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쓰면 빨갱이였다. 반공영화에는 간첩이 쓰는 안경을 무리가 일제히 밟고 지나가는 장면이 클리셰로 등장한다. 무학인 어머니는 야학에 이틀을 다니고 사흘째 할머니에게 머리채를 잡혀 끌려왔다. 글자 알면 빨갱이였기 때문이다. 글자 아는 사람은 모두 죽었다. '글자 좀 안다고 유세 떨고 다니던 놈들은 싹 다 죽었지.' 어른들은 그런 말을 대수롭지 않게 내뱉곤 했다. 노래 부르면 빨갱이였다. 젊은이들이 글자를 가르쳐 주면서 인터내셔널가 따위를 부르게 했던 모양이다. 멋모르고 모여서 노래를 불렀던 사람은 모두 죽었다. 빨치산들이 밤에 산에서 내려와 마을 사람 이름을 부른다. 다음날 군경이 마을에 나타난다. ‘아무개 있나?’ ‘와?’ ‘땅!’ 밤에 이름을 불린 사람은 모두 죽었다. 그 소리를 듣고 밀고하던 귀가 있었다. 사람들은 다 죽고 그들이 경작하던 땅은 살아남은 사람이 차지했다. 경주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다. 인민군이 포항을 점령하고 안강으로 내려왔다. 국군은 사령부를 산꼭대기에 설치했다. 읍참마속과 같다. 마속은 어리석게 산꼭대기에 진을 쳤다가 포위되어 죽었다. 인민군 특공대가 산 정상부를 포위하고 타격하자 안강까지 뚫렸다. 경주까지 5킬로다. 경주고 학도병이 경주역에 집결했다. 경주여고 여학생이 걸어준 꽃다발 목에 걸고 그들은 사방전투에서 죽었다. 영남 알프스가 이어지는 경주 주변 산골에는 일제강점기부터 야산대가 있었다. 산골마을에 소문이 잘못 났다. 부산이 해방되었대. 인민군이 곧 들어온대.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배워야 해. 이 노래만 부르면 인민군이 살려준대. 일자무식 촌놈들이 아는게 있을 리 없다. 그들은 모두 죽었다. 경주 부근이 이 정도였으면 제주도가 어쨌을지는 짐작이 간다. 상상할 수도 없다. 지옥 속의 지옥이었다. 빨갱이라는 말은 그냥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때 쓰는 말이다. 널 죽일거야. 인간이 스트레스를 받고 궁지에 몰리면 발악한다. 옛날에는 지역주의가 심했다. 이웃 마을도 함부로 못 가는 시절이었다.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터를 닦으려면 뭐라도 저질러야만 했다. 전쟁이라도 일어나야 했다. 철수하는 미군을 붙잡아 놓으려면 어그로를 끌어야 했다. 인간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동물이다. 불을 지를 수는 있는데 끌 수는 없다. 불은 모든 것을 태우고 남은 것이 없을 때 꺼진다. 모두의 가슴은 새까맣게 타서 하얀 재가 되었다. ### 옛날에는 모든 마을과 집안이 특정 집안이나 마을과 원수지간이었다. 좁은 제주도에서 피난을 가려고 해도 원수진 가문, 원수진 마을로는 갈 수 없다. 육지에서도 복수를 대물림하는 원수진 마을과 가문 간에 살인과 약탈은 예사다. 이때다 하고 원수의 씨를 말렸다. |
전국에서 제주 4.3사건과 유사한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그걸 모르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호의 발목을 잡고 있네요. 살아남은 사람들의 괴로움만 더해갑니다.