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양주’라는 사람이 선언하기를 ‘내 몸에 털 한 오라기를 뽑아서 천하에 이익이 된다고 해도 나는 그 털 한 오라기를 끝내 뽑지 않겠다’고 떠벌였다가 분노한 군중에 제압당해 온몸의 털을 뽑히고 죽었다고 한다. 나의 행동에는 반드시 상대의 맞대응이 있다. 그러므로 도교의 이기주의 전술은 이기지 못하는 어리석은 전술이다. 양주는 도교의 사상적 출발점을 제시한 사람이다. 도교가 망한 것은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기려면 에너지를 가져야 하고 에너지를 가지려면 내 몸의 털을 뽑아 패거리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 중학생 때일 거다. 선생님이 말했다. ‘인생은 요령이야. 요령으로 살아야 성공할 수 있어. 고지식하게 범생이로 살아봤자 이득이 없다구.’ 그 말을 듣고 심한 저항감을 느꼈다. 인생은 요령이라고 떠벌이는 짓이야말로 참으로 요령없는 짓이 아닐까? 요령은 혼자 알고 있다가 은밀히 한 번쯤 써먹는 거지 떠벌이고 다니면 안 된다. 요령을 반복하여 사용하면 수법을 들킨다. 상대가 가만있지 않는다. 언제라도 맞대응을 한다. 하여간 내 어릴적 선생님은 늘 반면선생이었다. 철학의 답은 의사결정권의 조직과 획득이다. 내 맘대로 결정할 수 있는게 아니다. 내 몸의 터럭을 뽑든 안 뽑든 인생의 요령을 부리든 안 부리든 내게 권한이 없다. 먼저 권한을 얻어야 한다. 의사결정권은 하늘에서 떨어지는게 아니다. 영혼설은 인간이 원래부터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입장이다. 소박한 희망사항이다. 이성설은 교육을 받으면 의사결정권이 생긴다는 견해다. 나름 말 되지만 약간의 비교우위에 불과하다. 의사결정권은 스스로 조직해야 한다. 에너지의 통제권을 얻어야 한다. 상황을 장악해야 한다. 게임에서 이겨야 한다. 주어진 환경과의 게임이다. 피부색의 제한을 이기고 성별의 제한을 이기고 성소수자의 제한을 이겨내야 한다. 자신에게 가해진 모든 제한을 이겨서 사건의 통제권을 획득해야 한다. 사건을 일으키고 질, 입자, 힘의 단계까지 3대의 의사결정을 진행해야 통제권이 조직된다. 구조론의 답은 그것이 선이기 때문이 아니고 도덕이기 때문이 아니고 윤리와 부합하기 때문이 아니고 그것이 사회의 정의이기 때문도 아니고 그것이 옳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그래야 그 자체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구조론의 견해에 반하는 행동은 장기적으로 사건의 통제권을 상실하게 한다. 배를 버리면 선장노릇을 할 수 없다. 철학을 배반하면 철학할 수 없다. 내 몸의 터럭을 뽑지 않으면 털을 강제로 뽑힌다. 이기는 길로 가야 한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구조론이 그 길을 안내하는 것이다. 다른 길로 가면 게임에 져서 실패한다. 의도는 배반당한다. 뜻대로 안 된다. 물론 경험적으로 선과 도덕과 정의가 옳을 때가 많다. 그러나 진실로 말하면 선과 도덕과 정의와 윤리 따위의 남에게 칭찬을 듣고 평판을 높이는 행동은 객관식 시험문제의 답을 찍는 것과 같아 새로운 상황을 만나면 쓸모없게 된다. 운명의 기로에 설 때다. 우리로 하여금 철학하게 하는 상황은 선과 악 사이에서 정의와 불의 사이에서 애매하다. 객관식으로 찍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인간은 시험에 든다. 문제의 답을 찾는 상황이 아니라 거꾸로 자신이 문제를 출제해야 하는 상황이다. 자신의 행동여하에 따라 이후 많은 다른 사람의 행동이 연동되어 한꺼번에 결정되는 엄중한 상황이다. 그 상황에는 자신이 에너지를 틀어쥐고 판을 설계해야 된다. 에너지 운용에 성공하려면 에너지 자체를 배반하지 말아야 한다. 철학의 정답은 복수하는 것이다. 호응하는 것이다. 내게 가해진 만큼 맞대응하여 상황을 이겨 통제권을 얻는 것이 복수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과가 의도대로 안 되기 때문이다. 군대를 해산하고 장군이 된다거나 자동차를 부숴놓고 운전하거나 할 수는 없다. 악을 행하겠다고 결심할 수 없다. 그러다가 교도소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악은 주변에 의해 저지된다. 그 전에 내 존재가 파괴된다. 우리가 나라고 규정한 것은 상당부분 생존본능이다. 그것은 어설프고 희미하다. 인간은 미약한 존재다. 인간은 대부분 에너지를 외부환경에 의존하고 있다. 나의 이익을 주장하다가는 숙주를 죽이고 에너지원을 상실하여 죽는다. 아기가 나의 자아를 외치며 엄마에 맞서면 자신도 죽는다. 인간의 주체적인 결정권은 거의 없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희미하다. 여왕개미를 잃은 개미는 일주일도 살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죽는다. 여왕개미를 떠나서 개미 자신의 고유한 자아나 정체성은 없는 것이다. 먼저 나의 존재 그 자체를 조직하고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내가 일으킨바 나로부터 비롯된 곧 내가 에너지원을 틀어쥔 사건이며 나의 통제가능성 안에 있어야 하며 그것은 소년에게 없고 청년에게는 희미하며 어른이 되어야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나의 벌여놓은 일과 나의 키워놓은 자식과 나의 모아놓은 자산과 나의 얻어놓은 신뢰가 쌓여서 조금씩 형태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나라는 것이 존재가 없는데 나를 위한다는 말은 불성립이다. 구조론이 안내하는 답은 다른 모든 출구가 막힌 상태에서 오직 그 방향만 문이 열려있고 그 경우로만 통제가능성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고민하지만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실패한다.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꽉 막혀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의 길만이 열려있는 것이다. 우주 안에 에너지원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에 성공하는 길은 단 하나뿐이다. 도박판과 같다. 돈을 딸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는게 아니라 돈을 딴 사람만 도박판에 앉을 자격이 있다. 돈을 잃으면 도박판에서 쫓겨난다. 전쟁과 같다.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게 아니라 이긴 사람만 전쟁을 할 수 있다. 지면 존재가 없다. 내 몸의 털을 뽑지 않고 개기다가는 맞아죽기 때문에 뽑지 않겠다고 말할 기회도 없다. 철학은 의사결정한다. 먼저 결정권을 얻어야 한다. 에너지원을 틀어쥐어야 한다. 답은 하나뿐이다. 다른 모든 길은 의사결정권을 해치는바 모순이다. 불성립이다. 자가당착이다. 제 발등을 찍는다. 나만 살겠다고 떠들다가 나부터 죽는다. 털을 뽑혀서 죽는다. 인간은 영혼을 찾는다. 영혼은 내 안에 없고 천하에 있다. 이건 비유다. 인간으로 하여금 영혼의 존재를 상상하게 한 그 무엇 말이다. 그것은 의사결정권이며 에너지의 통제권이다. 소나 말은 통제권이 없다. 사건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래서 영혼이 없다. 인간이 사건을 일으킨다. 그래서 영혼이 있다. 내 안에는 없다. 우주에 있다. 우주의 완전성과 사건의 지속가능성을 빌어서 우주의 진보에 묻어간다. 양주가 털을 뽑혀 죽었다는 말은 필자가 지어낸 이야기다. 반드시 상대가 맞대응을 하므로 내 소박한 의도가 보기 좋게 좌절된다는 말이다. 작은 일은 가능하지만 큰일은 불가능하다. 내 맘대로 하겠다는 노자생각 니체생각은 어린아이의 유치한 생각이다. 그렇게 맘대로 하도록 세상이 당신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당신은 배반당한다. 복수밖에 방법은 없다. 그것은 환경의 부름에는 호응하고 질문에는 대답하고 원인에는 결과하고 시작이면 종결하고 머리에는 꼬리달아 사건을 전개하는 것이다. 외력의 작용에 맞대응하여 능동적으로 의사결정하는 것이다. 사건을 일으켜 에너지를 운용하는 것이다. 공간에서는 안 되고 시간에서는 가능하다. 그래서 철학하게 된다. 에너지는 시간을 타고 흐른다. 3대의 계통은 시간에서 조직된다. 일의 순서와 방향을 조직해야 한다. 개별적으로 대응할 것이 아니라 여러 사건을 연결하여 하나의 근원에 대응해야 한다. 나의 주어진 피부색과 성별과 신분과 국적과 외모와 능력에 일일이 대응할 것이 아니라 신과 일대일로 맞서야 한다. 영혼을 조달해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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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어진 피부색과 성별과 신분과 국적과 외모와 능력에 일일이 대응할 것이 아니라 신과 일대일로 맞서야 한다. 영혼을 조달해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