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어서 따로 설명이 필요 없다. 구조가 아니라면 다른 무엇으로 되어 있다는 말인가? 세상을 이루는 다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구조다. 구조는 '이루다'와 같다.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든 세상은 이루어져 있다. 구조 = 이루다. 구조론 = 세상은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언어는 주어와 술어의 결합이다. 구조는 술어다. 주어만으로는 언어를 성립시킬 수 없다. 구조를 부정하면 존재는 불성립이다. 이루어짐이 없으면 존재도 없는 것이다. 반대로 주어 없이 술어만으로는 말을 할 수 있다. 주어는 인간과 객체를 연결시키고 술어는 그것의 변화를 나타낸다. 변화가 먼저고 인간과 객체의 연결은 나중이다. 인간의 사유가 말에 갇히면 안된다. 언어는 주어가 먼저지만 자연은 술어가 먼저다. 과학은 인간의 관념을 버리고 자연의 실재를 따라가야 한다. 인간의 언어는 궁극적으로 의성어에서 나온 것이다. 불이 탄다. 나무가 탈 때 '타닥타닥' 소리가 난다. 물이 끓는다. 물이 끓을 때 '끌끌' 소리가 난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면 '부우' 하고 소리가 난다. 자연의 소리가 그대로 인간의 언어가 되었다. 동사는 자연의 변화를 가리킨다. 자연의 변화는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타다, 불다, 끓다는 동사다. 동사는 변화다. 변화는 구조다. 구조는 자연의 객관적 실재다. 술어가 먼저다. 변화가 먼저고 인간의 입장은 그다음이다. 원소나 원자 개념은 주어 포지션에 아무거나 가져다 놓은 것이다. 일종의 가주어라 하겠다. 자연에 술어가 있는데 그것을 언어라는 그릇에 담아내려고 하니 주어라는 손잡이가 필요하므로 원자가 있다고 친다. 그렇게 하면 말하기 편하다. 인간이 언어의 편의로 진실을 왜곡한 것이다. 주어는 컵의 손잡이 같은 것이며 그것이 있으면 좋지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없다. 숫자 0과 같다. 숫자는 0에서 시작된다. 0은 뒤늦게 발견된다. 가장 먼저 와야 하는 것이 가장 늦게 출현한다. 인도인이 발견한 숫자 0을 아랍인이 서양에 전해주고도 무려 천 년 동안 서양은 0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파스칼은 0에서 3을 빼면 0이 된다고 생각했다. 17세기에 이르러서야 서양이 0을 받아들였다. 세상은 주어와 술어로 되어 있는게 아니라 술어로 되어 있다. 주어는 그것을 인간과 대칭시키는 장치다. 술어는 움직임을 나타낸다. 주어는 그것이 멈추어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멈추어야 인간이 개입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속임수다. 0은 숫자 자체에 내재한 논리다. 인간과 관계없다. 서양이 0을 부정한 것은 인간과 대칭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 중심의 사유다. 내 눈앞에 뭔가 갖다놔야 안심된다는 식이다. 0은 갖다놓을게 없으니까 부정한다. 0은 인간과 상관없는 자연의 모습이다. 인간은 어떻게든 자신과 대칭시키려고 한다. 없는 주어를 찾으려고 한다. 자신과 짝을 짓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포지션을 규정해야 신경 쓰이지 않는다. 인간의 감정을 들이대면 비과학이다. 내가 존재하므로 너도 존재해야 한다는 식의 우격다짐이다.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고, 불이 타는 것은 자연이 스스로 그러한 것이지 인간과 대결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자연에 개입하여 바람을 막고, 물을 마시고, 불을 끄려고 하므로 특별히 이름을 얻어서 인간에게 지목된 것이 주어다. 자연의 본래는 구조다. 그것은 동사다. 그것은 술어다. 그것은 변화다. 그것은 이루어짐이다. 그것을 명사화하고 주어화하여 원자나 원소로 규정하는 것은 인간의 부당한 개입이다. 원자나 원소 개념은 인간이 자연에 개입하여 객체를 변형시키려고 할 때 필요한 개념이다. 내가 너를 만질 수 있어야 하니까 너는 딱딱한 알갱이 입자의 형태로 존재하도록 하라는 식의 억지다. 누구 맘대로? 누구 좋으라고? 자연이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는 아니다. 존재는 단위다. 사람이 찾으려는 주어는 단위다. 세상이 처음부터 어떤 단위로 존재한다고 인간은 상상해 버린다. 구조는 단위가 만들어지는 절차다. 어떤 단위가 처음부터 존재해 있고 그것이 어떤 외적인 이유로 변화한 것이 아니라 먼저 변화가 있었고 그 변화가 멈춰서 단위가 된다. 질은 결합하고, 입자는 독립하고, 힘은 충돌하고, 운동은 변화하고, 량은 이탈한다. 그것은 변화다. 구조론은 세상을 변화 중심, 술어 중심, 동사 중심으로 이해한다. 태초에 변화가 있었다. 우리는 세상을 단위 중심으로 이해하지만 단위는 변화가 계에 갇힌 결과다. 원인 중심의 사유를 얻어야 한다. 원인은 이루어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