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존재의 근본은 무엇인가? 이 원초적인 물음에 대한 인류의 입장은 없다. 그러고도 잠이 온다는 말인가? 모든 사유의 출발점이 되는 근본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입장이 없다니. 기준도 없고 원칙도 없다니. 황당한 일이다. 생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창조론과 진화론이 있다. 창조론은 일방적 선언일 뿐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점에서 론이라고 말할 수 없다. 창조설이다. 생명의 원소가 있다거나 신이 진흙에 입김을 불어 넣어 생명을 탄생시켰다거나 하는 아이디어가 있지만 유치하다. 구체성이 없다는 점에서 하나마나 한 소리다. 엄밀하게 말하면 다윈의 진화론도 틀렸고 유전자설이 정답이다. 생명은 오직 유전자 하나로 설명되어야 하며 다른 것은 부분적 진실이거나 허튼소리다. 근래에 미토콘드리아가 없는 진핵생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있었는데 사라졌다고. 진화가 아니라 퇴화다. 바이러스는 다른 생물이 퇴화해서 만들어진 부스러기다. 이런 부분은 종의 진화라는 개념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생태계의 공진화라는 큰 카테고리에 담을 수는 있다. 생물이 종 단위로 진화한다는 소진화 개념은 틀렸고 생태계 안에서 공진화한다는 대진화 개념이 옳다. 사유의 틀을 깨자.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확실한 것 하나로 설명해야 한다. 진화는 유전자가 진화하는 것이며 창조는 신이 창조하는 것이다. 즉 주어가 없다. 진화도 주어가 빠졌고 창조도 주어가 빠졌다. 애초에 잘못된 접근이다. 세상을 설명하는 언어로는 플라톤의 이데아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설, 서양의 사원소설이 있다. 동양의 음양오행설이나 석가의 연기설도 있다. 공통적으로 주어가 없어서 허무하다. 구조론으로 보면 세상은 에너지의 방향성 하나로 모두 설명된다. 에너지의 방향성이 일정한 조건에서 계를 이루고 계 안에서의 내부적인 모순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구조가 작동하여 의사결정하는 것이 존재다. 생명은 진화로 설명될 수 있듯이 세상은 의사결정구조로 설명될 수 있다. 생명이 DNA라는 근본이 있듯이 세상은 에너지의 방향성이라는 근본이 있다. 진화했다고 끝난게 아니다. 뭐가 진화했지? 종이 진화했다? 그런데 왜 미토콘드리아가 없지? 종은 인간이 변별하는 단위에 불과하다. 인간이 개입하면 안 된다. 자체의 논리를 따라야 한다. 생명의 기초는 DNA의 변이다. 유전자의 염기서열 조합이 변해서 생명이 탄생한 것이다. 에너지의 방향성이 계 내부의 모순을 처리해서 존재가 이룩되었다. 존재는 일정한 조건에서 일정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즉 외력을 내부적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가 있어야 한다. 내부와 외부를 차별하는 조건 말이다. 안도 없고 밖도 없어 밑도 끝도 없다면 존재를 판단하는 기준선이 없는 것이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정하는 것이 에너지의 방향성이다. 에너지의 방향성은 수학적 효율성에서 나온다. 에너지는 움직이고 움직임은 효율적인 코스를 선택한다. 비효율적이면 떠밀리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움직이고 움직이면 충돌하고 충돌하면 떠밀린다. 떠밀리면 깨진다. 깨지면 법칙이 없다. 법칙이 없으면 알 수가 없으므로 법칙이 있는 경우만 인간의 관심사가 된다. 법칙이 있는 경우는 떠밀리지 않은 것이고 그것은 충돌에서 이겨서 살아남은 것이며 살아남은 것은 비교우위가 있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효율성이며 보다 효율적인 코스로 움직인 것이 계를 형성하고 외력을 처리하여 자기를 보존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존재라고 부르고 존재야말로 모든 논의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생명을 종으로 보는 것은 다윈의 즉흥적인 아이디어에 불과하다. 인간의 편의로 본다면 종은 생명에 접근하는 좋은 도구가 된다. 가끔 노새와 같은 이상한 것이 나타나서 괴롭히지만 무시한다. 왜냐하면 귀찮으니까. 종이라는 개념은 전형적인 인식론적 접근이며 존재 그 자체의 사정이 아니고 인간의 그냥 편의다. 종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상한 잡종들이 많다. 성전환을 하는 종도 있고 단성생식을 하는 종도 있다. 유전자만이 진실하다. 에너지의 방향성만이 진실하다. 그것이 주어다. 유전자가 주어가 되고 에너지의 방향성이 주어가 되며 나머지는 동사나 서술어로 기능한다. 차는 잘 간다. 차를 두고 잘 가는 것이라고 말해도 된다. 언어적으로 엄격해지자. 차를 정확히 가리키는 것과 잘 굴러가는 거시기가 어쩌고 하며 말을 얼버무리는 것은 다르다. 에너지의 방향성이 일정한 조건에서 계를 이루고 계가 외력의 작용을 내부적으로 처리하므로 사건이 일어나며 사건은 내부에서 의사결정하여 독립적으로 외부환경에 대응하므로 하나의 존재가 된다. 사건은 에너지의 효율성이 지배하므로 수학적으로 분석된다. 합법칙적이다. 이러한 존재 내부의 메커니즘을 따르는 것이 존재론이다. 그냥 말이냐 당나귀냐 하고 관찰하여 분석하는 것은 인식론적 접근이다. 인식론적 접근이 편하다. 사람들이 내부의 메커니즘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통제할 수 없다는 병폐가 있다. 유전자를 조작하여 신종을 만들 수 있지만 인식론적인 접근은 한계가 있다. 얕은 단위에서 인식론을 편법으로 쓸 수 있으나 깊은 경지에서는 존재론으로 갈아타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이 처음 만들어지는 절차대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을 낳아보기 전에는 사람이 어떻게 태어나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는 말이다. |
"에너지의 방향성이 일정한 조건에서 계를 이루고, 계 안에서의 내부적인 모순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구조가 작동하여 의사결정하는 것이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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