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단일화에 합의하고 악수를 교환하고 있다. 그 순간 누가 더 많은 카메라세례를 받게 될까? 그 사람이 진다. 과연 누가 더 많은 박수를 받을 것인가? 더 많은 박수를 받은 사람이 패자의 역을 맡는다.
유권자는 공평하다. 으레히 그러하듯이 한 사람에게는 인기를 주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후보자리를 준다. 한 사람인 속 빈 영광을 얻고 한 사람은 실속있는 권력을 잡는다. 패자는 갈채를 얻고 승자는 대통령이 된다.
유권자의 균형감각이다. 여론조사에 바로 반영되고 있다. 지지율은 뒤집어졌다. 과연 누가 승자가 될까? 본질을 봐야 한다. 그동안 유권자들이 누구를 더 주시하고 누구를 더 압박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어제의 주인공 정몽준이었다. 정몽준이 더 많은 박수를 받았고, 더 멋진 연설을 하였고, 앞장서서 포장마차에서의 2차를 제안했다. 물론 그날 하룻밤의 주인공 말이다.
언뜻 보면 정몽준의 승리처럼 보인다. 정몽준은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았으면서 마치 큰 것을 양보하기라도 한 것처럼 의기양양하다. 유권자들도 그러한 연극에 스스럼없이 동참한다. 그 포즈가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적하지 않는다. 왜?
연극이기 때문이다. 다들 알고있기 때문이다. 과거 DJ가 김영삼에 패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을 때 쏟아졌던 그 박수갈채를 기억하는가? DJ가 정계은퇴를 선언하자 잡아먹을 듯 하던 조선일보가 돌연 태도를 바꾸어 DJ특집을 마련하고 DJ를 찬양하던 그 화려한 쇼 말이다.
역시 쇼였다. 조선일보의 뜬금없는 DJ찬양은 혹시나 DJ가 다시 돌아올까봐, DJ의 퇴장을 움직일 수 없는 기정사실로 만들기 위한 말뚝박기 작업이었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있다. 마찬가지다. 엊그제 단일화선언의 주인공은 정몽준이었다. 예약된 패자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위로금으로 보낸다.
국민들은 알고 있다. 말 안해도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다. 명분이니 체면이니 노선이니 헛소리들은 집어쳐야 한다. 본질을 가지고 논해야 한다. 유권자들이 그동안 누구를 주시했고, 누구에게 관심을 보냈고, 누구에게 더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는가이다.
유권자들은 노무현을 압박했다. 어차피 밑질 거 없는 정몽준에게는 압박이 통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정몽준은 유권자들이 '노무현 길들이기'를 위하여 사용하는 소도구였다.
내 주변 사람들부터 그랬다. 국민경선 직후에는 다들 노무현을 지지했다. 어느날 부터인가 슬슬 태도를 바꾸더니 노무현을 버리고 정몽준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이유는 불분명했다. 그냥 불안한다는 것이다.
핑계다. 본질은 통과의례다. 노무현은 선명한 개혁노선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유권자는 노무현만큼 도덕적이지 않다. 이때 유권자들은 도덕적 열패감을 느낀다. 유권자들은 노무현이 하겠다는 개혁의 대상이 바로 자기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뭐시라? 노무현이 나를 개혁해버리겠다고. 그래 너 잘났다. 노무현 너는 잘난 개혁가이고 우리는 멍청한 유권자다. 니혼자 잘해봐라. 흥!"
삐쳐서 돌아앉았다. 그들은 노무현 길들이기에 착수했다. 그 도구는 정몽준이다. 유권자들은 정몽준을 사용해서 노무현에게 압력을 넣는다. 변하라고 말한다. 그 본심은 유권자인 나를 용서하라는 것이다.
지도자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면 대중은 열등감을 느끼고 지도자를 거부하게 된다. 이때 방법은 하나 뿐이다. 스킨십이다. 두가지가 있다. 김대중이나 김영삼처럼 생고생을 하든가 아니면 유머라도 익혀서 친구처럼 편안하게 해주든가이다.
노무현은 유권자를 불편하게 했다. 저는 잘나서 개혁가이고 유권자인 나는 못나서 개혁대상인데 마음이 편할 리가 있겠는가? 잘난 노무현선생님이 못난 학생인 나를 꾸짖고 야단치고 가르치겠단다. 심히 불쾌하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 아무리 꾸짖고 야단쳐도 나의 가족이라면 받아들인다. 노무현이 나의 큰 형이고, 나의 아버지고, 나의 삼촌이라면 꾸지람을 받아들인다. 왜? 가족이니까. 이를 위해서는 통과의례가 필요하다. 가족이 되는 절차가 필요하다.
유권자들은 정몽준을 사용하여 노무현을 시험했던 것이다. 노무현을 길들이려 한 것이다. 노무현을 심리적인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절차를 수행한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도 언제나 주인공은 노무현이었다.
정몽준 좋아서 지지한 사람 없다. 노무현이 왠지 믿음이 안가서, 노무현이 왠지 불안해서, 노무현이 왠지 미심쩍어서 그 왠지 때문에 정몽준을 이용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언제나 관심의 대상은 노무현이었다. 이것이 본심이다.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너도 알고 나도 안다. 유권자의 본심은 이미 노출되었다. 좋으면서 싫은척 하는 연극은 막을 내린다. 게임은 끝났다. 아직 삼페인을 터뜨릴 때는 아니라고? 맞는 말이다. 승부는 끝났어도 드라마는 계속된다. 샴페인은 이 멋진 드라마를 마저 지켜보고 터뜨려도 좋다.
유권자는 공평하다. 으레히 그러하듯이 한 사람에게는 인기를 주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후보자리를 준다. 한 사람인 속 빈 영광을 얻고 한 사람은 실속있는 권력을 잡는다. 패자는 갈채를 얻고 승자는 대통령이 된다.
유권자의 균형감각이다. 여론조사에 바로 반영되고 있다. 지지율은 뒤집어졌다. 과연 누가 승자가 될까? 본질을 봐야 한다. 그동안 유권자들이 누구를 더 주시하고 누구를 더 압박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어제의 주인공 정몽준이었다. 정몽준이 더 많은 박수를 받았고, 더 멋진 연설을 하였고, 앞장서서 포장마차에서의 2차를 제안했다. 물론 그날 하룻밤의 주인공 말이다.
언뜻 보면 정몽준의 승리처럼 보인다. 정몽준은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았으면서 마치 큰 것을 양보하기라도 한 것처럼 의기양양하다. 유권자들도 그러한 연극에 스스럼없이 동참한다. 그 포즈가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적하지 않는다. 왜?
연극이기 때문이다. 다들 알고있기 때문이다. 과거 DJ가 김영삼에 패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을 때 쏟아졌던 그 박수갈채를 기억하는가? DJ가 정계은퇴를 선언하자 잡아먹을 듯 하던 조선일보가 돌연 태도를 바꾸어 DJ특집을 마련하고 DJ를 찬양하던 그 화려한 쇼 말이다.
역시 쇼였다. 조선일보의 뜬금없는 DJ찬양은 혹시나 DJ가 다시 돌아올까봐, DJ의 퇴장을 움직일 수 없는 기정사실로 만들기 위한 말뚝박기 작업이었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있다. 마찬가지다. 엊그제 단일화선언의 주인공은 정몽준이었다. 예약된 패자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위로금으로 보낸다.
국민들은 알고 있다. 말 안해도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다. 명분이니 체면이니 노선이니 헛소리들은 집어쳐야 한다. 본질을 가지고 논해야 한다. 유권자들이 그동안 누구를 주시했고, 누구에게 관심을 보냈고, 누구에게 더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는가이다.
유권자들은 노무현을 압박했다. 어차피 밑질 거 없는 정몽준에게는 압박이 통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정몽준은 유권자들이 '노무현 길들이기'를 위하여 사용하는 소도구였다.
내 주변 사람들부터 그랬다. 국민경선 직후에는 다들 노무현을 지지했다. 어느날 부터인가 슬슬 태도를 바꾸더니 노무현을 버리고 정몽준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이유는 불분명했다. 그냥 불안한다는 것이다.
핑계다. 본질은 통과의례다. 노무현은 선명한 개혁노선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유권자는 노무현만큼 도덕적이지 않다. 이때 유권자들은 도덕적 열패감을 느낀다. 유권자들은 노무현이 하겠다는 개혁의 대상이 바로 자기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뭐시라? 노무현이 나를 개혁해버리겠다고. 그래 너 잘났다. 노무현 너는 잘난 개혁가이고 우리는 멍청한 유권자다. 니혼자 잘해봐라. 흥!"
삐쳐서 돌아앉았다. 그들은 노무현 길들이기에 착수했다. 그 도구는 정몽준이다. 유권자들은 정몽준을 사용해서 노무현에게 압력을 넣는다. 변하라고 말한다. 그 본심은 유권자인 나를 용서하라는 것이다.
지도자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면 대중은 열등감을 느끼고 지도자를 거부하게 된다. 이때 방법은 하나 뿐이다. 스킨십이다. 두가지가 있다. 김대중이나 김영삼처럼 생고생을 하든가 아니면 유머라도 익혀서 친구처럼 편안하게 해주든가이다.
노무현은 유권자를 불편하게 했다. 저는 잘나서 개혁가이고 유권자인 나는 못나서 개혁대상인데 마음이 편할 리가 있겠는가? 잘난 노무현선생님이 못난 학생인 나를 꾸짖고 야단치고 가르치겠단다. 심히 불쾌하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 아무리 꾸짖고 야단쳐도 나의 가족이라면 받아들인다. 노무현이 나의 큰 형이고, 나의 아버지고, 나의 삼촌이라면 꾸지람을 받아들인다. 왜? 가족이니까. 이를 위해서는 통과의례가 필요하다. 가족이 되는 절차가 필요하다.
유권자들은 정몽준을 사용하여 노무현을 시험했던 것이다. 노무현을 길들이려 한 것이다. 노무현을 심리적인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절차를 수행한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도 언제나 주인공은 노무현이었다.
정몽준 좋아서 지지한 사람 없다. 노무현이 왠지 믿음이 안가서, 노무현이 왠지 불안해서, 노무현이 왠지 미심쩍어서 그 왠지 때문에 정몽준을 이용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언제나 관심의 대상은 노무현이었다. 이것이 본심이다.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너도 알고 나도 안다. 유권자의 본심은 이미 노출되었다. 좋으면서 싫은척 하는 연극은 막을 내린다. 게임은 끝났다. 아직 삼페인을 터뜨릴 때는 아니라고? 맞는 말이다. 승부는 끝났어도 드라마는 계속된다. 샴페인은 이 멋진 드라마를 마저 지켜보고 터뜨려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