 없는 것이다. 막연히 변화가 외부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므로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전제가 틀렸다. 변화는 내부에서 일어나므로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자동차가 가다가 멈췄다. 외부에서 다른 차가 박았을 수 있고 내부에서 고장났을 수도 있다. 외부의 충격이 원인이면 간단하다. 앞차가 박았거나 뒷차가 박은 거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내부에서 고장이 났다면 복잡하다. 어디가 끊어졌다면 그것이 끊어지게 한 작용이 또 있는 것이다. 고장은 특정 부품에서 나지만 원인은 잘못된 운전습관 때문일 수도 있고 도로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인과율은 시간에 대한 해명이다. 공간은? 공간과 시간의 통합은? 우리는 거의 눈을 감고 있다. 변화는 자궁이 있으므로 추적할 수 있다. 시스템을 구성하는 닫힌계와 닫힌계 내부의 상호작용과 의사결정의 코어와 치고나가는 방향성과 그것을 결정하는 밸런스와 배후의 동력원과 중간의 전달경로와 핵심의 조절장치를 모두 알아야 한다. 인간의 생각하는 방법은 자극과 반응의 방법이다. 이는 동물적 본능이다. 자극과 반응의 방법은 객체와 연결되어야 가능하다. 그 연결의 끈을 놓지 못하므로 객체 내부의 새로운 연결을 찾아내지 못한다. 우주는 대칭이다. 대칭은 연결이다. 인간의 사유에는 근본적인 맹점이 있다. 인간은 한 꺼번에 두 가지 생각을 못한다. 이것을 붙잡으면 저것을 놓아버린다. 이것과 연결하면 저것과의 연결이 끊어진다. 인간은 자극과 반응이라는 상호작용 구조에 붙잡혀 있다. 외부의 객체에 자극하고 반응을 끌어내려는 본능 때문에 겉핥기로 될 뿐 내부를 깊이 들여다보지 못한다. 저글링 묘기는 한꺼번에 두 가지 동작을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두 손을 각각 움직이지만 익숙해지만 두 손을 한손처럼 움직인다. 저글링은 훈련을 해야 가능하다. 움직이는 것을 보려면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다. 이제 인류는 변화를 보는 사람과 변화를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졌다. 문명인과 야만인처럼 가는 길이 다르다. 그 둘은 만나지 못하며 서로는 대화할 수 없다. 야만인이 문명인이 되는 수는 있어도 그 역은 없다. 쫓아오지 못하면 낙오된다. 동적 세계관, 연결의 세계관, 변화의 세계관, 상호작용의 세계관, 구조의 세계관을 얻어야 한다. 그림자의 맞은 편에서 빛을 발견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