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불교신문]
탈원전, 우리의 양심을 찾는 길
독일 탈원전을 결정한 ‘윤리위원회’
때는 2012년 겨울, 베를린. 필자가 탈핵견학단을 이끌고 도착한 밤, 가로등이 많지 않아 도시는 굉장히 어두웠다. 식당에 들어가니 촛불이 기본이고 실내등은 은은하다.
그 다음날 베를린자유대학에서 만난 원전에너지 정책의 권위자인 메츠(Lutz Mez) 교수는, “우라늄은 전 세계 120만톤 매장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우라늄을 이용한 양은 2010년까지 250만톤으로써 이미 묻혀있는 것보다 2배 이상 사용해버렸고 2025년까지 130~140개의 원전이 닫을 것”이라고 한다.
탈핵은 기술아닌 윤리의 문제
미래세대에 짐 지우지 말아야
윤회로 태어나도 방사능 두려워
또, “원전 산업의 문제, 해결되지 않는 핵폐기물, 산업의 역량(기존 발전소 관리, 새로 증설), 숙련된 노동력의 한계, 건설비용의 증가, 테러 등을 고려할 때 원전은 멈춰야할 이유가 있다면서, 다른 방식의 발전 시설은 용도가 끝나면 다른 용도로 활용이 가능하지만 원전은 그게 불가능하며 폐쇄비용이 엄청나다”고 했다.
이보다 더욱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것이 있었다. 핵발전소는 부모세대가 자식세대에 희생을 강요하는 반인륜적 행위이자 치명적인 윤리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당시 메르켈총리는 탈원전정책을 각양각색의 17인으로 구성된 ‘윤리위원회’가 결정하도록 하는 요구를 수용했다는 것이다. 왜 ‘윤리위원회’였을까? 탈원전은 양심의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대안보다 더 중요한 것을 독일은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윤리위원회는 독일국민이 TV를 통해 지켜보는 가운데 8주간의 토론을 통해, 윤리문제 뿐 아니라 에너지전환이 충분이 가능하다는 점, 독일의 미래경제도 탈핵에 있다는 명쾌한 결론을 국민 앞에서 공개적으로 도출하였던 것이다.
독일의 그러한 과정은 인류가 추구해야할 보편적인 가치를 담고 있었기에 필자에게는 뚜렷한 기억으로 남았다.
잠 못 이루는 세월
돌이켜 보면 2011년 봄 후쿠시마 핵재앙은 전대미문의 엄청난 사건이었다. 1979년의 스리마일 원전사고와 1986년의 체르노빌 원전폭발까지는 우연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같은 사고가 세 번 반복되면 우연이 아니라 확률의 세계로 들어간다. 지금 세계 450개 원전 가운데 같은 확률로 발생한다면 천년이면 남아날 생물이 없다. ‘현 세대가 미래세대에 가하는 테러’이자 ‘인류의 존망’이 걸린 문제다.
당시 더욱 충격을 받은 것은 동료교수들의 태도였다. 필자의 4대강 반대 활동을 열심히 성원해주던 공과대학의 교수 두 분께 이 문제를 거론했더니, 이 분들이 말한다. ‘대안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놀랐다. 대안이 없다니? 원전비중이 얼마나 된다고? 기껏 전기공급량의 1/3밖에 안되는데, 다른 깨끗한 에너지로 전환해가면 되는데 대안이 없다니. 그럼 독일은 무엇인가?
며칠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이 분들 정말 제정신인가? 평소에 동지처럼 지냈던 분들이라 충격이 심했다. 4대강은 문제되는데, 더 심각한 핵발전은 대안이 없으니 받아들여야 된다? 문제는 ‘그들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보통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많은 종교인들조차도 그러했다. 이건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
과연 대안이 없는가? 인터넷으로 살펴보니 독일은 너무도 훌륭하게 대안을 찾아가고 있었다. 당장 가서 보고 듣고 확인하고 왔다. 견학 후 결론은, ‘대안이 있을 뿐 아니라 그 대안들이 미래경제를 위해서도 매우 훌륭하다’는 것이다. 재생가능한 자연에너지로 전환하려는 노력은 경제적으로도 훨씬 많은 공익적 가치를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심을 회복하는 일이라는 자부심도 깔려있다.
그동안 우리도 탈원전 운동과 노력이 결실을 맺어 대통령이 탈원전을 선언했다. 하지만 탈원전을 선언한지 1년 남짓한 지금 반동이 거세다. 보수언론과 친원전세력이 세차게 반발하고 있다.
1980년에 국민투표로 원전불가를 선언했던 스웨덴이 2000년대 접어들면서 원전이 가동된 걸 보면 선언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스웨덴 같은 녹색선진국에서조차 말이다.
무슨 일이든지 새로운 길을 열어갈 때는 반대측의 힘이 작용하는 것은 물리의 법칙 같은 것이다. 대못을 뺄 때는 지긋하게 빼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한번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추구해가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오스의 학생들
때는 흘러 2017년 여름. 베트남을 지나 라오스에 접어들어 30km쯤에 있는 락사오(Lak Sao). 그 동네에서의 1년전 순례길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5월에 서울에서 걷기 시작한 후 일본 대만 홍콩 베트남을 거쳐 8월말에 도착한 곳. 어느 나라든 걸어가면서 얻는 느낌은 차 타고 지나치는 것과는 비할 바 없이 풍성하지만, 라오스의 한 달은 행복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특히 락사오 지방은 자연 그대로 풍치를 만끽하면서 그들의 삶의 양식 하나하나가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그런 가운데 더욱 강렬했던 추억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맨발의 동자승 탁발의 현장이다. 라오스에서 접한 스님들에게서 대중과의 삶과 일체가 되어 있는 탁발승들의 모습, 그러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연히 넘나드는 듯한 모습, 그리고 그에 대한 대중의 공경심 등 강렬한 아름다움을 접하였다.
때는 2012년 겨울, 베를린. 필자가 탈핵견학단을 이끌고 도착한 밤, 가로등이 많지 않아 도시는 굉장히 어두웠다. 식당에 들어가니 촛불이 기본이고 실내등은 은은하다.
그 다음날 베를린자유대학에서 만난 원전에너지 정책의 권위자인 메츠(Lutz Mez) 교수는, “우라늄은 전 세계 120만톤 매장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우라늄을 이용한 양은 2010년까지 250만톤으로써 이미 묻혀있는 것보다 2배 이상 사용해버렸고 2025년까지 130~140개의 원전이 닫을 것”이라고 한다.
탈핵은 기술아닌 윤리의 문제
미래세대에 짐 지우지 말아야
윤회로 태어나도 방사능 두려워
또, “원전 산업의 문제, 해결되지 않는 핵폐기물, 산업의 역량(기존 발전소 관리, 새로 증설), 숙련된 노동력의 한계, 건설비용의 증가, 테러 등을 고려할 때 원전은 멈춰야할 이유가 있다면서, 다른 방식의 발전 시설은 용도가 끝나면 다른 용도로 활용이 가능하지만 원전은 그게 불가능하며 폐쇄비용이 엄청나다”고 했다.
이보다 더욱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것이 있었다. 핵발전소는 부모세대가 자식세대에 희생을 강요하는 반인륜적 행위이자 치명적인 윤리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당시 메르켈총리는 탈원전정책을 각양각색의 17인으로 구성된 ‘윤리위원회’가 결정하도록 하는 요구를 수용했다는 것이다. 왜 ‘윤리위원회’였을까? 탈원전은 양심의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대안보다 더 중요한 것을 독일은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윤리위원회는 독일국민이 TV를 통해 지켜보는 가운데 8주간의 토론을 통해, 윤리문제 뿐 아니라 에너지전환이 충분이 가능하다는 점, 독일의 미래경제도 탈핵에 있다는 명쾌한 결론을 국민 앞에서 공개적으로 도출하였던 것이다.
독일의 그러한 과정은 인류가 추구해야할 보편적인 가치를 담고 있었기에 필자에게는 뚜렷한 기억으로 남았다.
잠 못 이루는 세월
돌이켜 보면 2011년 봄 후쿠시마 핵재앙은 전대미문의 엄청난 사건이었다. 1979년의 스리마일 원전사고와 1986년의 체르노빌 원전폭발까지는 우연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같은 사고가 세 번 반복되면 우연이 아니라 확률의 세계로 들어간다. 지금 세계 450개 원전 가운데 같은 확률로 발생한다면 천년이면 남아날 생물이 없다. ‘현 세대가 미래세대에 가하는 테러’이자 ‘인류의 존망’이 걸린 문제다.
당시 더욱 충격을 받은 것은 동료교수들의 태도였다. 필자의 4대강 반대 활동을 열심히 성원해주던 공과대학의 교수 두 분께 이 문제를 거론했더니, 이 분들이 말한다. ‘대안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놀랐다. 대안이 없다니? 원전비중이 얼마나 된다고? 기껏 전기공급량의 1/3밖에 안되는데, 다른 깨끗한 에너지로 전환해가면 되는데 대안이 없다니. 그럼 독일은 무엇인가?
며칠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이 분들 정말 제정신인가? 평소에 동지처럼 지냈던 분들이라 충격이 심했다. 4대강은 문제되는데, 더 심각한 핵발전은 대안이 없으니 받아들여야 된다? 문제는 ‘그들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보통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많은 종교인들조차도 그러했다. 이건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
과연 대안이 없는가? 인터넷으로 살펴보니 독일은 너무도 훌륭하게 대안을 찾아가고 있었다. 당장 가서 보고 듣고 확인하고 왔다. 견학 후 결론은, ‘대안이 있을 뿐 아니라 그 대안들이 미래경제를 위해서도 매우 훌륭하다’는 것이다. 재생가능한 자연에너지로 전환하려는 노력은 경제적으로도 훨씬 많은 공익적 가치를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심을 회복하는 일이라는 자부심도 깔려있다.
그동안 우리도 탈원전 운동과 노력이 결실을 맺어 대통령이 탈원전을 선언했다. 하지만 탈원전을 선언한지 1년 남짓한 지금 반동이 거세다. 보수언론과 친원전세력이 세차게 반발하고 있다.
1980년에 국민투표로 원전불가를 선언했던 스웨덴이 2000년대 접어들면서 원전이 가동된 걸 보면 선언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스웨덴 같은 녹색선진국에서조차 말이다.
무슨 일이든지 새로운 길을 열어갈 때는 반대측의 힘이 작용하는 것은 물리의 법칙 같은 것이다. 대못을 뺄 때는 지긋하게 빼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한번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추구해가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오스의 학생들
때는 흘러 2017년 여름. 베트남을 지나 라오스에 접어들어 30km쯤에 있는 락사오(Lak Sao). 그 동네에서의 1년전 순례길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5월에 서울에서 걷기 시작한 후 일본 대만 홍콩 베트남을 거쳐 8월말에 도착한 곳. 어느 나라든 걸어가면서 얻는 느낌은 차 타고 지나치는 것과는 비할 바 없이 풍성하지만, 라오스의 한 달은 행복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특히 락사오 지방은 자연 그대로 풍치를 만끽하면서 그들의 삶의 양식 하나하나가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그런 가운데 더욱 강렬했던 추억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맨발의 동자승 탁발의 현장이다. 라오스에서 접한 스님들에게서 대중과의 삶과 일체가 되어 있는 탁발승들의 모습, 그러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연히 넘나드는 듯한 모습, 그리고 그에 대한 대중의 공경심 등 강렬한 아름다움을 접하였다.
또 하나는 공부에 열심인 어린 학생들과의 조우다. 걸어가다가 필자 일행을 발견한 교사의 초청으로, 영어학교에서 짧은 영어로 강의를 하게 되었다. 학생들에게 서울에서 다람살라를 거쳐 바티칸까지 이르는 생명ㆍ탈핵실크로드 순례길을 설명했다.
학생들이 질문한다. “핵무기와 핵발전소 가운데 무엇이 더 위험한가?” 필자는, “핵무기는 사람이 통제할 수 있다. 지금 김정은과 트럼프가 핵전쟁도 불사할듯이 공포스런 분위기이지만 두사람이 합의만 하면 얼마든지 멈출 수 있다. 위험하긴 하지만 인류의 통제 아래 있다. 하지만 핵발전소는 큰 지진이 나면 터진다. 지진은 인류가 뜻대로 할 수 없는 자연현상이다.”라고 하였다. 과연 1년이 지난 지금 핵무기는 합의가 되고 있다. 하지만 지진은 더욱 커져가고 있다.
필자가 추가로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주변 수십킬로미터는 영구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수백킬로미터까지 농산물은 방사능으로 오염되기 쉽다는 설명을 하니까 “다른 나라들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필자는 “한국과 대만은 원전이 많지만 탈원전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중국은 여전히 늘리려고 한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희소식이 있다. 라오스와 인접한 베트남이 원전도입을 백지화하기로 했다.” 그 소식을 처음 접하였던지, 학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없애는 일을 시작하는 일은 우리가 하지만 마무리해가는 일은 여러분의 일이다. 왜냐하면 원전 하나를 안전하게 폐기하는 데 줄잡아 50년쯤 걸린다. 지구촌 450개 모두를 해체하려면 합의하는 시간도 걸리고 최근 지은 것까지 없애려면 백년은 넘게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할 일이 많다.”
눈빛 초롱하게 엄숙한 표정을 짓던 그 학생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건 인류 모두의 사업이다.
‘날 적마다 좋은 국토, 핵발전소 없는 국토’
걸으면서 만난 일행에게 필자가 설명한 것이 기억난다.
“지금 원전해체 시장이 엄청 큽니다. 전 세계 핵발전소가 445개 있는데, 국제원자력기구(IAEA) 조사로는 향후 50년간 1000조 원 시장이 형성될 거랍니다. 연간 20조 원 시장이죠. 이 주제로 3년 전에 불교계와 원불교계가 공동주최로 국제 세미나도 개최했지요. 수명이 다한 원전의 조기 해체를 유도함으로써 안전을 적극적으로 확보해가는 전략으로 말입니다.”
요즘 정부가 원전해체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보니 그때 뿌린 씨앗이 크고 있는 것 같아서 흐뭇하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제대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공을 들여야 한다.
필자가 자주 들고 다니는 현수막 가운데, ‘날 적마다 좋은 국토, 핵발전소 없는 국토’라는 구절이 있다. ‘날 적마다 좋은 국토’는 새벽예불을 올릴 때 읽는 ‘이산혜연선사의 발원문’에 있는 구절이다. 방사능 오염은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지속된다. 윤회로 새 세상에 태어나도 방사능으로 오염된 세상을 만날까봐 두렵다.
도보순례는 여러 사람이 함께 하면 효과가 훨씬 크다. 하지만 혼자 하는 순례도 나름의 효과가 있다. 걷는 리듬을 타고 가다 보면 명상을 하기 쉽다. 좌선과는 다르다.
문득 걸으면서 더욱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원전을 찬성하는 이들은, 지금 후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본보기를 보이는 것 아닌가? 그들은 아이들에게 자신들의 자식에게 그런 희생을 강요하는 전례를, 보여주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하루빨리 일깨워 주는 것, 그게 불교계의 임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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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수원대 교수, 국토미래연구소장)
출처 : 현대불교신문(http://www.hyunbulnews.com)
( * 원래 사진을 함께 기고하였으나 지면사정상 누락된 것을, 다시 추가로 편집해서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